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2화
“음····”
라온이 옆에 서 있는 카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광풍전주가 하는 게 좋겠지· 이번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 건 자네뿐이니까·”
카룬은 본인은 나서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섰다·
공적인 자리였기 때문에 자신을 광풍전주라고 높여서 말해주는 것 같다· 역시나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게 맞죠· 모든 계획의 중심에 저희 전주님이 계셨으니까·”
버렌이 카룬의 말대로라며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만이 아니야· 모든 싸움에 참여했잖아· 차원 내부, 흑탑 등반 그 이후에 이루어진 흑탑주와의 피 말리는 전투까지·”
마르타는 어서 그 활약상을 말하라며 말아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오늘 대존잘 라온이라 뭐든 괜찮아·”
루난은 잘생겼으니, 무엇을 해도 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 녀석은 요즘 잘생긴 게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음·”
라온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라온!”
“우리 아들!”
“도련님!”
실비아와 에드가, 시아 그리고 시녀들이 팔이 빠질 정도로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자신이 흑탑주의 목을 베었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잘했다! 라온!”
“조카! 믿고 있었다고!”
실비아의 반대편에 있는 아리스와 발데르도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
데니어도 그 옆에서 웃고 있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그의 웃음은 선명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결이 다르게 느껴졌다·
-무얼 하는 것이냐! 정신 차리고 빨리 끝내거라!
라스가 빨리 설명하라며 자신의 어깨를 내리쳤다·
-본왕은 배가 고프다고! 네가 글러트니에게 자랑했던 집밥을 먹고 싶단 말이니라!
녀석은 대충 끝내고 돌아가자며 자신의 뺨을 물고 늘어졌다·
“그럼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몬티로에 도착해서····”
라온이 라스한테 물린 채로 앞으로 나섰다· 연무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지금까지의 일을 말해주었다·
“···마지막에 체임버 님이 결전기를 사용해주신 덕분에 흑탑주의 빈틈이 열려서 놈의 목을 벨 수 있었습니다·”
마왕들을 본 사람 자체가 극소수였기에 흑탑주를 죽인 부분까지만 밝힌 후 뒤로 물러섰다·
“흑탑주의 목을 베었다는 게 정말이었다니····”
발데르가 손을 내려 난간을 찌그러뜨렸다·
“역시 내 조카다! 다들 보라고! 저게 내 조카야!”
그는 흥분한 듯 주변 사람들의 고막이 터질 정도로 괴성을 질러댔다·
“안 닥치냐?”
아리스가 귀를 틀어막은 채 손바닥으로 발데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라온을 조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녀는 그 더러운 주둥이에서 조카 소리가 또 나오면 죽여버린다며 이를 갈았다·
“그, 그럼 나는 뭐라고 불러야····”
“광풍전주님이라고 부르던가!”
아리스가 알아서 하라며 턱을 치켜들었다·
“광풍전주님! 믿고 있었습니다!”
발데르는 아리스의 말을 그대로 따르며 라온을 광풍전주님이라고 불렀다· 자존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또 그렇게 힘든 싸움을 했구나····”
실비아는 라온의 간단한 설명 속에서 처절했던 상황을 읽은 듯 눈시울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카룬 님····”
에드가는 이번 전쟁에서 카룬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느낀 듯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역시 내 동생이야! 잘했어!”
시아는 발데르를 따라 하듯 동생이라고 외치며 라온에게 손을 흔들었다· 많은 사람이 동생의 이름을 환호하고 있으니, 그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크흠!”
글렌은 관객들의 라온에 대한 감탄과 환호가 대화로 이어지기 시작할 때쯤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이번 전쟁은 오황오마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가 라온과 카룬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탑주가 마계의 문까지 만들며 거센 저항을 벌였지만, 광풍전주가 끝까지 따라붙어서 놈의 목을 베어버렸지· 만약 영화의 대마법사가 패한 채로 끝났다면 반대로 우리가 놈들을 피해서 그늘 속으로 숨어야 했을 것이다·”
글렌이 따스한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이번 전쟁은 역사에 남을 것이며 그 중심에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이 새겨질 것이다·”
그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전주만이 아니다· 중무전주, 그리고 이번 전쟁에 참여한 모두가 만년 역사에 남을 위업을 이뤄냈다· 모두 고생했고, 고맙구나·”
글렌은 고맙다고 말하며 진천검을 뽑았다· 그는 검을 거꾸로 세운 채 지그하르트의 검례를 취했다·
“가, 가주님!”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검사들은 글렌의 검례에 답을 하기 위해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주가 직접 고맙다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따라서 나는 이번 전쟁에 참여한 모든 검사들에게 금패와 지그하르트의 보고에서 원하는 보물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 그리고····”
글렌이 손가락을 들어 라온과 카룬을 가리켰다·
“누구보다도 힘든 전쟁을 치른 광풍전주와 중무전주에게는 보고의 보물 다섯 개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가하겠다·”
그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내렸다·
“우와아아아아아!”
