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연결고리 (3)
“음?”
안개가 자욱한 밤하늘·
흑야의 창공을 비행하던 은발의 남성이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루키온 님?”
이에 나란히 따라오던 적발의 여성이 물었다·
“역한 냄새가 나는군·”
그는 급기야 비행을 멈추고 발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 온 거지?”
“조금 떨어진 위치긴 해도 로열 아카데미가 자리한 루웬 근교쯤 온 것 같습니다·”
“로열 아카데미라····”
남성은 턱을 어루만지며 평야를 향한 정제된 시선을 유지했다·
“뭔가 안 좋은 기운이라도 느끼셨는지요?”
“안 좋은 기운? 글쎄 이건 사실 안 좋은 기운이라고 할 수도 없지·”
작게 실소한 남성의 얼굴에선 왠지 모를 불쾌함이 엿보였다·
기억 속 저편 어딘가에 자리한 낯선 기운 그러면서도 굉장히 거슬린 기운이었다·
“마주하는 것조차 화를 참을 수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드래곤으로서 허용할 수 없는 기운이다·”
차마 저 기운을 두고 이 자리를 떠나선 안 될 것 같은 그런 감정이 남성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환을 잠시 미뤄야겠군·”
활짝 핀 은색의 날개에서 광채의 신기가 발산되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아름답게 밝히는 그 기운과는 다르게 남성의 눈엔 알 수 없는 살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 * *
“파파!”
드넓은 평야 위에 우뚝 선 나나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 진짜 넓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거지? 나나 완전 신나!”
나나는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푸려는 듯 날개를 펼치며 이리저리 사방을 날아다녔다·
“자 잠깐 나나 그쪽은 위험해!”
그 뒤를 브라이언이 쫄래쫄래 쫓으며 뒤따르고 있었다·
잘들 노는군·
루웬으로부터 족히 10km는 떨어진 한적한 평야 지대·
나나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주자는 브라이언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밤중 둘을 데리고 이곳까지 왔다·
루웬이 위치한 곳은 어디까지나 삼국의 경계가 맞닿은 접경지였기에
도시 주변은 수백 년간 교전이 반복되었던 격전지의 일부였었다·
즉 그만큼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땅이란 뜻·
이곳이라면 나나가 암만 뛰고 날고 심지어 드래곤화까지 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주 자비로운 아버지 납셨네?]
실체화한 케이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풀 바닥에 누워 한쪽 손에 머리를 기댄 아주 편안한 자세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쯤 되니 아버지란 말도 딱히 부정은 못 할 것 같다·
[왜? 이참에 쟤한테 엄마도 하나 만들어 주지? 그 어린 황녀님이 딱이겠네? 아마 걔라면 좋다고 할 것 같은데?]
“끔찍한 소리 하는군····”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애써 부정하기는· 너 듣자 하니 지금 사는 방도 이 나라 황제가 준 거라며?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진 않지? 조만간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았다고 보는데?]
할 말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딱히 대꾸하고픈 생각은 안 들었기에
그 질문에 대해선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외마디 웃음을 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전생을 살면서 또 느낀 게 뭔 줄 아냐 케이람?”
[왜 또 고해성사 하려고?]
케이람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 팔자는 암만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해봐야 그러지 못한다는 거야· 지금의 이 평화로운 시간도 그저 잠깐의 휴식에 불과하다는 거지· 장담하는데 이거 얼마 못 갈 걸?”
[그럼! 당연히 얼마 못 가지· 너 설마 나 같은 마검을 두고서 평화롭게 살 생각 한 거 아니지? 내 뽀얀 피부를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피 맛을 보여줘야지! 안 그러면 내가 널···!]
-기이잉
“···!”
순간 하늘에서 백색 광채의 마나가 번쩍하고 빛을 내었다·
이후 지상으로 낙하해 주변을 잠식하더니 마치 일정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주위를 봉쇄하고 있었다·
“이거 봐 오래 못 간다니까?”
