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My People (1)
“하아암····”
창문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내게는 청승맞은 하품이 깊은 한숨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마법이란 것은 앞서 말했듯 인계를 창조한 신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우리 몸의 내재된 마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무려 30년 만에 듣는 이론 수업·
아무래도 총장과 딜을 잘못 한 것 같다·
조금의 양심은 보여줄까 해서 간간이라도 수업은 나가겠다 한 건데 아무래도 간간이의 기준을 다시 잡아야 할 듯하다·
두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는 것조차 매우 지루하다·
-스윽
첫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더 들었다간 내 정신이 혼미해질 판이다·
그렇게 교과서 하나 없는 빈 몸을 이끌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디 가는 거야 시안?”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눈을 돌리자마자 보인 것은 황실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붉은 색의 브로치·
이 교실에서 저 문장을 달고 있을 사람은 가히 한 사람뿐이지·
아린 황녀·
그녀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장실 갑니다·”
나는 즉시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화장실은 그쪽이 아닐 텐데? 설마 한 달 만에 나온 첫 수업을 고작 하나만 듣고 가려는 건 아니지?”
교관도 아닌 당신이 왜 그걸 신경 쓰는 거지?
“본 층에 있는 화장실은 붐빌 것 같아서 아래층 화장실을 쓰려는 겁니다·”
표정 하나 안 바뀌는 내 모습에 아린 황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댔다·
그녀 옆에는 다소 난감해하는 얼굴의 레시무스도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화장실만 가는 거야?”
“물론입니다· 화장실만 간 뒤 다시 교실로 돌아올 겁니다·”
바로는 아니어도 한 2주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다·
“좋아· 그럼 나랑 같이 가· 나도 아래층 화장실 쓸래!”
“····”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시무스를 구할 때만 해도 조금은 변한 줄 알았건만
애처럼 구는 모습은 여전하군·
“아 아린 님 아무리 그래도 황녀로서의 체통을···!”
급기야 곁에 있던 레시무스도 만류할 지경이었다·
근데 호칭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이름 부르는 것을 허락하신 겁니까?”
“음? 어 맞아! 레시무스한테 사적인 자리에선 그냥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어! 여기서 우린 다 똑같은 학생이잖아!”
다 같은 학생이라····
아마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아카데미를 통틀어 당신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뭐 황녀님이 원하신 일이라 하니 제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조심해야 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그리 정겨운 곳이 아니니까요·”
충고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불만스런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너는?”
“예?”
“넌 왜 아직 날 황녀님이라 부르는 건데? 듣자 하니 너 세트 왕자랑은 서로 말도 텄다면서? 그럼 나한테도 말 놔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전 제국의 사람이고 황녀님은 제국의 황실이십니다· 어찌 황녀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
움찔하고 놀란 것은 레시무스였다·
아마 그녀도 처음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을 거라 본다·
아린 황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넌 1년 전 그대로구나? 여전히 무뚝뚝하면서도 고지식해·”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시답잖은 대화가 오가는 와중 계단 쪽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
그들의 얼굴을 본 아린 황녀의 몸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아린?”
마주 본 이들 또한 그녀의 얼굴을 아는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형제임을 연상케 하는 똑 닮은 얼굴·
네펠리스 가문 특유의 유전성을 보여주는 눈 밑의 검은 점·
아린 황녀가 지닌 것과 동일한 황실의 붉은색 브로치·
나 역시 그들의 얼굴을 모르지 않았다·
제국의 3황자 파비앙 세벨러스와 4황자 네로비앙 세벨러스·
현 황후의 자식들이자 아린 황녀의 손위 형제들이었다·
나이는 아마 나와 네 살 정도 차이 났던 걸로 기억하니 지금쯤 15살이 되었을 것이다·
자라난 골격과 튀어나온 목젖이 돋보이는 2차 성징기의 청소년들·
하루가 멀다 하고 커가는 그들에게 있어 11살의 아린 황녀는 그저 샛노란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형제는 멍하니 서있는 그녀를 한층 위에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파비앙 네로비앙 오라버니····”
아린 황녀는 문장에 손을 올린 뒤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저들은 그리 보기 좋게 인사나 나눌 만큼 좋은 사이는 아니다·
무려 황제의 외척 네펠리스 후작가를 등에 업은 황자들이다· 근본 자체가 불분명한 아린 황녀를 썩 달갑게 볼 린 없었다·
“쯧····”
동생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는 3황자 파비앙·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반면 4황자 네로비앙은 그 모습이 꽤나 흥미로운 듯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좀 컸다고 떨지 않고 인사하네? 아린···?”
“····”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내색하고 있진 않지만 그녀의 속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도 황녀의 품격은 지키겠답시고 곁에 사람까지 두는구나· 하긴 네 주제에 누굴 옆에 두겠····”
비열한 눈으로 깔보는 것도 잠시 4황자의 시선이 일순간 묘하게 굳어버렸다·
잠자코 서 있던 나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시안··· 베르트?”
내가 벌써부터 그렇게 유명인사가 된 건가?
어째 마주치는 사람마다 날 모르는 이가 없는 기분이다·
“절 아십니까?”
“그럼! 아바마마의 오랜 친우이신 베르트 공작님의 자제를 내가 모를 리 없지! 며칠 전 대련도 아주 잘 봤어· 별 볼일 없는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모래의 왕자를 아주 보기 좋게 이기던데?”
딱히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기분 탓일까?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사교 파티를 열면 꼭 초대해 줄게· 그때 담소를 좀 더 나누자!”
격려인지 시비인지 모를 토닥임과 함께 4황자는 미소를 지었다·
“···?”
