제132화· 이름 없는 유적 (1)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주변에서 시선이 몰려들었다·
서로 입을 가리고 웅성거리는 것은 덤·
당연히 좋은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다·
“저 망나니랑 아린 황녀가 약혼을 한다고? 아린 황녀가 아까운걸?”
“내 말이! 암만 베르트 공작가라 해도 저런 세상 살기 귀찮아하는 남자랑 살아야 한다니 나라면 그냥 독신으로 살래·”
“저 음침한 눈 좀 봐! 난 쟤 볼 때마다 기분 나쁘더라!”
귀를 가까이 대지 않는 이상 안 들릴 소리였지만 공교롭게도 소년은 그 말들을 모두 듣고 있었다·
허나 딱히 내색하거나 반응하진 않았고 그저 묵묵히 갈 길만 걸어갔다·
“···!”
그러던 와중 계단에서 올라온 아린이 소년을 마주하고선 흠칫 들썩였다·
“아 안녕 시안?”
최대한 자연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봤지만 얼굴엔 당황함이 역력했다·
-꾸벅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까딱이고선 그녀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뭐야? 이젠 인사도 안 하겠다는 거야!”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아린은 볼에 바람을 넣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덤덤하게 모두를 지나치며 곧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끼익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문을 열자
“수고했어·”
기다리고 있던 시안이 소년을 마주해주었다·
수고했다는 말에 소년은 빵싯 웃더니
-펑!
요상한 폭음과 함께 본모습을 드러냈다·
“어렵진 않았어?”
“응! 파파로 변신하고 다니니까 완전 재밌었어!”
소년의 정체는 시안으로 변신하고 있던 나나였다·
잠깐의 여정이었지만 무척이나 재미있었는 듯 입가엔 행복한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시안은 기특한 마음에 나나의 머리를 한껏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케이람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 * *
[네가 기어이 미쳤구나?]
“나도 부정은 안 하려고·”
미치지 않고서야 나도 이런 짓을 할 것 같진 않으니까·
[그래서 기어이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저 꼬맹이를 대역으로 세워두고 떠나시겠다? 너 가만 보면 이런 거 은근 즐기는 것 같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들켜도 아무 상관 없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엄연히 들키지 않으려고 이 짓거리를 하는 거다·
케이람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만 뭐 어쩌겠는가?
조금이라도 비집고 나갈 꼼수가 있다면 그걸 전적으로 이용해야지·
“다녀왔습니다· 도련님!”
나나의 뒤를 이어 브라이언이 복귀했다·
“수고했어· 어땠냐?”
“특별히 문제가 있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조차도 살짝 헷갈릴 만큼 나나가 워낙 도련님 흉내를 잘 냈던 터라····”
내가 시킨 거라곤 그저 입 다물고 맥아리 없는 눈으로 다니라는 것뿐이었는데 그래도 꽤 비슷하게 따라는 한 모양이다·
이래서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 했던 건가?
역시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저 도련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학생들이라면 몰라도 시리카 교관님을 비롯해 도련님과 밀접하신 분들까지 속이실 수 있을지····”
“당연히 안 괜찮지· 아마 당주님한텐 바로 들킬걸?”
“예? 그럼 어찌해야?”
“내가 시켰다고 해·”
눈이 휘둥그레진 브라이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러면 되겠습니까? 시리카님께서 당황해하진 않으실지?”
“당황이 아니라 분노하실걸? 그래도 내가 했다고 하면 널 죽이진 않으실 거야·”
급 얼굴이 새파래진 브라이언은 선 채로 굳어버렸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한 60% 확률로 살 수 있을 거라 본다·
절반은 넘으니 됐지 뭐·
위험성 있다는 건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어차피 수업이야 안 듣고 살았으니 굳이 보낼 생각은 없으며 그냥 오늘처럼 브라이언을 대동한 채 주기적으로 눈도장만 찍게 할 생각이다·
총장도 자리를 비운 마당에 아린 황녀도 당분간은 날 피할 것 같고 일단 이론상으로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만····
그냥 내가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게 맘 편할 것이다·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
케이람은 그런 나를 꿍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너 굳이 그 종이쪼가리 찾아야겠냐?]
전부터 느낀 거긴 한데 이쯤 되면 거의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내가 마서를 찾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마냥 싫다는 의사만 내비치지 말고 차라리 이유를 말해· 내가 마서를 찾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다소 직설적인 물음에 케이람은 입맛을 다셨다·
뭔가를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끝끝내 고개를 돌렸다·
[됐다 됐어·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주인님~]
안 어울리게 주인님은 무슨·
참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란 걸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 * *
검은 하늘에 푸른 장막이 드리워지는 새벽의 아침·
저 멀리 보이는 거구의 덩치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라! 시안 베르트! 준비는 되었느냐!”
고성방가도 저거보단 낫겠네·
몰래 나가는 게 무색할 만큼 아주 고래고래 떠들고 있다·
근데 이 녀석 자세히 보니 짐이 하나도 없다·
“너 짐은?”
“음? 달리 챙길 게 뭐 있겠느냐? 노델리까지 가는데 내 몸 하나면 충분한 것을!”
딱히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이번 체험학습이 끝나고 나면 나랑 대련하는 것 말이다! 그걸 위해서 내 친히 안내해주는 거라고!”