-퉁
“아야!”
사방을 뛰놀던 나나가 무언가에 부딪혀 뒤로 자빠졌다·
“괘 괜찮니 나나야?”
이에 브라이언이 황급히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멍해진 얼굴의 나나는 그저 자신의 앞에 자리한 무색의 벽을 신기하다는 듯이 매만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제한 결계다·
그것도 아주 엄청난 마력을 가진·
굳이 평가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건 지나가는 어느 견습 마법사들이 가질 만한 마력이 아니었다·
못해도 쿤델 총장 같은 대마법사급의 마력·
게다가 결계사이에서 전해지는 이 괴기스런 기운은···
절대 인간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후우웅
사방을 감싼 무색의 벽 아래로 알 수 없는 붉은빛이 아른거렸다·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막은 것과 더불어 벽 안에 있는 우리 또한 벗어날 수 없도록 차단한 일종의 경계선이었다·
“브라이언 나나 데리고 이쪽으로 와·”
“예!”
브라이언은 황급히 나나를 안고선 내 쪽으로 달려왔다·
-쿠구궁
뭐 대단한 존재가 나온답시고 검은 하늘에 천둥이 몰아친다·
-스윽
이에 두려움을 느낀 것인지 슬며시 다가온 나나가 내 한쪽 다리를 감싸 안았다·
“····”
떨고 있다·
천둥소리 따위에 떠는 것이 아니다·
저 지랄맞은 천둥 속에 있는 어떤 머저리들의 역한 기운을 느끼고선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나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이윽고 제한 결계 중앙으로 진동과 함께 번개가 내려쳤다·
하얀 연기가 솟아남과 더불어 그 속에서 느껴지는 낯설지 않은 기운·
신의 피를 이어받은 계승의 종족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기운 이른바 신기·
나로선 딱히 좋은 생각이 들지 않는 어느 머저리들이 가질 만한 기운이었다·
“역하군·”
연기 속의 존재는 초면부터 굉장히 거슬리는 말을 내뱉었다·
2m가 넘는 장신의 남성·
반짝이는 은색의 장발과 이마 정중앙에 솟아오른 하나의 뿔·
등 뒤엔 다량의 신기를 발산하는 거대한 날개가 서서히 몸 안쪽으로 접히고 있었다·
드래곤이다·
나나 같은 반인반수가 아닌 순수 혈통의 드래곤·
레메아 협곡에서 마주쳤던 성장기 데빌 드래곤과는 차원이 다른 수백 년 이상 살아온 완전체 드래곤이었다·
그의 뒤론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적발의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드래곤이었다·
은발의 드래곤은 내 다리 뒤에 숨은 나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였군· 역한 냄새의 정체가····”
저거?
순간적으로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내면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용인(龍人)이로군요· 드래곤과 인간 사이에서 나온 혼혈···· 어찌 이 세상에 저런 추악한 존재가 있는 지····”
그 뒤에 있는 년은 한 술 더 떠 나나를 대놓고 추악한 존재라 지칭했다·
사람이 하도 어이가 없으면 머리의 사고가 잠시 정지하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딱 그 상태·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찰 노릇이었다·
“네 놈이 저 반쪽짜리의 주인인 것이냐? 인간?”
같잖은 물음에 굳이 답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말없이 그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 눈빛에 불쾌감을 느낀 것인지 적발의 드래곤이 쌍심지를 추어올리며 말했다·
“하등한 인간 주제에 감히 누구를 노려보는 것이냐!”
이에 은발의 드래곤이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만류했다·
“반쪽짜리도 반쪽짜리지만 네놈의 기운도 심상치 않구나· 인간····”
그의 시선은 나를 지나 옆에 있는 케이람에게로 향했다·
“그렇군· 역한 냄새 속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나 싶더니만 다름 아닌 마검이 자리하고 있었군·”
이에 케이람의 입에서 기분 좋은 탄음이 새어나왔다·
[어머? 내 인기도 아직 안 죽었나 보네? 아직 알아보는 놈들도 있고 어떻게 사인이라도 해줄까?]
