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검은 안개의 추종자들 (3)
사람들은 말한다·
‘검은 안개의 신은 인간 본연의 존엄성과 가치관을 부정하려 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저지를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부추기며 마치 그것이 세상을 위한 올바른 일이라며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신은 말했다·
‘그들이 원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는 그저 올라서지 못한 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힘을 줬을 뿐·’
‘애초에 옳고 그름이라는 건 남이 아닌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무책임한 방관자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말해주고 싶다·
이 신은 무책임한 게 아니라 모자란 거라고·
신으로서의 체통은 통으로 버린 채 그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인간들만 철저하게 지키려 했던···
그런 머저리 신이라고 말이다·
초월자의 존재가 느껴지는 아공간의 끝자락·
그곳엔 케이람이 잠들어 있던 곳과 비슷한 형태의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와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희미한 사람의 형체·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평온한 자세로 제단 위에 앉아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그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질문을 던졌다·
“검은 안개의 신 아에르·”
두말할 것 없이 이 공간의 주인이었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다만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구나·)
오랜만의 만남이긴 하나 항상 내 곁에 머무는 안개를 보는 것마냥 그다지 낯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무엇이냐?)
“시안 베르트·”
(네가 나의 계승자였다는 건 언제부터 알았느냐?)
“1년 전부터·”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생을 끝마치고 과거로 돌아온 시점이 그때였으니 현재의 역사로 따지면 내가 미스트 스톤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아에르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계승자가 되는 길엔 두 가지가 있지· 첫째는 내가 직접 계승자를 임명해 나의 각인이 새겨진 미스트 스톤을 주는 경우고····)
전생의 나였다·
(두 번째는 계승자의 자격을 갖춘 자가 세상에 나타났을 경우 미스트 스톤이 알아서 찾아가는 경우다· 네 몸엔 지금 미스트 스톤이 있지만 난 너에게 그걸 준 기억이 없다· 그러니 후자에 해당되겠지·)
그렇다는 건 즉 내가 이 세계로 회귀한 동시에 미스트 스톤이 내 몸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른바 바꿔치기·
전생에 있던 미스트 스톤은 소멸하고 본 세계에 있던 새로운 미스트 스톤이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미스트 스톤이 사라짐에 따라 조직 또한 계승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정화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나조차도 위치를 모르고 있던 마검을 깨워 제어하기까지 하다니··· 너의 그런 모습은 또 처음 보는구나· 케이람···)
[····]
자신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깨문 채 맹렬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날 이미 알고 있는 눈빛 난 준 적도 없는 미스트 스톤 저 아이들이 가르쳐준 적도 없는 비기들까지···· 이건 뭐 겉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군· 그야말로 완성품 그 자체야·)
아에르는 의아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흡족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넌 내 기억엔 없는 다른 시간에서 온 이방인으로 보이는구나····)
아무런 징조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상태로 나타나 버린 계승자·
지금의 난 어쩌면 아에르와 미스트가 해야 할 모든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일지 모른다·
자신들이 만들었어야 할 자신들이 함께했어야 할 그 계승자가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등장한 것이니·
그렇기에 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원인이 바로 이 추방당한 신으로부터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난 이 일이 오히려 당신과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허나 그건 아니라는 듯 아에르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신이라는 타이틀도 이미 박탈된 지 오래다· 전능한 초월자를 원했다면 세계를 잘 못 찾아온 것 같군·)
뭐 그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알던 당신의 모습이 여기서도 여지없이 보이고 있으니·
아에르 또한 이런 내 모습을 흥미 어린 눈빛으로 쭉 훑어보고 있었다·
(흠···· 이거 뭐랄까 본의 아니게 굉장히 편해진 느낌이군?)
“···뭐 때문에?”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줄 필요도 없이 그냥 완성된 계승자가 떡하니 나타났는데 뭘 가르쳐줄 필요성도 줄고 나로선 물주로서의 역할을 던 셈이지 않겠느냐?)
“참 여전하네 당신도····”
전생의 나라면 신이 뭐 이러냐며 듣고서 의아해했겠지·
허나 지금의 난 저 말이 가식 하나 없는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반면 케이람은 진심으로 깬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거슬리는 물건을 하나 가지고 있구나·)
나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챘고 곧바로 주머니 구석에 짱박아 뒀던 금색의 돌을 꺼내 보았다·
케이람을 가져올 당시 빛의 신전에서 강탈(?)해 왔던 성검 듀란다르크의 보석·
칠흑의 어둠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밝고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검으로도 모자라 성검의 힘까지 취하려 했던 것이냐?)
사실상 내겐 아무런 쓸모도 쓸 수도 없는 물건이지만 남에게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건 미래에 맞춰질 커다란 퍼즐을 위한 하나의 조각일 뿐·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당장 뭘 하려는 건 아니야· 다만 아무리 빛나고 값진 보석도 세상 빛을 보지 못하면 결국 의미 없는 돌멩이일 뿐이지·”
(곱상한 얼굴과 달리 고약한 취미를 가졌군· 뭐 내 알 바는 아니니 굳이 더 묻진 않겠다·)
-스윽
제단에서 일어난 그는 서서히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게 전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물어보겠다· 설사 내 기억엔 없다 해도 넌 부정할 필요가 없는 분명한 나의 계승자이니 말이다·)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안개의 형체·
이윽고 모든 안개가 걷히고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신의 성면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의 절대적인 물주로서 묻겠다 나의 힘을 이어받은 계승자여· 넌 그 잘난 힘을 가지고 앞으로 무엇을 할 예정이냐?)
