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램버스타 케이지 (8)
안일했다·
비기를 쓴 적도 없고 하다못해 마나를 주입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이 봤을 땐 좀 어두침침한 검으로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자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에게 마검을 팔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당연히 시치미를 떼며 답했다·
“애써 둘러대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도시에서 당신의 검이 마검이라는 걸 아는 자는 저희 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확실히 사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걸 떠벌리고 다니진 않겠지·
문제는 케이람이 어떻게 마검인지를 알아차렸냐는 거다·
나는 한쪽 손을 자연스레 뒤로 감췄다·
-우우웅
여차하면 ‘그림자의 인격’을 써서 모든 걸 불게 만든 뒤 죽여 버리면 된다·
“하하! 절 매우 경계하시고 있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일단 제가 왜 당신의 검이 마검이라 확신했는지 말씀드려야겠군요·”
-팟
피어오르던 마력을 한순간에 꺼트렸다·
본인 입으로 얘기하겠다면 굳이 쓸 이유는 없겠지·
“일단 들어는 보지·”
모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전 본래 알바스 상인회라고 하는 거대 상단에서 일해 왔었습니다· 2년 전 그 상단의 수장인 지커만 알바스님이 의문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한 후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개인 상인회를 차렸습죠· 그 후엔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아 나름 지배인이라 불릴 정도로 세력을 키웠습니다·”
지커만 알바스·
나로선 낯익은 이름이었다·
아직 알에서 잠자고 있던 나나를 팔아넘기려 했던 남자·
설마하니 그 밑에 있었던 상인일 줄은 몰랐다·
공교롭게도 그는 자신의 전 수장을 죽였던 범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평소 검을 비롯한 무구에 관심이 많아 그쪽 방면으로 활동을 지속해왔습니다· 그로 인해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검들은 모두 봐왔죠· 과장 좀 보태자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명검들은 전부 봐왔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 저도 보지 못한 검이 두 자루 딱 두 자루 있습니다· 바로 성검과 마검이죠· 인간이 아닌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무구들· 비록 실존 자체가 불분명하긴 했지만 전 그 검들이 이 땅에 반드시 존재할 거라 믿으며 이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해 왔습니다·”
그의 어조엔 꽤나 당당한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그런 중에 바로 오늘! 전 보고야 만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미지의 안개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마침내 세상 밖에 나타난 마검의 화려한 자태를 말이죠! 제 눈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니까요!”
굳이 평가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모리스라는 남자 아마 단언컨대 마검이 가장 좋아할 인간상이지 않을까 싶다·
먹어 치우기 딱 좋을 만큼 제대로 미쳐있거든·
“설사! 마검인지를 모르셨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검을 제게 파시지요! 값은 불러 드리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혹여 다른 검을 원하신다면 최상급 명검을 몇 자루라도 갖다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시죠! 마검을 주실 수만 있다면 뭐든 드릴 수 있습니다!”
-스스스
품에서 피어오른 검은 안개가 내 몸을 감싸 안듯 휘감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다·
내가 아닌 이 대화의 당사자가 자신을 실체화하기 위한 전조 현상인····
[오랜만이네? 하찮은 인간이 날 알아본 건?]
뭔가 대처할 여지도 없이 실체화에 성공한 케이람이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나타났다·
“호오오····”
모리스는 경의에 찬 얼굴로 케이람을 우러러보았다·
“역시! 신의 무구는 영혼을 가지고 있단 말이 사실이었군요! 이 모리스 감히 경이로운 마검님의 존안을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이젠 아예 날 대놓고 곤란하게 만들 작정인가?
“뭐하는 짓이지?”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암만 그래도 날 빼고 내 얘기를 하는 건 못 참을 것 같거든·]
그나마 주위에 다른 이들이 없어서 다행이라지만
이거 자칫하면 매우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좋아· 그럼 하나 물어볼게· 일단 네 몸뚱이를 보아하니 휘황찬란하게 날아다닐 만큼 날 제대로 다룰 수 있진 않아 보이는데 넌 날 가져서 뭘 하고 싶은 거니?]
뭐 나도 궁금하긴 했다·
저 공만 한 몸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닐 수도 없을 것 같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딱히 딴 데다 팔 것 같지도 않은데·
저자는 자신이 쓰지도 못할 마검을 갖다가 대체 뭘 할 생각일까?
“맞습니다· 전 검을 다루는 무인이 아닌 만큼 마검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순 없을 겁니다· 허나 반대로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제가 마검님을 다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
그녀와 나는 거의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제가 아닌 마검님께서 절 다뤄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 모든 것을 가져가시면 됩니다· 제가 가진 돈 권력 심지어 몸까지도 말이죠! 마검님은 그저 제게 작은 은총만 허락해주시면 됩니다!”
[은총이라?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거지?]
케이람의 의문에 모리스는 환희에 찬 미소로 답했다·
“별거 없습니다! 결국 당신도 신이지 않습니까? 고귀한 신으로서! 그저 인간이란 미물을 귀엽게 쓰다듬어 주신다면···!”
-콱!
“케켁!”
연신 신나게 떠들던 그의 목이 한순간에 잡혀 들어 올려졌다·
케이람이 잡았냐고?
아니 내가 잡았다·
대충 저 자식이 뭔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는지 알 것 같거든·
[···?]
케이람은 이런 내 모습에 꽤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것 중 하나가 뭔 줄 아는가?
환희에 찬 얼굴로 같잖은 말을 지껄이는 거다·
마치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아오면 저런 말도 안 돼는 가치관이 성립되는 걸까?
하다하다 뭐? 마검에게 은총?
대체 나를 뭐로 보고 그녀를 뭐로 봤기에 저런 말이 나오는 거지?