“허! 지그하르트의 보고에 직접 들여보낸다고?”
“영약, 무구, 무학서, 아티팩트까지· 보고에는 없는 게 없잖아!”
“뭘 놀라! 흑탑을 무너뜨렸으면 저 정도 보상은 줘야지·”
“난 오히려 적다고 본다· 전주님들은 10개는 받아도 이상하지 않아·”
관중들은 업적에 걸맞은 보상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산하도록· 지금까지 고생했다·”
글렌은 정말 이것만을 위해서 모두를 소집한 듯 보상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단상을 내려왔다·
그는 잘했다는 듯 라온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연무장을 떠났다·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니까····’
라온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리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데니어와 눈을 마주쳤다·
“····”
데니어는 목적을 이루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길게 말아 올린 채 다른 이들처럼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서는 승리의 기쁨이 아닌, 감정이 결여된 듯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데니어 지그하르트·’
라온이 데니어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가늘게 입술을 씹었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 * *
“하아아····”
레크로스가 하얀 천장을 올려보며 땅이 꺼질 정도로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라온과 체임버는 흑탑을 무너뜨렸는데, 자신은 데루스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서 글렌에게 도움까지 받았다·
창피하고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지그하르트에 선물이라도 보내야겠군·”
라온이 흑탑주의 목을 베었고, 글렌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이번 전쟁의 주역은 지그하르트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으니, 지그하르트에 귀한 선물이라도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젠장! 첫 번째 검만 어떻게든 피했으면····”
레크로스가 데루스와의 전투를 떠올리며 이를 갈 때였다·
콰아아아앙!
병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마녀 모자를 쓴 체임버가 들어왔다·
“어이고! 집 지키다가 얻어맞은 꼬맹이가 여기 있었네· 꼴이 좋구만?”
체임버는 침상에 누워 있는 레크로스를 보며 빼꼼히 혀를 내밀었다·
“묵검존이라는 이명을 받았다고 애 취급하지 말라더니, 데루스한테 칼빵 맞고 누워 있는 거야?”
그녀는 위로를 해주려고 온 게 아니라, 놀리러 왔다는 듯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더럽게 쎘다고!”
레크로스가 고개만 들어 올린 채 주먹을 흔들었다·
“전에 봤을 때랑은 완전히 달라졌어! 글렌 님이랑 싸우는 줄 알았다고!”
그는 본인이 약한 게 아니라며 악을 질렀다· 묵검존이자, 오웬의 왕으로서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오랜만에 꼬맹이 레크로스의 모습이 나오네· 귀엽구만?”
체임버가 분하다는 듯 이를 가는 레크로스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 누나한테 다 말해보렴·”
그녀는 다 들어주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누나는 좀 그렇죠· 나이 차이가 있는데····”
레크로스는 누나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 자식아! 이 탱탱한 피부를 보라고!”
체임버가 나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며 레크로스의 이마를 후려쳤다·
“음····”
레크로스가 체임버에게 얻어맞은 이마를 만지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헌데 데리고 온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그가 체임버의 뒤에 숨은 렌시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제자야·”
체임버가 렌시아를 앞으로 내밀며 씩 웃었다·
“제, 제자요?”