전생의 난 저 질문을 이렇게 이른 시기에 받지 않았다·
정확히 17살 때 아카데미의 졸업을 앞두고 본격적인 나의 앞날을 꾸려나가야 할 그 시점·
아에르는 지금과 똑같이 내게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때의 난··· 정말 하지 말아야 할 한심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형을 위해 살고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들은 아에르가 그 자리에서 내 입을 찢고 사지를 비틀어 저 공허의 나락으로 던져버렸어도 무방했다·
기껏 먹여주고 키워주고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줬더니 한다는 말이 뭐? 형을 위해 살고 싶다?
난 그때 솔직히 아에르를 비롯해 미스트의 모든 암살자들을 적으로 돌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때의 난 그 악마 자식한테 미쳐 있었으니·
하지만 아에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너 알아서 해라·’
당주도 말했다·
‘네가 선택한 미래 우리는 관여할 자격이 없다·’
어째서?
아낌없이 다 퍼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내 선택을 존중한다고?
그럴 거면 나를 왜 데려오고? 왜 계승자로 만든 건데?
이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내게 모든 것을 줄 리는 없을 뿐더러 분명 그들도 내게 원하는 게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은 정말 나를 쿨하게 보내줬다·
당신의 난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래도 존중해 줘서 다행이라는 미련한 생각을 했었지·
다만 아에르는 이 말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던졌다·
‘무지한 신뢰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어쩌면 그때의 아에르는 내가 그런 등신 같은 최후를 맞이할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진 않았을까?
뭐 이미 지나간 일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지·
이제는 반대다·
앞서 말했듯 이 세상은 쌍방교환의 세계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 한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 내가 그들에게 돌려줄 차례다·
“일단은 정화 작업을 해야겠지·”
(····)
정화 작업 즉 현재 미스트가 하는 암살 활동을 지칭한다·
의외라는 듯 아에르의 시선이 다소 굳어진 반면 케이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고 있었다·
“그다음엔 내가 해야만 했고 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바로 잡을 거야· 그다음엔 당신이 원했던 일을 해줄 거고·”
옳고 그름이란 건 남이 아닌 스스로가 판단하는 일이다·
내 행동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결과를 불러온다 해도 상관없다·
누구의 지시도 아닌 순전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예상과 달리 아에르는 꽤 기나긴 침묵에 휩싸였다·
(내가 원했던 일이라 했느냐?)
“어·”
(묘한 기분이군· 넌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아는 것이냐?)
“몰라· 이전 세계의 당신도 딱히 말한 적이 없었거든·”
사실 그가 말한 적은 없어도 추측되는 건 하나 있었다·
다만 아에르의 입으로 직접 듣기 전까진 그저 추측으로만 묻어두려 한다·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에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가 있었던 이전의 세계에서도 난 분명 네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거다· 넌 그때도 지금과 같은 대답을 하였느냐?)
“아니·”
일말의 망설임 없는 대답·
그 모습을 본 아에르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거면 됐다· 다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라· 이미 네 존재로 인해 세상의 인과는 크게 뒤틀렸을 터· 그걸 감당해야 하는 건 오로지 네 몫이다·)
“····”
(그러니 때로는 주변을 둘러보거라· 이미 너의 손길을 거쳐간 수많은 이들이 다시 돌아와 너의 손을 잡아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내 손길을 거쳐간 사람들이라····
글쎄 솔직히 피 묻힌 기억밖에 없어서 잘 생각은 안 난다만 어쨌든 그의 충고니 새겨는 들어야겠지·
“명심할게·”
아에르는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는 잠시 내 딸아이와 못다 한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
대뜸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케이람에게 향했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케이람· 네 주인이 널 얼마나 휘어잡았는진 몰라도 고분고분한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린다·)
[뭐라는 거야 이 머저리 신이? 누구 맘대로 딸이래?]
음흉한 미소를 지은 아에르가 슬금슬금 다가가려 하니 케이람은 급기야 내 등 뒤에 숨어 오지 못하게 철저히 막고 있었다·
아니 자기 키의 반도 안 되는 나로 뭘 어쩐다고····
[저리 안 가? 이 망나니가 나한테 또 뭔 짓을 하려고···!]
(네 주인한테 줄 게 없으니 대신 너한테라도 주려는 것 아니겠냐? 잠시만 좀 있어 보거라·)
끝끝내 그녀의 팔을 붙잡은 아에르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에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피이잉!
이윽고 완성된 마법진을 통해 다량의 안개가 유입되니 케이람은 괴로운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
반면 내 몸은 이상해질 만큼 좋아지고 있었다·
분명 케이람의 완전실체화를 유지하고 있는 탓에 기력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을 텐데 이건 마치 그 공급이 중단된 것 같다·
[너 너 나한테 뭐 한 거야?]
(별거 없다· 그저 내 생명력의 일부를 너에게 줬을 뿐이야· 앞으로 완전 실체화를 할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그때마다 네 주인의 생명력을 깎아 먹을 순 없지 않으냐?)
그런 거였군·
소유주의 생명력 대신 조물주의 생명력을 이용해 실체화를 유지한다는 건가?
단순히 생명력만 준 건 아닐 것이다·
안개를 통해 느껴진 다량의 기운으로 보아 그가 보유하고 있던 신기(神氣)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전승한 것으로 보였다·
[쓰 쓸데없는 짓을····]
(왜 쓸데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실체화가 얼마나 중요한데? 앞으로 네 주인을 합법적으로 덮칠 수 있지 않겠느냐? 아! 아직 육체적으로 성장이 덜 됐다 보니 덮치는 건 좀 범죄이려나···?)
[뭐라는 거야? 이 머저리가!]
급기야 폭발한 케이람이 아에르의 멱살을 붙잡으며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아주 똑같군·
힘이 빠져나간 아에르는 이렇다 할 대응도 못 한 채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