정말 인생을 다시 살게 해주고 싶을 만큼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사 살려 주어····”
녀석은 고통에 겨운 나머지 아등바등 발버둥을 쳤지만 내 손아귀는 좀처럼 힘이 풀리지 않았다·
“무 무슨 일입니까?”
소란을 감지했는지 복도에서 가드들이 몰려들었다·
케이람은 자연스레 모습을 감추었고 녀석의 숨이 거의 넘어갈때 쯤 목을 놔주었다·
“헉헉···!”
“모 모리스님!”
호위병으로 보이는 자들까지 달려와 그를 부축하였다·
일부는 나를 경계한 나머지 칼을 뽑으며 대응하려 하자
“됐다! 모두 칼을 거둬···!”
간신히 정신을 되찾은 모리스가 호위병들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그의 혐오스런 미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소유주님께서 조금 흥분하신 모양입니다· 그분을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군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제 제안을 잘 생각해주시길····”
근 1초 사이 엄청난 고민을 한 것 같다·
저 가증스런 쓰레기의 목을 지금 당장 떼어 버릴지 말지·
결국 그리 쉽게 죽일 바에야 안 죽이는 게 낫다는 결론이 녀석의 생을 조금 더 연장시켰다·
모리스는 도망치듯 케이지를 벗어났다·
* * *
-끼익
다급하게 열린 철문과 급박한 얼굴의 리사·
방에는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구나· 리사?”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여인과 달리 리사의 표정은 뭔가 불안해 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왜 너도 모르는 사이에 경기의 룰이 바뀌었는지 그게 궁금한 거겠지?”
“···네 맞습니다·”
리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혹 린제님께서 직접 룰을 바꾸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이유라는 말에 여인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글쎄 지금 같은 경우엔 이유를 논하는 것보단 그 이유로 인해 얻은 확신을 얘기하는 것이 나을 듯싶구나·”
그녀는 말은 다소 아리송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궁금하지 않았니? 그 악명 높은 군터가 주먹 한 번 못 쓰고 팔 한 짝을 잃었어· 대체 그 소년은 어디서 온 누구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걸까?”
시온은 누가 봐도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고작 열세 살 남짓한 소년이 자신의 세 배 이상은 될 법한 장정들을 한 주먹에 때려눕히는 것도 모자라 일반인으로선 상상도 못 할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중요한 건 지금껏 보여준 모습들이 절대로 다가 아니라는 것·
이쯤 되면 굳이 그녀가 아니라도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될 법한 의문이었다·
“린제님께선 그에 대한 답을 찾으신 겁니까?”
리사는 또렷한 두 눈으로 그녀를 직시하며 물었다·
“역으로 한 번 물어보마· 리사 넌 그 소년의 얼굴을 혹시 기억할 수 있겠니?”
“얼굴 말입니까?”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일주일 전부터 매일 봐왔던 얼굴이 아닌가?
심지어 방금 전까지 보고 온 터였다·
기억의 장애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리사의 얼굴은 머지않아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 머리부터 눈 코 입 목소리와 말투까지 또렷하게 기억했지만 정작 얼굴 전체에 대한 이미지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암무(暗霧)라는 이름의 비기다·”
리사로선 처음 듣는 기술 명이었다·
“쉽게 말해 어떤 특정한 힘을 이용해 자신의 얼굴을 타인이 기억하지 못하도록 술수를 걸어 논 거지· 해서 분명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오르지 않는 거란다·”
“그 그런 기술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그건 미스트라고 하는 이 땅에서 허락된 존재들만 쓸 수 있는 기술이니까····”
순간 리사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지금··· 미스트라고 하셨습니까?”
* * *
“아아아악!”
-쾅쾅쾅
한 남성의 절규와 정체불명의 굉음이 뒤섞인 폐기장·
구역원들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어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엔 언제 불똥이 튈지 몰라 조마조마한 심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콰직! 퍽! 푸욱!
이번엔 굉음이 아닌 굉장히 낯선 소리가 울렸다·
듣는 이로 하여금 몸의 소름이 돋게 할 만큼 굉장히 살벌한 소리였다·
실제로 이를 지켜보던 구역원들은 그 광경에 공포심을 느낀 나머지 시선을 전부 회피하고 있었다·
“하아아····”
드디어 화가 좀 가라앉았을까 싶은 순간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 군터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오른팔을 보고선 다시금 포효를 내질렀다·
“시이이오오온!”
이전의 실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군터·
지금 그에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패배라는 엄청난 굴욕감으로 인해 극심한 분노로 가득 찬 상태였다·
“지 진정하세요 군터님! 잘못하시면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닥쳐!”
구역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죽여야 해! 그놈을 죽여야 한다고! 그러지 않고서는 내가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허나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덤벼들든 상관없이 시온을 이기는 건 철저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욱신거리는 팔의 상처는 마치 경고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
문득 그의 눈앞으로 구겨진 담뱃갑이 보였다·
그걸 본 순간 군터는 자연스레 구역 골목에서 시온과 마주쳤던 일이 생각났다·
구역원들로부터 괴롭힘을 받던 담배 팔이 꼬마와 그를 구해준 시온·
그 꼬마는 지금 램버스타 케이지에 살며 잡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 받았다·
이내 군터는 뭔가 한 가지 계책이 생각 난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뭔 수를 쓰든 그냥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네놈은 죽고 그 앞에 있는 내가 살아있다면 그거 자체가 최고의 승리인 거라고!”
그는 잘려 나간 팔을 문지르며 광기의 웃음을 남발했다·
바닥은 어느샌가 시뻘건 핏물로 흥건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