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연결고리 (4)
마검과 융합한 시안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검은 안개 그 자체·
태초의 자연이 아닌 그가 창조한 듯한 인위적인 자연의 모습·
보는 것만으로 여러 감정을 샘솟게 하는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루 루키온 님? 저 힘은 분명···?”
“신계에서 쫓겨 난 추방자의 힘이로군·”
루키온 카로니스 아론 제 모아리안 샤롤르트·
타생물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혈통의 실버 드래곤·
그가 굉장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안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네놈도 어느 정도 믿고 있는 게 있으니 그 가증스런 이빨을 드러낸 거겠지····”
시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만든 제한 결계에서 당당히 걸어 나올 뿐·
날카롭게 벼려진 눈에는 오로지 살기만이 담겨 있었다·
“허나 아무리 단단한 그릇이라 해도 넘치는 강물을 담을 수는 없는 법· 설사 신의 무구를 지니고 있다 해도 나약한 인간의 몸으론 다루는데 한계가 있지· 누차 말하듯 너희 같은 미개한 종족들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루키온은 야릇한 미소와 함께 손에서 발현시킨 마나를 하나로 결집시켰다·
-파지직
이에 전기가 부딪히듯 강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결집된 마나는 점차 형태를 갖추더니 이내 기다란 창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내 광창(光槍)을 보게 된 것을 영광이라 생각해야 할 거다 인간· 어디 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발악해 보거라· 혹여 내 마음에 든다면 너 또한 저 반쪽짜리와 같이 내 연구 대상으로····”
“쫑알쫑알 말 더럽게 많네···!”
차마 대처할 여지도 없을 만큼의 속도·
검은 안개의 시안은 눈 깜짝한 찰나의 순간 루키온의 앞으로 다가와 급속의 일격을 가했다·
-챙!
정말 머리가 아닌 본능이 막았다고 할 정도·
창을 들어 올려 간신히 검을 막아낸 루키온의 얼굴에선 방금 전과 같은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 무슨 움직임이 이리···!”
-스릉
자줏빛의 도신이 창 자루에 미끄러져 내려간 그 순간
시안의 몸이 역동적으로 회전하면서 방금 전 일격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빠른 연격이 휘몰아쳤다·
-챙! 챙! 챙! 챙!
반격은커녕 루키온은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저 음침한 검이 고귀한 자신의 신체에 파고들 것만 같기에
이를 원치 않는 루키온으로선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했다·
“하등한 인간 주제에 감히···!”
분노한 루키온의 몸에서 신기가 발현되자 시안의 머리위로 번개와 함께 푸른 마법진이 그려졌다·
-콰지직
이에 시안은 검을 물리고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 자리엔 백색의 번개가 휘몰아쳤고 지표면이 검게 그을렸다·
“크으윽····”
잠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한 루키온이 다시금 시안을 응시한 순간
“···!”
0초와 1초 사이·
숨을 들였다 내쉬기도 힘든 짧은 시간·
피보다 진한 붉은 빛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또다시 코앞의 거리에서 루키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루키온은 생각했다·
이건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공격이라고····
“루키온 님!!”
-깡!
자줏빛의 마검과 맞닿은 투명한 무색의 배리어·
신기와 마력을 결집시킨 보호막으로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선 무슨 짓을 하더라도 뚫어낼 수 없는 드래곤 고유의 방어수단이었다·
“카 카델리나···!”
“물러나셔서 태세를 정비하시지요! 이 하찮은 인간은 제가 막겠습니다!”
일격을 막아낸 적발의 드래곤은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고귀한 종족의 힘을 방출하였다·
“하압!”
-텅!
그녀의 손으로부터 응집된 신기가 배리어를 통해 퍼져나가니 파동을 견디지 못한 시안의 몸이 그대로 튕겨져 버렸다·
“물러서라 카델리나! 네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키온 님! 저런 미천한 인간의 힘으론 제 보호막을···!”