하나 말해주자면 세트가 제출한 체험학습 신청서는 당주 선에서 바로 기각됐다·
즉 이것은 체험학습이 아닌 엄연한 무단 외출·
나야 나름의 수를 두고 왔다지만 얘는 그런 거 없이 그냥 체험학습이 허가되었다고 굳게 믿으며 나온 것이다·
어차피 출석보다야 나와의 대련이 더 관심 있는 놈일 테니 나중 가서도 딱히 상관은 없으리라 본다·
현재 시간은 경비병들의 근무 교대가 이루어질 아침 6시에서 정확히 10분 전·
인수인계가 진행되는 그 잠깐의 틈을 타 재빨리 도시를 빠져나갈 것이다·
스파니아라·
대륙 통일전쟁 이후 발도 안 붙이던 곳이니 거의 20년 만의 방문인가?
일 년 내내 푹푹 찌는 메마른 사막·
추운 것보다 더운 것을 더 혐오하는 나로선 도저히 정을 붙일 수가 없는 곳이····
“어디 놀러 가시나 봐요?”
나와 세트의 몸이 동시에 굳어버렸다·
이후 황급히 고개를 돌린 녀석과 다르게 나는 좀처럼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거든·
작은 한숨과 함께 벌레 씹은 표정으로 몸을 돌리니
“참 부지런들 하시네요····”
한 손으로 입술을 쓰다듬으며 나를 향해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루나브가 보였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그녀의 손을 낚아채 구석으로 끌고 갔다·
-쾅!
이윽고 벽에 맞닿은 그녀의 옆으로 한 손을 강하게 내리쳤다·
“과격하기도 하셔라····”
영양가 없는 말은 무시가 답·
같잖은 말로 휘둘려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너 뭐야? 여기 어떻게 왔어?”
“그건 제가 물어볼 말 아닐까요? 이른 새벽에 남자 두 분이서 뭘 하려고 모이셨나요?”
“벼 별거 없어! 그냥 운동하려고 나온 거야!”
“변명을 하실 거면 좀 그럴싸한 거로 해주세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오네요·”
그녀의 음침한 두 눈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 째려보고 있었다·
“선배 체험학습 신청했다고 들었는데 그거 기각당했죠? 그래서 세트 왕자랑 몰래 나가시는 거고 스파니아 노델리에 위치한 이름 없는 유적에 가시려는 거잖아요·”
나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얼굴로 되물었다·
“너 책을 너무 많이 봤구나? 아님 소설 쓰는 게 취미니?”
“시치미 떼실 필요 없어요· 선배가 거길 왜 가시려는 건지 전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대뜸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뭐야 이건?”
“확인해 보세요·”
종이 한쪽엔 가람 학회를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있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내용을 확인해본 나는
“····”
그 자리에서 선채로 굳고 말았다·
“최근 저희 학회에서 발견해낸 따끈따끈한 자료에요· 과거 신마전쟁 때 마서의 힘을 통해 소환된 마수가 그 유적에 살고 있는데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그 마수를 레미하람이라고 부른다죠? 마서와 동일한 이름으로····”
감정이 동요한 나머지 등에서 식은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선배는 마서의 이름이 레미하람이란걸 알고 계셨죠? 참 신기해요· 분명 마서의 이름은 저희 학회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을 정도의 기밀인데 학회와 전혀 관련 없는 선배는 대체 어떻게 아셨을까? 누가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어중간한 변명은 내 무덤을 파는 것밖에 안 된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의미 없는 침묵 뿐·
그녀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 확신은 없었어요· 선배가 마서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해서 그 유적을 찾아갈 거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 저 세트 왕자랑 자주 붙어 다니시길래 뭔가 의심이 생기긴 했어요· 거기에 체험학습을 신청했다는 얘기를 듣고선 바로 확신이 들었죠· 선배가 그 유적을 찾아갈 거란 걸····”
그냥 얼 척이 없었다·
아니 근데 내가 체험학습을 신청했다는 건 어찌 안 거지?
당주 선에서 기각됐으면 애초에 다른 교관들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텐데?
이거 설마?
“아 참고로 선배가 체험학습을 신청했다는 건 저 사람한테 들었어요·”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세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말에 공원 한복판에서 혼자 실실대고 있길래 한심해 보이다가도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러더니 저만 알고 있으라면서 다 얘기해 주던걸요? 선배랑 조만간 체험학습 나갈 거라고····”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민 나머지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래 누굴 원망하겠는가?
저 바보를 데리고 일을 하려 한 내가 등신이지·
노기 어린 눈빛으로 녀석을 째려보니 놈은 머리를 긁적이며 실실 웃어댔다·
“원하는 게 뭐야?”
결국 현재 상황에서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루나브는 그제 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간단해요· 저도 그 유적에 데려 가주세요· 선배가 어떤 경위로 알게 됐고 어떤 이유로 마서를 찾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저 또한 마서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동행하려는 것뿐이니까·”
그녀는 앞서 건넨 자료 외에 품에서 또 다른 자료들을 꺼냈다·
“마서와 관련된 학회의 다른 자료들이에요· 어디서도 못 구하는 귀한 것들이니까 분명 도움이 되실 거예요·”
얼추 훑어만 봐도 학회의 기밀급 자료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의문을 넘어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거는 도움의 범주를 넘어선 엄연한 집착이다·
내 비록 그녀의 수명을 연장시켜주었다곤 하나 내가 했다는 것을 알리도 없는 마당에 얘는 무슨 이유로 나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유는?”
“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나한테 집착하는 이유가····”
그녀는 예상과 다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집착하는 이유요? 글쎄요? 이유라고 할 것도 있을까요?”
“뭐?”
“그냥 선배가 좋아서 그러는 건데····”
평소 그녀답지 않은 순진무구한 미소에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분명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수십 년간 믿어온 신념이 지금 이 순간 잠시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