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검은 안개의 추종자들 (2)
욕망·
인간에게 있어 아무리 충족해도 충족할 수 없는 사회적 구성물·
허나 욕망은 때에 따라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혹은 최악의 힘이 될 수 있다·
언뜻 이 양날의 검과도 같은 인간의 원동력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게 뭐라 생각하는가?
물질을 추구하는 탐욕?
성행위를 갈망하는 성욕?
솔직히 둘 다 우위를 가리긴 힘들지만 난 개인적으로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투욕(鬪慾)·
이른바 싸움에 대한 욕망·
듣기엔 조금 낯선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전생의 난 저 투욕에 빠진 사람 한 명으로 인해 죽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강자에 대한 열망과 싸움에 대한 환희·
언뜻 들으면 굉장히 남자답고 화끈해 보일지언정 겪어본 사람이라면 저런 말 못 한다·
“단계적으로 절 시험해보려던 것 아니셨습니까? 아직 저 암살자들이랑은 붙어보지도 않았는데요?”
“상관없어! 넌 이미 저 간부들도 뛰어넘을 정도의 가능성을 가진 놈이니까!”
살짝 당황한 마음에 넌지시 물어봤지만 그녀는 이미 말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투욕에 심취되어 있었다·
미스트의 당주 시리카 니그리티·
낮에는 평판 있는 아카데미의 학술 교관으로 밤에는 암살자들을 통솔하는 뛰어난 지도자로·
가히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뛰어난 실력자였다·
가령 사람들은 그런 실력자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대체 저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무엇을 갖추었길래 저리 뛰어난 실력을 보일 수 있는 건가?
간단하다·
그녀에게는 투욕이라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자를 마주칠 때마다 끓어오르는 전의 그런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자신 또한 강해져야 한다는 바람· 이런 수레바퀴 같은 원동력에 따라 그녀는 힘과 능력을 쌓아 올렸으며 결과적으로 잔혹한 암살자들의 통솔하는 최고의 암살자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허나 앞서 말했듯 욕망은 양날의 검이다·
최고의 힘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로 최악의 힘 또한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오히려 타인에게····
“정말 놀라워! 아무리 계승자라 해도 이 정도까지 보일 줄은 몰랐다고! 시안 베르트! 너도 결국 이걸 원해서 나에게 접근한 것 아니었나?”
말은 바로 합시다 당주님·
당신이 전생의 내 최고의 스승이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런 실성한 면까지 배우려 하진 않았거든요?
나는 안개와 더불어 검에 전승한 마나의 힘을 방출해 그녀를 밀쳐냈다·
-휘리릭
파동에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광적인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거기에 멈출세라 나를 보며 입맛까지 다셨다·
“제가 계승자라는 건 인정하시는 겁니까?”
“마검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살기의 파동을 썼을 때부터 확신이 들었다!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선 네 몸에 미스트 스톤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지만 필요 없어! 난 지금 당장 너와 싸워야겠다! 시안 베르트!”
어느덧 미스트의 다른 대원들까지 모두 모여 나와 시리카를 둘러싸고 있었다·
대체로 당황한 기색을 못 감추는 거로 보아 지금 상황이 그들에게도 예기치 못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아에르 님께서 만드신 신의 아공간이다! 외부로 새어 나갈 여파는 모두 알아서 차단되지! 즉 너와 내가 아무리 치고받고 난리를 쳐도 밖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거야!”
참으로 친절하신 당주님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루웬 한복판에 위치한 미스트의 비밀 아지트지만 실제로 도시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아공간·
즉 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땅 위엔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의 공간이다·
마법으로도 탐지할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은신처·
그러니 그녀가 이리 날뛸 수 있는 것이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나도 아쉬움을 느낀 건 사실이거든?
나 또한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수많은 피를 묻히고 맛봐왔던 놈이다·
‘싸움에서 이기는 최선의 수단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라는 같잖은 생각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전선에서 나온 이후 근질근질했던 몸의 욕구를 나도 풀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이곳은 아에르의 공간·
뭘 하든 뒤처리만큼은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 또한 자연스레 내재되어있던 투욕이 상승하고 있었다·
-스스스
“···?”
끓어오르는 투욕과 함께 내 몸에서 또 하나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케이람?”
치렁치렁한 흑발을 휘날리는 장신의 여인·
아카데미에 입성한 이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케이람이 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여느 때와 같이 도도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
근데 느낌이 좀 다르다·
지면에 발을 붙이고 있는 두 발과 횃불을 통해 비춰지고 있는 그림자·
지금껏 보여줬던 일반적인 실체화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그녀는 더 이상 영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이 이건···?”
시리카를 포함해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발끝을 감싸고 있던 안개도 일렁이는 잔상도 없는 완벽한 사람의 형태· 다만 마검으로서 풍기는 잔혹한 살기만큼은 잔재해있었다·
[····]
케이람은 아무런 말 없이 그들을 쭉 둘러보았다·
신의 힘을 이어받은 무구·
하등존재인 인간으로선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
더군다나 그녀는 다른 신도 아닌 미스트가 추종하는 신 아에르의 힘을 이어받은 검이다·
즉 이들에게 있어 그녀는 아에르와 동일시되는 우상인 것이다·
-척
신의 무구를 마주한 모든 암살자들이 그대로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추종자들의 숭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썩 내키진 않는 듯 보였다·
“하도 잠잠해서 죽은 줄 알았는데?”
