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램버스타 케이지 (7)
“노룰 매치?”
나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만 처음 듣는 이야기 같다·
다소 어리둥절한 나와 다르게 군터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한 무쇠 너클을 착용하고 있었다·
“표정이 이상하군· 우리의 경기가 노룰 매치로 치러진다는 걸 못 들은 거냐?”
“못 들었는데?”
“흠 너에겐 전파가 안 된 건가? 혹시라도 필요한 무기가 있다면 지금 가서 챙겨 와라! 그 정도는 친히 봐주도록 하지·”
굳이 그럴 필욘 없다·
그동안 쓸 일이 없어서 안 꺼냈다지만
지금 내 품엔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무구가 있으니·
나는 품에서 케이람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어째 마지못해 꺼내는 것 같다?]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솔직히 룰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저놈을 상대하는데 굳이 케이람을 쓰고 싶진 않았다·
베는 기분이 별로 좋을 것 같진 않거든·
“그거 아냐 시온? 난 이번 경기에서 네놈을 죽일 거다!”
농담 같지도 않은 말에 차마 웃음도 안 나왔다·
허나 놈의 얼굴을 보아하니 농담으로 던진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죽어야 끝나는 데스 매치는 아닌 걸로 아는데?”
“물론 아니지! 하지만 난 진심이다· 넌 정말 오래간만에 내 말랐던 투기를 끓어오르게 한 녀석이거든? 이 건 단순히 주먹을 부딪쳐서 해소될 갈증이 아니야!”
뭔 일이 생기려는 듯 녀석의 몸이 움찔움찔 일어나고 있었다·
“난 이곳 케이지에서 자라며 수많은 자들을 상대해왔다· 내 주먹을 맞고 턱이 돌아가거나 팔다리 불구가 된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너 역시 그리 될 수도 있고!”
어쩌라는 걸까?
“너 내가 왜 케이지에서 나갔는지 혹시 알고 있나?”
“사람을 죽여서?”
“맞아! 시간이 지날수록 강대해지는 내 투기를 끓지 못해 결국 경기 도중 상대를 죽이고 말았지·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야····”
내게 보여주려는 듯 그는 착용한 너클을 앞으로 내밀었다·
잘 보니 불그스름한 갈색빛이 웃돌고 있었다·
“난 말이지· 필요가 없어진 쓰레기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생각하거든· 내가 폐기물 장을 관리하는 이유도 그거야! 쓸모가 없어진 쓰레기는 폐기해서 없애 버려야 하니까!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을지도·
“잡설이 길어졌군! 아무튼 난 네놈을 최선을 다해 죽일 것이니 너 역시 최선을 다해 나를 상대해라! 알겠냐 시온?”
누가 보면 한없이 뜨거운 남자들의 승부를 보는 줄 알겠다·
그런데 최선이라····
사전적 정의를 논하자면 스스로가 가진 온 정성과 힘을 다한다는 건데·
지금 저 녀석은 내게 최선을 다하라며 일종의 강요를 하고 있단 말이지?
한번 따져보자·
지금 내가 저놈에게 최선을 보여야 할 형편인가?
아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아니다·
내가 이 상황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온 정성을 다한 최선이 아닌
놈의 같잖은 위치를 깨닫게 해줘야 할 자비다·
이쯤에서 나도 한마디 던져줘야 할 듯싶다·
“선택해·”
“음?”
“왼쪽? 아니면 오른쪽?”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어느 쪽 팔이 남아있으면 좋을지 묻고 있는 거야·”
그의 어깨가 심히 꿈틀거렸다·
“이해가 안 되는군· 난 지금 최선을 보이라 했지 같잖은 객기를 부리라 한 적 없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선택하기 싫으면 그냥 내가 알아서 하지·”
다소 실없던 녀석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너···정말로 죽고 싶은 거냐?”
여태 나를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뭐에 삐뚤어졌는진 모르겠다만 그의 눈에서 본격적으로 살기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애써 참고 있었지만 더는 힘들군· 네놈의 그 사람을 업신여기는 듯한 눈을 계속 보고 있자니 화가 끓어오른다· 경고하는데 그 눈깔 당장 치워라!”
