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면담 (2)
-콰장창!
청량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두어 바퀴 정도 굴렀다·
왜 이리 요란스럽게 들어왔냐고 물어본다면 난 지금 정문이 아닌 창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후딱 고개를 들어 올리니 탁상에 앉아 있는 총장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감흥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덤덤하게 말했다·
“로열 아카데미 신입생 시안 베르트· 총장님께 이의를 제기하러 왔습니다·”
“···!”
총장은 상당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
오라 해서 진짜 올 줄은 몰랐다거나
아님 내가 올 줄은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다거나·
그렇게 강도 높은 ‘제한 결계’를 설치하셔 놓고 내가 정문으로 들어오길 원하셨나?
아에르의 힘이라도 쓰지 않는 한 그 제한 결계를 맨몸으로 돌파하긴 무리였다·
근데 암살자라는 게 원래 정문으론 잘 안 다닌다고·
나는 해당 층에서 한 계단을 더 올라 옥상으로 향했다·
그러곤 뛰어 내렸지·
마나 구체를 발현해 그걸 도약 삼아 그대로 총장실 창문으로 돌진한 것이다·
다소 과격하긴 해도 그나마 가장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내 총장은 나를 보며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이의를 제기하러 왔다?”
“예· 경고장의 발신처가 총장님으로 되어 있었기에 직접 찾아왔습니다·”
총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었다·
“당돌하구나· 이 신성한 교육기관에서 학생이 수업에 불참해 조치를 취하겠다는데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넌 로열 아카데미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강한 기백이 느껴졌다·
상당히 세게 나오시네·
물론 지금 상황이 내게 유리하지 않다는 건 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내게 무단 침입 및 기물 파손의 죄를 물어 추가 제재를 가할 수도 있겠지·
허나 그게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경고장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절제된 어조로 답했다·
“사실 이의를 제기하러 왔다는 건 제가 총장님을 뵙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 총장님이 내리신 경고에 대해선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하 그 말은 즉 내게 다른 용건이 있어 왔다는 의미로 들리는 구나·”
이에 총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난 너와 세트에게 같은 경고장을 보냈다· 모양도 같고 형식도 같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발신처였지· 세트의 경고장엔 아카데미 행정부가 쓰여 있었겠지만 네가 받은 경고장엔 그러지 않았을 거다· 네 말마따나 경고에 대한 이의가 있었다면 행정부가 아닌 나를 찾아오는 게 맞다·”
총장의 말투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냉철했다·
“내가 두 명 모두가 아닌 왜 너에게만 내 경고장을 보냈다고 생각하느냐?”
“그야 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겠죠· 인재를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총장님께서 제일 잘하시는 일이지 않습니까?”
교육자의 본분은 학생의 성장을 촉진하여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하는 데 있다·
하물며 대륙 제일의 교육기관을 운영하시는 총책임자님께서 나 같은 인재를 그냥 두고만 보실 린 없겠지·
내가 비록 아카데미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똥통이라고 욕할지언정 기본적으로 이곳은 배움의 장소다·
역사적으로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고 그렇기에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명성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좋다· 다소 과격한 방법이긴 해도 이전 날 대련을 비롯해 내 관심을 끄는 데엔 성공했구나· 이의를 제기하러 온 게 아니라면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네 본래 용건을····”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번 고민했다·
확실하고 명쾌한 길을 위해 내 패를 일부 공개할지
아니면 다소 돌아가긴 해도 모든 걸 숨길 수 있는 안전한 길을 택할지·
솔직히 후자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한 번 실패하면 뒤가 없는 인생을 살았던 내게 안전이라는 단어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인생 한방이란 말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총장과 딜을 하기로 정한 이상 어중간한 마음은 접어둬야 할 것이다·
마음을 굳힌 난 총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먼저 총장님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음?”
“총장님께선 제국의 번영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가문의 영예를 원하십니까?”
순간 총장의 눈이 찌릿하고 움직였다·
“총장님은 로열 아카데미의 총책임자이시기 전에 퀴젤 공작가를 대표하시는 수장이시기도 하죠· 더불어 황제 폐하의 전 장인이기도 하셨고요· 디아나 황후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도 폐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세요· 총장님의 답변에 따라 제가 이후에 드릴 말씀이 달라질 겁니다·”
총장의 묵직한 시선은 마치 생태계 최상에 군림하는 포식자와도 같았다·
마치 ‘내가 너 따위에게 그걸 왜 답해야 하냐?’는 듯한 눈빛·
나 또한 물러서지 않고 그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번영과 영예?”