그러다 대뜸 아린 황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꼴에 황녀랍시고 같잖은 짓 하지마라· 아린····”
움켜쥔 주먹과 흔들리는 동공·
당사자에게만 들려야할 속삭임이 공교롭게도 내 귀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이래서 청각이 너무 좋아도 문제라니까?
조언 아닌 경고를 던진 4황자는 곧바로 3황자를 따라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폭풍이 지나간 후 찾아온 고요한 정적·
“후····”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아린 황녀는 심호흡을 내쉬었다·
“미안· 잠시 추태를 보였네?”
“바 방금 그분들은 황자님들이었나요···?”
레시무스가 물었다·
“응 맞아· 내 오라버니들이기도 해· 원래 사이가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심하신 것 같네·”
“뭐라고 하셨길래····”
“별거 아니야· 그냥 좀 오해가 있으셨나 봐·”
오해라····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원래 ‘경고의 숨은 뜻은 경계’라는 말이 있다·
엄밀히 말해 4황자는 방금 전 상황에서 아린 황녀를 경계한 것이다·
왜냐고?
당연히 나 때문이지·
사교 파티에 초대한다는 말도 괜히 한 게 아니다·
4황자는 방금 나를 엄연한 한 명의 귀족으로 보고 대우한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내 위치는 지금 결코 가볍지 않다·
벌써 아카데미 내에선 시안 베르트에게 특혜가 내려지고 있다며 소문도 파다한 상태·
황족도 아닌 놈이 황제에 의해 로열관까지 쓰고 있으니 사실상 말 다 했지·
(이건 비교적 최근에 알았다·)
아무튼 그런 내가 이유가 무엇이든 아린 황녀 옆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던 거다·
그러니 경계를 안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나마 오해라고 할 게 있다면 난 지금 누구의 사람도 아니라는 거·
그냥 수업에서 도망치려다 그녀에게 붙잡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 시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아린 황녀의 작은 입술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핏줄보다 진한 건 없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럴까?”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어떤 의미로 했는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통상적으론 그렇다고 봐야겠죠· 애초에 혈연이라는 건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니까요·”
“그렇겠지? 가족이란 건 결국 그런 거니까···”
형식적인 답변에 실망이라도 했는지 목소리에서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다만 그 핏줄에 권력이란 것이 더해진다면····”
“···?”
“그땐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경험담이었다·
“그만큼 권력이란 건 피보다도 잔인하니까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진 이제 그녀의 몫이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몰라도 그녀는 결의 찬 얼굴로 주먹을 굳게 쥐고 있었다·
* * *
석양이 서쪽 어귀로 저물어 갈 무렵의 시간·
사탕 빵 초콜릿 등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짊어진 브라이언이 그 중심을 지나고 있었다·
“····”
아직은 사람들로 붐비는 루웬의 거리·
지극히 이상할 점 없는 저녁 풍경이지만 브라이언은 좀처럼 떨리는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낯선 미행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이 처음은 아니었다·
시안과 함께 루웬으로 온 그다음 날부터 자신들을 감시하는 미지의 시선이 곳곳에서 느껴졌었다·
자신이 가진 특유의 동물적 감각 덕분일까?
한두 번이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을지언정 이렇게 지속적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자신이라 해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아카데미 밖을 활보하거나 식료품을 살 때면 여지없이 달라붙었는데 왠지 자신을 감시한다는 느낌이 다분했었다·
혹여 벨리아스에서 보낸 추적자는 아닐까?
그렇담 이 감시자들이 결코 자신에게만 붙지는 않았을 터·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그저 보잘것없는 종자였다·
노리는 자가 있다면 그건 필시 자신의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우려했던 마음과 달리 이런 기운들은 대개 하루 이틀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정확힌 밤 운동을 하고 오겠다며 시안이 밤마다 기숙사를 나가는 그 시점을 기준으로·
굳이 말은 하지 않아도 자신의 주인이 알아서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기존의 감시자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감시자들이 붙기를 지금까지 세 번 정도·
근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을 미행하는 한 무리의 집단과 함께
반대편에서 똑같이 자신을 미행하고 있는 또 한 무리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 한 패거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너무 달랐기에
한쪽은 그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감시하는 기운이라면 다른 한쪽은 감시와 더불어 언뜻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살의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일전에 한 번 큰 경험을 했기 때문인진 몰라도 이런 추악한 살기에 대해선 어느 샌가 익숙해진 자신이기에
평소처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윽
급기야 속도를 높이던 브라이언은 기숙사가 아닌 으슥한 골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에 추적자들 또한 놓치지 않고 그를 뒤따랐다·
열한 살의 꼬마 주인을 모시게 된 것도 어느새 한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사이에 있었던 기이한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락날락하는 수상한 교관 검에서 자유자재로 실체화하는 여인 용과 인간의 혼혈 아이 까지·
아무리 능력 있는 공작가의 자제라 한들 이 정도의 비범함을 보여줄 순 없을 것이다·
시안의 나이는 이미 브라이언에게 있어 숫자에 불과했다·
이따금 그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가끔 추측되는 것도 있었을지언정 결코 직접 묻는 일은 없었다·
시안 역시 자신에게 입단속을 시키거나 뭔가를 감추려 하진 않았기에·
결국 말은 하지 않아도 자신을 믿고 있으며 언젠가는 친히 말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은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충의만 잘 지켜 주인을 모신다면 종자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허나 세상 일은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에
결국 종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도움을 주어야지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브라이언의 눈에선 굳은 결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난 골목의 막다른 길·
살며시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브라이언이 모퉁이 쪽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만 나와 주십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