“그래· 몬티로에서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의 원석을 만났거든· 기대하라고 차기 대마법사니까·”
그녀는 렌시아의 미래를 확신하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렌시아라고 해요·”
스스로를 렌시아라고 소개한 소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귀여워 보이지만, 훗날 대단한 미인이 될 것 같았다·
“음····”
레크로스가 렌시아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대마법사의 제자라·’
체임버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내린 적은 많지만, 직접 제자라고 선언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헌데 단순히 제자를 들이는 정도가 차기 대마법사라고 확언을 하다니, 무언가 그녀의 성격이 바뀐 것 같았다·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레크로스가 체임버를 보며 손을 내렸다·
“있을 수밖에 없지· 나도 죽을 뻔했으니까·”
체임버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상단전이 심각하게 찢어졌어· 한동안은 요양만 해야 할 정도로·”
그녀는 그 장소에 성녀 올가가 없었으면 정말 죽었을 거라며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널 팬 데루스도 그렇겠지만, 흑탑주도 정말 강하더라· 인간이라는 틀을 부수고 힘을 키우니, 당연한 일이겠지·”
체임버가 붉은 입술을 가늘게 씹었다·
“그래서 나도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서 미리 후계자를 키우려는 거야·”
그녀는 앞으로의 전쟁에서는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음····”
레크로스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렌시아를 바라보았다·
“어린 제자에게 죽음을 각오한다는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걱정 마· 이 녀석은 너보다 정신력이 강할 수도 있으니까·”
체임버는 산전수전을 모두 겪고, 죽음까지 느낀 아이라며 손을 저었다·
“확실히 눈빛이 다르군요·”
레크로스가 고개를 끄덕인 후 렌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레크로스라고 한다· 앞으로 볼 일이 많을 것 같구나·”
그는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어린 렌시아에게도 예의를 갖췄다·
“저, 저도 잘 부탁드려요! 폐하!”
렌시아는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레크로스의 손을 잡았다·
“저도 이번 일을 통해 느낀 게 많습니다·”
레크로스가 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눈매를 찌푸렸다·
“무인으로서의 삶을 조금 내려놓고, 왕으로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다시 검술에 미쳐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는 데루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며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복수라· 좋은 일이지· 다만 우리가 나설 기회는 없을 수도 있어·”
체임버가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뒷물결이 우리 생각보다 높고 빠르게 다가오더라고·”
“검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레크로스는 체임버가 말한 뒷물결이 라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랑 달리 앞에 아무것도 붙지 않은 검제! 검존이면 검존이지 묵검존이 뭐냐고! 없어 보이잖아!”
체임버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끄으응····”
레크로스는 본인의 이명이 모욕당한 것에 화가 난 듯 어깨를 떨었다·
“무, 묵검존은 제가 초월자가 된 직후에 얻은 이명이잖습니까! 지금 정하면 다른 이명이 될 거라구요!”
그는 아이로 돌아간 듯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체임버에게 따졌다·
“역시나 흥분하면 얼굴이 빨개지네·”
체임버가 피식 웃으며 레크로스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으음····”
레크로스 국왕은 체임버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장난은 장난이지만, 라온은 진짜야·”
“그 아이의 재능이 뛰어난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체임버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재밌는 걸 말해줄까? 라온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 중에도 명상을 하고 있더라? 그것도 전투에서 부족했던 점을 되새기며·”
그녀가 북쪽을 비추는 창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녀석은 검제 정도에서 멈추지 않을 거야· 분명히·”
* * *
“모두 왔군·”
글렌은 알현실에 모여 있는 광풍전의 검사들과 중무전의 검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긴말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지·”
글렌이 옥좌에 팔을 걸친 채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아아악!
그 시원한 소리가 알현실을 울리자, 광풍전과 중무전 검사들 앞으로 황금빛 차원의 문이 열렸다·
“따라오거라·”
글렌은 금빛으로 일렁이는 차원 속으로 들어가며 검사들에게 손짓했다·
“이, 이게 지그하르트의 보고····”
“눈으로 본 적은 있지만, 여길 직접 들어가게 될 줄이야·”
“후우, 떨림이 멈추질 않는군·”
중무전과 광풍전의 검사들은 지그하르트의 보고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 감동한 듯 손을 떨었다·
“들어가지·”
카룬은 보고에 들어가 본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금빛 차원 속으로 발을 옮겼다·
-무얼 하는 것이냐!
라스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대충 고르고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녀석은 배가 고파서 죽겠다며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배 터지게 챙겨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라온이 라스를 밀어내고 지그하르트의 보고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우우우웅!
금색 차원 앞으로 푸른 빛을 띤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성 <탐욕>이 개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