[여기 공기가 워낙 찜찜하다 보니 별로 나타나고 싶진 않았어·]
생각해보니 그녀를 아카데미까지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선 지역이야 마수들의 혈기와 악기가 판을 치다보니 그녀가 활개 치긴 좋은 지역이었겠지·
하지만 숱한 마법의 기운들이 뒤섞인 이곳은 아니다·
그녀가 굳이 모습을 드러내진 않으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순간적으로 찾아온 빈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앞서 말했지만 지금 케이람은 영적인 상태가 아닌 하나의 인격으로서 완전 실체화를 한 상태다·
검의 영혼이 신체를 갖기 위해선 소유주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현재 그녀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건 온전히 나의 생명력이었다·
장기화될 경우 소유주의 수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만큼 전생의 그녀도 웬만해선 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런 그녀가 나만이 아닌 여기 있는 모든 암살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내가 시리카와 싸우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단 소리였다·
“미스트의 당주 시리카 니그리티· 아에르 님의 계승체이신 마검님을 뵙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성을 잃었던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케이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날 아는 모양이네?]
“아에르 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힘을 이어받은 무구가 이 대륙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설마하니 계승자가 벌써부터 마검님을 소유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케이람은 뭔가 달갑지 않은 듯 시리카를 따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원래 아무한테 막 나타나고 그러지 않거든? 근데 손수 나타났다는 건 지금 이 상황이 별로 맘에 안 들어서야·]
“무엇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너 아까 방에서 나 봤지?]
“···!”
케이람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번뜩였다·
[당주라는 놈이 날 몰라봤을 린 없고 게다가 얘는 분명 자기가 계승자라고 말까지 했어· 그리곤 넌 얘를 여기까지 데려왔지····]
“맞습니다····”
[근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다른 놈들도 아니고 아에르를 숭배한다는 너희들이 내가 있는 앞에서 내 주인을 건드려···?]
그녀의 발밑으로부터 붉은빛의 파동이 아른거렸다·
[이거 나에 대한 도전이라고 봐도 될까?]
살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면서 주변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시리카는 동요하지 않고 꿋꿋한 시선으로 답했다·
“어디까지나 확인 작업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진짜 계승자인지 아닌지 당주로서 확인할 필요도 있었을 뿐더러 계승자인 그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가늠해봐야···”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확인 하냐고? 딴 거 필요 없이 니들 신 불러오면 되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
뭐지?
얘 지금 왜 화내고 있지?
평소의 그녀답지가 않다·
투욕이라면 그녀도 만만치 않아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알았는데
이 분위기는 마치····
“불쾌감을 느끼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정말 주인의 안위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마검이시로군요·”
분명 사죄하고 있긴 하나 어째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조롱하는 듯한····
그걸 케이람도 인지했는지 눈초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계승자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건 제가 아닌 마검님인 것 같습니다만····”
고개를 추어올린 시리카의 얼굴엔 차가운 미소가 서려 있었다·
[뭐?]
“지금 마검께선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완전 실체화를 하신 상태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건 소유주의 생명력을 깎아 먹는 비효율적인 방식이죠· 실제로 지금 당신의 주인은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지 않습니까?”
케이람의 시선이 급 나에게로 향했다·
아니 내 생명력을 통해 널 유지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딱히 힘들진····
-주르륵
“···!”
순간 한줄기의 피가 코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케이람이 극대노한 얼굴로 내 멱살을 붙들었다·
[야! 고작 이 정도도 힘들어서 피를 흘려? 너 마수의 피는 허투루 처먹었냐? 이건 뭐 굳이 나타나줬더니만 어디서 힘든 기색을···!]
“아니야! 이건 그냥 간만에 하다 보니 몸이 적응을 못 해서···!”
확실히 마수의 피가 효능은 끝내주네·
누가 내 생명력으로 실체화한 거 아니랄까 봐 목을 잡고 흔드는 힘이 아주 상급 마수 저리 가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케이람의 시선이 다시 시리카에게 향했다·
[그렇게 싸움을 좋아하면 어디 나랑도 한 번 붙어볼까?]
시리카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미스트의 당주 시리카 니그리티! 걸어오는 싸움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상대가 당신이라면 더더욱 거절할 수 없겠지요!”
잠잠해졌나 싶더니 그녀의 몸에서 다시 한번 투욕이 끓어올랐다·
이에 질세라 케이람의 몸에서도 다량의 투기가 치솟았다·
신의 아공간에서 휘몰아치는 두 여인의 매서운 살기에 나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그저 멍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거기까지···)
아공간 전체에 퍼지는 장엄한 미성·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
“아에르 님!?”
꺼질 줄 모르던 두 여인의 살기도 목소리가 들린 순간 바로 사그라들었다·
(그만 계승자를 제단으로 보내라·)
이어진 통로 끝 검은빛이 아른거리는 영험한 공간·
결코 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나의 절대적인 물주가 또 한 번 나를 부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