물론 치우라 해서 치울 내가 아니다·
나는 아무런 반응 없이 동일한 시선을 유지했다·
“정정하도록 하지· 네놈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도록 하겠다· 살려달라는 말이 아닌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오도록 삶의 미련이 없게 해주지!”
이번엔 웃음이 나왔다·
내가 과거에 즐겨했던 말이랑 비슷했거든·
저 말을 고작 이런 놈한테 듣고 앉아 있으니 차마 안 웃을 수가 없네·
-부우우
그 순간 호각 소리가 울리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탓
시작과 동시에 녀석이 곧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이와 동시의 그의 양손에서 갈색빛의 마나가 발현되었다·
“페트리피케이션!”
-쩌저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양손이 점차 돌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단단한 건틀릿을 착용한 듯 꽤나 무시 못 할 위압감이 풍겨왔다·
땅 속성 석화 마법을 자신에게 시전함으로써 신체 일부를 강화시키는 마법(Petrification)·
마력에 따라선 어떤 칼이나 무기로도 쉬이 베어낼 수 없는 방어에 최적화된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공격으로 전환할 수도 있지만·
-휘익
5보 거리·
사정거리에 들어왔다고 판단했는지 녀석이 주먹을 크게 내뺐다·
동선은 정확히 내 안면을 향해 있었다·
이에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별거 없었다·
그저 놈이 주먹을 내지르기까지 온전히 기다릴 뿐·
4보 3보 2보·
0초와 1초의 그 중간 사이·
마침내 녀석의 주먹이 내 얼굴과 맞닿으려는 그 순간·
-스윽
한 발짝 내빼어 몸을 피한 뒤
-쐐액
손에 들고 있던 케이람을 수직으로 올려 베었다·
-서걱
자연스레 올라간 내 시야에 공중으로 치솟은 회색빛의 무언가가 보였다·
한쪽에선 붉은 액체가 뿜어지듯 퍼져나갔고 받아줄 사람도 없이 무심하게 낙하한 그 순간·
“아아아아악!”
거센 비명소리가 장내에 아찔하게 울려 퍼졌다·
* * *
찬물이 끼얹은 듯 숙연해진 투기장·
관중들은 눈앞의 광경을 두고 경악을 넘어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쪽 팔이 잘려 나간 군터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반면
소년은 그 모습을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 저것이 사람이 보일만 한 모습이란 말인가
의문을 넘어 이제는 낯선 공포심까지 피어오르는 와중
소년의 얼굴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중들에게 향했다·
“···!”
숨이 막히고 손발이 파르르 떨리는 등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관중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직접 경험한 적은 없지만 추악한 악마를 마주한 것과 동일한 기분·
일부는 도망치듯 케이지를 떠나기도 했다·
“뭐 뭐야?!”
허나 그중에서도 유독 소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이가 있었다·
투기장의 최상급 좌석인 귀빈석에 앉아있는 진한 콧수염의 남성 모리스 게릭·
램버스타 북쪽 회색 상인회의 장을 맡고 있는 도시의 지배인 중 한 명이었다·
화려한 금빛 쌍안경 속 번뜩인 시야에 담긴 것은 소년의 얼굴이 아닌 그가 들고 있는 자줏빛의 단검이었다·
“미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저건 틀림없는···!”
모리스는 알 수 있었다·
소년이 들고 있는 무구가 결코 평범한 단검이 아니라는 것을·
수십 년의 상업 활동을 통해 다져진 안목이기에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날 선 도신에서 새어 나오는 스산한 기운·
뚝뚝 떨어지는 핏물 사이를 감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연기·
악마의 눈을 빼다 박은 듯 광기가 느껴지는 흑색의 보석까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 소년이 가진 검은 필시····
“마검이다!”
* * *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꽤 오랫동안 지켜봤다·
연격을 가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이대로 끝나기를 바랐을 뿐·
이내 한참을 눈치 보던 사회자가 나타나 내게 경기를 끝낼 거냐 물었고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 결과 대련은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나로선 지극히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고 고생하셨습니다 시온님!”