“농담은 집어치워라· 신의 힘을 보유하고선 같잖은 인간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주제에 나와 맞먹으려 드는군· 아님 아직 잠에서 덜 깨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가?”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너 뒈지고 싶니?]
“····”
[어디서 되도 않는 것들이 간만에 뚜껑 열리게 하네? 그 혓바닥 뽑아다가 네 입 구멍 틀어막아줄까?]
“지금 누구 앞이라고 그런 망언을 하느냐!”
우렁찬 포효와 함께 거센 강풍이 몰려들었다·
나는 아랑곳 않은 채 계속해서 놈들의 면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줄곧 말이 없군 인간· 하긴 네놈들로선 고귀한 존재를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겠지· 순간적으로 벙어리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되지도 않는 말에 이제는 웃음조차 안 나왔다·
“허나 안심해라 인간· 네놈들 같은 하등한 존재들에겐 손끝 하나 건들 생각 없다· 다만 그 반쪽짜리는 내게 넘길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
“추악한 존재긴 해도 어쨌건 용과 인간의 피가 뒤섞인 반인반수···· 한번 연구해볼 가치는 충분하겠지· 그년만 넘긴다면 네놈들의 목숨은 내 친히 살려주도록 하겠····”
“아가리 싸물어·”
싸늘한 정적이 퍼짐과 동시에 분위기가 격하게 요동쳤다·
내 눈은 여전히 은발의 멀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아가리 싸물라고· 그 큰 귀는 싸닫고 다니냐? 그 벌렁대는 아가리 찢기기 싫으면 조용히 싸물어 새끼야·”
하도 어이가 없으면 사고가 정지하는 건 드래곤들도 마찬가지·
적발의 드래곤은 급기야 할 말을 잃은 듯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실성한 듯한 광기의 울음소리가 결계 속에서 퍼져나갔다·
나를 향한 녀석의 시선에서 다시금 거센 살기가 발산되었다·
“이래서 하등한 미물들은 안 된다는 거지· 주어진 상황도 판단 못 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꼴이라니····”
손을 뻗은 녀석의 오른손에서 다량의 마나가 응집되었다·
“일단 그 가증스런 눈깔부터 뽑아주도록 하겠다····”
-콱!
쫙 편 한손을 강하게 움켜쥐니 응집된 마나가 퍼지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허나 변하는 건 없었다·
내 눈은 여전히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나를 비롯한 내 주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내 발밑을 중심으로 검은 색의 둥근 오라만이 생성되었을 뿐·
“제한 결계?”
은발 멀대의 미간이 골짜기마냥 찌푸려졌다·
“지금 내 결계 속에서 또 다른 결계를 펼친 것이냐?”
그딴 물음에 친절히 답해줄 만큼 난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왜냐면
아까는 그저 떠는 것에 그쳤던 우리 꼬맹이가
이제는 울기 직전의 아주 울상인 얼굴로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이다·
“····”
저런 얼굴 난 많이 봐 왔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내가 죽였던 모든 인간들은 항상 마지막에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된 얼굴을 보여 왔었다·
근데 지금 이 꼬맹이도 그것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아닌 저 같잖은 존재들로 인해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예 도련님···!”
“나나 눈 가리고 뒤로 빠져있어· 그러곤 절대 내 앞으로 넘어오지 마·
“도련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브라이언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나나를 감싸주었다·
나나는 얌전히 브라이언의 손길을 받아들였으며 내 몸을 떠나는 그 직전의 순간까지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네놈 정체가 뭐냐? 아무리 마검을 소유하고 있다 한들 어찌 천한 인간 따위가 내 결계에서 이런 힘을····”
나는 은발 멀대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화라는 이름의 짧은 휴식 시간·
그 잠깐의 시간동안 잠들어 있던 내면의 기운을 뿜기 위해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조용히 읊조렸다·
“암무 9식: 마검 발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