침묵을 유지하던 총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둘 다 내 알 바 아니다·”
조금 의외의 답변이었다·
“지금 대륙은 로열 아카데미가 세워진 이후 유례없는 평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칼을 맞댄 지도 벌써 100년이 흘렀지· 사실상 지금이야말로 제국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번영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대현자 테라마일 이슈파가 로열 아카데미를 설립한 지 어언 100년·
실제로 대륙에선 그 이후로 국가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 핵심적인 중추에 로열 아카데미가 존재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총장의 말대로 사실 현시점이 제국 역사에서 유례없는 번영의 시기인 건 맞다·
“게다가 난 가문의 영예에 대해선 이미 관심을 접은 지 오래야· 가문은 이미 나 없이도 잘 굴러가고 있으며 공작 자리에서도 한참 전에 물러났지· 지금의 내겐 이 아카데미가 더 중요할 뿐이다·”
총장의 말엔 거짓 하나 없는 확고한 의사가 담겨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총장님께선 제국의 번영도 중요치 않고 가문의 영예도 딱히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시니 제국의 1황자 혹은 2황녀가 황위를 물려받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말씀이시군요?”
“···!”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당돌한 게 아니라··· 건방진 거였구나·”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내게 총장은 묵직한 어조로 읊조렸다·
“내가 이 아카데미에 몸을 바친 것도 어언 30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학생을 봤고 수많은 인재를 봤지· 그 중엔 신의 아이라 불렸던 네 누나도 있었고 대륙의 두 번째 수호자가 될 거라는 네 형도 있었다· 나또한 너를 그들과 같은 범주에 있는 인재라 생각했었지·”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한데 나를 그놈과 같은 범주에 넣으셨다 하니 기분이 살짝 애매하네?
일단은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근데 내가 널 잘못 본 모양이구나· 넌 그냥 주어진 힘에 자만하는 둔재일 뿐이다· 제 아무리 베르트 공작의 자제라 해도 네 발언으로 인해 불러올 파장 같은 건 생각하지 않은 것이냐? 아님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해서 허영심이 몸을 지배하기라도 한 것이냐? 내 잠시나마 널 좋게 본 것을 크게 후회하는구나·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결계를 잠시 풀어줄 터이니 그만 나가 보거라·”
매몰차시네·
총장은 두말할 것 없이 내게 나갈 것을 지시했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총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제국의 유례없는 태평성대입니다· 적어도 황제 폐하께서 천수를 누리시는 동안엔 줄곧 이어지겠지요· 허나 그 평화로운 시대가 과연 황제 폐하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질까요?”
“···!”
총장의 눈이 한순간 번뜩였다·
“총장님이 비록 지금은 가문에서 물러나셨다곤 하나 현 제국의 정세를 모르진 않으실 겁니다· 지금 제국은 외줄 타기를 하고 있죠· 전 황후 세력인 1황자와 2황녀 그리고 현 황후 세력인 3황자와 4황자··· 황제 폐하 사후 그들 사이에 벌어질 내분은 이미 기정사실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한 명 더 있긴 하지만 일단 그녀는 잠시 빼두기로 한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란돌프 네펠리스 후작은 총장님처럼 세상에 달관한 자가 아닙니다· 가문의 영예를 그 누구보다 중요시하며 이를 위해선 지옥의 악마도 죽일 수 있는 남자죠· 그는 필시 자신의 핏줄이 황위에 오르기를 원하고 있을 겁니다·”
총장의 눈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네펠리스의 후작에 대해선 나보다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통성으로 따졌을 땐 1황자가 황위를 물려받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를 네펠리스 가에서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죠· 결국 자연스레 내분으로 이어질 겁니다· 그럼 제국의 번영은 한순간에 깨지고 만약 1황자의 세력이 패배한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어진다면 퀴젤 가의 안위도 결코 무사하지 못하겠죠·”
“넌 우리 퀴젤 가문이 그렇게 무기력하다고 생각하느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 않겠습니까?”
아마 총장은 지금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고작 열한 살 소년이 벌써부터 제국의 정세를 뻔히 꿰뚫고 있다?