대기실로 들어오니 어제까지 담배나 팔던 꼬마가 내게 음료를 건네주었다·
“일 시작한 거야?”
“네! 리사 매니저님께서 일단은 투기장 시설 보조로 일하게 해주셨어요!”
시설 보조라·
마냥 나쁜 직종은 아닌 것 같다·
사실상 이 뭘 하든 간에 밖에서 담배를 파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니·
근데 매니저라고?
그렇담 나름 오너의 직속 수하였다는 건데 그런 감투도 있는 여자가 대체 왜 로비에서 일개 종업원 일을····
“소 손니이이임!!”
이건 뭐 호랑이를 부르기도 전에 나타나는군·
숨을 헉헉댈 정도로 다급히 달려온 걸 보니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차 착오에요! 착오! 뭔가 보고 상의 실수가 있었나 봐요! 제가 모르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데····”
“알아듣게 설명해줬음 좋겠는데?”
“이번 경기가 노룰 매치로 펼쳐진다는 거 말이에요! 혹시 알고 계셨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렇죠? 죄송해요! 이건 저희 측에 완벽한 실수에요! 이런 중요한 사항을 사전에 공지도 안 해드리다니 정말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습니다! 그리 생각 하시는 게 당연한····”
“아니 너 말이야· 몰랐던 거야 어쩔 수 없다치지만 나한테 바로 달려 올 필요는 없었다고 보는데? 되려 그 팔 잘린 녀석에게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난 다친데 하나 없이 멀쩡하니 말이다·
오히려 수습을 하고 싶다면 그 폐기물 장의 주인에게 달려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온님은 저희의 엄연한 손님이세요! 저는 그런 손님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매니저구요! 손님께서 예상치 못한 일로 불이익을 당하셨는데 매니저인 제가 책임지고 달려와서 사죄를 드리는 건 당연한 도리죠!”
흠·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규율이나 도리 따윈 개나 줘버린 이곳에 저런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진 분이 있었다니·
불현듯 시설 내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가 대폭 상승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대화중에 죄송합니다만····”
대뜸 한쪽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딱 봐도 물건 좀 꽤나 사기 칠 것 같은 장사꾼 관상이었다·
초면인 나와 달리 이곳의 매니저님께선 꽤 경악스런 반응을 보이었다·
“모 모리스?”
“···!”
덩달아 잠자코 있던 꼬맹이 또한 내 다리 뒤로 바싹 숨어버렸다·
“사전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앞에 계신 분을 꼭 뵙고 싶었거든요·”
어째 이곳에선 나를 찾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이 많은 것 같군·
나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나를 말인가?”
“예! 전 모리스 게릭이라고 합니다· 회색 상인회라고 하는 작은 상단의 회장직을 맡고 있죠·”
회색 상인회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내 눈은 자연스레 꼬맹이에게 향했다·
손에서 떨림이 전해지는 거로 보아 눈앞의 남성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관중석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귀티가 나시는군요· 마치 귀족의 자제분 같으십니다·”
그래도 상인이란 꼬리표가 허투루 달리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별다른 내색 없이 덤덤한 시선을 유지했다·
“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요? 리사 매니저?”
“네? 하 하지만···!”
“시온님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호위병은 일체 없이 저 혼자서 온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실제로 이 주위에 그를 제외한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10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탐탁지 않은 표정과 함께 그녀는 꼬맹이를 데리고 대기실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방에 우두커니 남겨진 두 명의 남성·
나로선 별로 달가울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반면 모리스란 이름의 남성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과 함께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분명 나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싶다고 했다·
상인이 거래를 제안한다는 건 즉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사거나 팔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허나 현재의 나로선 살만한 물건도 그렇다고 팔만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돌릴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그의 눈빛은 뭔가 속을 알 수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뭘 말이지?”
“가지고 계신 마검··· 저한테 파시지요·”
“···!”
[하?]
케이람의 어이없어 하는 탄식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