순간 그녀는 보았다·
루키온이 생성한 번개로 인해 섬광이 아른거리고 있는 빛의 공간 속·
드래곤의 광활한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칠흑의 검은 안개를····
그 무지의 안개 속에서 혈기의 적안(赤眼)을 마주친 순간 헤어 나올 수 없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온 몸을 잠식했다·
배리어를 쥐고 있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시안은 그녀를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무검(舞劍): 흩날리는 8개의 꽃잎···!”
검식과 함께 공중에 떠오른 마검이 곡예를 하듯 춤을 췄다·
지고한 드래곤의 감각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
도합 8번의 검선이 그려지기까지 그녀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검선이 배리어를 뚫고 본인의 신체로 파고들기 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콰지지직
“키야아악···!”
8조각으로 분리된 카델리나의 몸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위로 진한 혈우가 쏟아졌으며 검은 안개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루키온은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격하게 요동치는 심장과 급박해지는 혈류·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두려움·
신의 피를 이어받은 지상 최고의 종족이 고작 하찮은 인간을 상대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 대체 네놈은···?”
루키온의 말엔 더 이상 거만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로지 의문·
도대체 눈앞의 존재는 무엇이길래 이런 괴기스런 힘을 보여주는 건지 그것이 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창을 부여잡은 양손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 * *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찢겨나간 적발의 드래곤·
이름이 카델리나나 했던가?
다음에 태어날 땐 초면에 추악하다니 뭐니 그런 같잖은 언행을 하지 않길 바란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본래 노리고 있던 표적에게 향했다·
“···!”
의심 부정 경계 그리고 그 감정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두려움·
지상 최고의 종족께서 고작 인간 하나를 두려워하고 계시니 이 얼마나 재밌는 광경인가?
-주르륵
뺨에서 한줄기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마 조금 전 녀석이 내리친 번개에 살짝 스친 듯 했다·
“이 냄새··· 그렇군· 네놈 레메아 협곡에 사는 마수의 피를 마셨구나!”
개도 저리 가라 할 법한 후각이로군·
나는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만으론 설명이 안 된다! 제 아무리 마수의 피를 마시고 신의 무구를 지녔다지만 다른 신도 아니고 검은 안개의 신이지 않느냐! 아무런 권위도 없는 추방된 신이 이정도의 힘을 보여줄 순 없단 말이다! 말해라 대체 네놈은 정체가 무엇이냐!”
[쟤 입부터 좀 닥치게 하면 안 되냐?]
듣다 못한 케이람이 한소리를 내뱉었다·
그 점에 대해선 나도 동감하는 부분·
지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닥치면 항상 설명하라며 성난 황소마냥 애를 쓰며 달려들지·
정말 품위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종족들이다·
암만 생각해도 인간에게 하등하다며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어 보인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케이람을 돌려 잡고선 은발 멀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뭐든 직접 겪고 당해봐야 아는 법이라 했다·
그건 인간이 아닌 드래곤에게도 마찬가지·
조금 전 나를 향해있던 오만함과 조롱 이로 인해 이어진 자신만만한 전의·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녀석의 면상을 봐라·
지 동료가 자길 위해 몸을 던졌다가 갈기갈기 찢겼는데 피눈물을 흘리고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저 발칙한 입만 나불대고 있으니····
저런 같잖은 놈에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래 끝까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거로군· 좋다! 내 손수 네놈의 머리를 잘라 그 시커먼 뇌 속에 든 기억들을 모두 갈취해주도록 하겠다! 이 모든 것은 다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우우웅
녀석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와 함께 느껴지는 엄청난 양의 마나와 신기·
고등급 마법 같은 걸 쓰려는 게 아니다·
그저 엉성했던 인간 흉내를 그만두고 지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 뿐·
-휘이잉
거센 돌풍이 불면서 주변에 자욱했던 안개들이 거쳐 갔다·
마법진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소용돌이와 그 속에서 서서히 본연화를 진행 중인 은발의 드래곤·
딴 사람들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만 지금 저놈·
여태 보여줬던 모습들 중 제일 무방비한 상태다·
그냥 저 머리위로 칼 한 번 꽂으면 끽소리도 못하고 죽을 만큼 아무런 보호 수단도 없는 상태·
‘우와! 내 앞에서 드래곤이 변신하고 있다~!’ 뭐 이러면서 감탄이라도 할 줄 알았나?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원래 변신 중에는 공격하지 않는 게 국룰이라 했다·
싸움에 있어 최소한의 예의라 했던가?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 저 지랄 맞게 변하는 녀석의 모습을 다 봐줘야 한다는 건데?