주워들었다고 하기엔 내 태도가 너무 당당하겠지·
애초에 이런 말은 그의 직속 가신이 아니고서야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제국의 번영과 가문의 영예···· 총장님께선 별로 상관하지 않으신다 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그 두 개가 한꺼번에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미래가 와도 총장님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총장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실로 많은 것이 담긴 눈빛이었지만 그 중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날 일개 신입생으로 보진 않겠다는 것을····
“가문의 그 누구도 내게 하지 않았던 말을··· 너한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어조가 다소 누그러졌음을 느꼈다·
“그래· 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그 혼란스러운 정세에서 내가 어떤 길을 나아가면 좋을지 방향을 제시해주기 위해서냐?”
나는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총장님이 대단하신 분이란 건 저도 잘 압니다· 만약 내분이 정말로 발생한다면 총장님께선 그 분쟁을 승리로 이끌어 퀴젤 가의 자제를 황제로 만드시겠지요·”
실제로 쿤델 총장은 황위 분쟁에서 퀴젤가를 승리로 이끄는 데 혁신적인 공헌을 했고 1황자 ‘루이넬 세벨러스’를 황제로 만들었다·
허나 분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분이 종식된 이후 총장은 루이넬 황제가 나머지 4명의 형제를 평화적으로 포용하길 원했다·
그들을 포섭하지 않는 한 분쟁은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기에 죽일 것이 아니라면 우호적인 관계의 유지를 원했던 것이다·
허나 루이넬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태생부터 권력 분쟁이라는 싸움판에서 자라온 그에게 형제간의 우애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하나의 반동분자일 뿐·
많은 이들의 앞날은 그리 잘 보던 쿤델 총장도 정작 본인의 앞날은 보지 못했다·
내분은 또 하나의 내분을 낳았고 결국 루이넬 황제는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쿤델 총장을 암살하는 동시에 남은 형제들에게 반역의 죄를 물어 모조리 사형시켰다·
아린 황녀는 밖으로 쫓겨나가는 선에서 그쳤지만·
“하! 그럼 여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저의는 무엇이냐?”
큰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 한 제국의 미래는 똑같이 흘러갈 것이다·
솔직히 나야 제국의 번영이고 가문의 영예고 이제 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감님은 다르겠지·
다른 건 몰라도 그는 남은 생 동안 지금의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럼 난 그런 총장의 바람을 이용하면 된다·
“총장님은 결국 이 아카데미가 더 중요하다 하셨죠? 그럼 누가 황제가 돼도 상관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가문의 영예도 지금과 같이 유지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이 평화로운 시대에 제국과 아카데미가 번영하는 모습을 오래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네놈이 뭐 도와주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역시 바로 꿰뚫어 보시네·
나는 말 없이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내 인정하지· 난 이 아카데미의 안위만 보장된다면 황제가 누가 되든 상관없다· 한데 그렇다 해서 네가 어쩌겠다는 것이냐? 너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말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남은 건 증명뿐·
내가 혼란스런 제국의 정세를 뒤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지 그에게 증명시켜야 한다·
-기이잉
이에 나는 손바닥에 작은 마나 구체를 만들어냈다·
평범한 마나 구체라 생각하는가?
맞다·
이건 1성급 학생도 만들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마나 구체다·
허나 그 평범한 것도 누가 만드냐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있다·
“···!”
총장의 눈빛이 심히 흔들렸다·
그는 느낀 것이다·
검은 마나 구체로부터 발산되는 엄청난 마력을·
그리고 또 알겠지·
지금 내가 보여주는 마력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너는 대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재 신동 혹은 인간계로 강림한 어느 신적 존재 등 자유롭게 생각해주세요· 절 평범한 학생으로만 안 봐주신다면 그걸로 된 겁니다·”
총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 순간도 오래가진 않았다·
이윽고 마음을 정리한 듯한 그가 다시 내게 물었다·
“넌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역시 우리 총장님께선 기브 앤 테이크가 뭔지 잘 아신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답했다·
“별거 없습니다· 경고를 철회해주심과 더불어 그냥 지금의 아카데미 생활을 유지하게 해주세요· 수업도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이는 나가겠습니다· 시험도 꼬박꼬박 치를 거고요·”
“그게 끝이냐?”
“네 끝입니다· 더 없어요·”
총장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 인해서 네가 얻는 건 무엇이냐?”
“평화입니다· 저 또한 이 아카데미를 문제없이 다니고 싶거든요·”
뭐가 문제냐는 듯한 내 미소에 총장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