그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난 암살자인데·
그저 상정할 수 있는 최선의 각이 보이면 예의고 격식이고 상관없이 그냥 달려들어서 죽여 버린다·
그게 암살자로서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규칙이지·
그건 저 멀대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다·
케이람에게 안개가 드리워짐과 동시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대목의 뿌리를 본 적이 있는가?
모든 식물은 땅 속에 묻혀 사방으로 뻗어나간 뿌리를 통해 줄기를 지탱한다·
작은 새싹이 점차 성장해 대목이 되고 수천 개의 잎을 생성해 내듯·
땅속에 퍼져나간 외마디의 작은 줄기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뿌리가 자라난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어디로 뻗을지도 모르는 그런 풍성한 뿌리를 말이다·
지금 저 거대한 몸뚱이에 꽂을 이 작은 일격은
숱한 시간을 견디고 견뎌 마침내 숲의 중심을 이룬
그런 굳건한 대목의 뿌리가 될 것이다·
“무검(舞劍): 굳건한 대목의 뿌리!”
-콰직!
드래곤의 몸이 완전히 성체화를 이룬 바로 그 순간·
지면에서 가볍게 도약해 녀석의 신체 정중앙으로 케이람을 꽂아 넣었다·
-스스스
검에 둘러싸인 안개가 놈의 몸속으로 파고들며 나무에 뿌리가 퍼지듯 수백 개의 여로로 갈라져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네 네놈! 내게 무슨 짓을···!”
호기롭게 변신한 것까진 좋지만 이제 그만 퇴장할 시간이다·
나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생엔 고귀함보단 융통성 좀 갖고 태어나라·”
“끄아아아악!”
녀석은 살벌한 비명소리로 답을 대신하였다·
검을 타고 전승된 안개는 곧 놈의 신체에 수백 개의 구멍을 내어 빠져나갔고 메꿔질 새도 없이 균열과 함께 갈라지면서 거대한 몸뚱이를 그대로 분리시켰다·
-후두둑
죽였다·
지상 최고의 종족 드래곤을 단 5분 만에 둘씩이나·
수백 조각으로 찢기고 갈린 드래곤의 사체가 사방에 어지러이 널브러졌다·
이 상황에 이런 말이 맞는진 모르겠다만
왜 내 눈엔 지금 이 광경이····
진수성찬으로 보이지?
“브라이언!”
“예 도련님!”
잽싸게 달려온 그에게 적당한 살 한 점을 골라 건넸다·
살점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도 도련님 이건 왜···?”
“먹어·”
“예?”
급기야 잘못 들었다 생각했는지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거 지금 아니면 다시 먹기 힘든 인생의 별미야· 몸 단련시키는데 그거만 한 보양식도 없으니까 될 수 있으면 배에 욱여넣을 만큼 욱여넣어·”
그리 말하면서도 나 또한 적당한 살점을 집어 안에 들어있던 피를 쭉 들이켰다·
크으으····
몸 속 깊숙이 신성한 드래곤의 기운이 쫙 퍼지는 느낌이다·
조금 멍청했던 놈이라 그렇지 역시 지상 최강 종족의 피는 다르군!
[····]
곁에 있던 케이람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파 그거 맛있어? 나도 먹어도 돼?!”
어느 샌가 기운을 차린 나나가 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넌 안 돼· 돌아가면 다른 거 줄 테니까! 그거 먹어·”
“싫어! 나나도 먹어보고 싶단 말이야! 나나도 먹을래!”
아서라 꼬맹아· 암만 그래도 동족 포식을 시키고 싶진 않으니·
사체를 향해 달려드는 나나의 옷을 살며시 붙잡았다· 앞으로 나가지도 못해 이리저리 낑낑 대는 모습이 참으로 볼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