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황녀의 순방 (2)
이틀 뒤· 예정되었던 순방의 날이 밝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아린은 순방단과 함께 황성의 서쪽 경계문에 이르렀다·
가슴 한편엔 황제로부터 받은 순방 총책임자 임명서를 고이 품고 있었다·
시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동행을 약속받았던 또 하나의 수행원 루나브와 그녀의 기사 슈르츠
그리고 그 옆엔
“어 그 그러니까?”
루나브가 데려온다고 했던 또 한 명의 수행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트 왕자··· 맞죠?”
“오랜만이야 아린! 아니 아린 황녀! 졸업 이후 처음 보는 거지 우리?”
아린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멍을 때렸다·
세트 샤하르칸·
스파니아의 제 1왕자이자 유력한 왕위 계승자·
비록 아카데미에선 전교생이 알아주는 막장 학생이었긴 해도 무력과 마법 능력은 전교에서 손을 꼽을 만큼 알아주었던 실력자이긴 했지만···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아린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왜? 나 뭐 여기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세트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데려온다는 사람이 세트 왕자였어 루나브?”
“네·”
루나브는 무심한 얼굴로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여기 후배님한테 들었어! 시안을 도와서 전선의 마수들을 때려잡는댔지?”
중간에 뭔가가 많이 생략되었다·
루나브는 자신은 절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이에 아린은 마음을 급히 다잡고선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혼자 온 거예요?”
저래 보여도 엄연한 타국의 왕자·
황실로서 국빈급 방문에 준하는 예우를 보여줘야 하는 남자다·
사전에 온다는 기별이라도 보내든지 하다못해 작은 사절단이라도 꾸려왔다면 이렇게 갑작스럽진 않았을 테지만
“그럼! 당연히 혼자 왔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 몰래 온 거야· 나 여기 있단 사실 왕국에 전해지면 난리 날걸?”
아린은 물론 주변에 있는 모두가 경악함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을 정말 순방의 수행원으로서 데려가야 하는지 아린은 급 깊은 고민에 빠졌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아린 황녀! 왕자로서가 아닌 세트 샤하르칸으로서 도와주러 온 거니까!”
세트는 그런 아린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쳤다·
고민을 거듭하던 아린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해선 차후 저희 황실에서 스파니아 왕국 측에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낼게요· 어쨌든 저희 제국의 일을 도와주러 오신 거니 사례를 하는 게 당연하겠죠·”
“굳이 그럴 필욘 없는데 뭐 아린 황녀 편할 대로 하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털털한 모습에 아린은 마지못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세트에게도 정식으로 황실의 수행원을 증명하는 브로치를 건넸다·
브로치를 받은 세트는 기쁜 표정을 짓다가도 돌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대부분의 기사들은 생각했다·
순방단에 든든한 지원군 아니 괴물을 얻게 되었다고·
그렇게 전선 행을 시작한 황녀의 순방단·
선두엔 순방단의 총책임자인 황녀의 마차가 그 뒤를 수행원의 신분으로 동행하는 루나브와 세트가 탄 마차가 따랐다·
“쉽지 않은 부탁이었을 텐데 선뜻 들어줘서 고마워요·”
루나브는 세트에게 뒤늦은 감사를 전했다·
“별말씀을!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후배님의 부탁인데 내가 어떻게 안 들어 주겠어!”
세트는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랄까요? 이전보다 훨씬 더 거칠고 단단해지셨네요?”
“응? 아 뭐 몸 단련하는 거야 늘 해오던 거니까·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물러지는····”
“아니 몸 말고 선배의 내면 말이에요·”
세트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돋아났다·
“요즘도 모래의 신께서 자주 왔다 갔다 하시나요?”
7년 전 스파니아 왕국의 어느 이름 없는 유적에서 루나브와 시안은 분명히 보았다·
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하던 세트의 모습을 말이다·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징하게 한바탕하고 왔다 야·”
세트는 언급조차 하기 싫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가지 말라며 극구 말리더라고· 자칫 스파니아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나 뭐라나? 되도록 시안 그놈 곁에 붙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던걸?”
별거 아니란 것처럼 말하고 있긴 해도 그것은 엄연한 신의 경고였다·
“그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오신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조심해야 할 건 그런 얼굴도 모르는 놈의 경고가 아니야·”
허나 세트에게 있어 그런 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그가 살아가는 데 있어 조심해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난 감기만 조심하면 그만이거든!”
세트는 씨익 하고 웃으며 코가 가려운 듯 손가락으로 콧등을 매만졌다·
* * *
황녀의 마차는 대체로 큰 문제 없이 수월하게 나아갔으며 어느덧 벨리아스를 하루 앞둔 거리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내일 오전 중으론 벨리아스에 도착하게 될 터·
야영하기 적당한 숲속에 자리를 잡은 순방단은 바로 야영 캠프 설치 작업에 들어갔다·
“이 짓도 어지간히 고역이네!”
마차에서 내린 세트는 장시간 운행으로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바로 기지개를 켰다·
“어이 기사님들! 그래 가지고 언제 캠프를 짓겠어! 아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러곤 캠프를 설치하는 기사들에게 부리나케 달려가 작업을 도왔다·
“저도 일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슈르츠 역시 일을 도우러 나갔다·
마차에서 내린 루나브는 자연스럽게 아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 선배는 끝까지 안 보이네요·”
흠칫 놀란 아린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
“음? 그 그러게· 잘 따라오고 있는지 모르겠네·”
“잘 따라오고 있을 거예요· 오는 동안에도 종종 선배의 냄새가 났었거든요·”
“냄새?”
“그런 게 있어요· 아마 이 근처 어딘가에서 저희를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겠죠·”
그러면서 그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루나브였다·
“시안에 대해서 잘 알고 있구나·”
“꼭 그렇지도 않아요· 워낙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맞아·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지·”
그와 연이 닿은 사람이라면 공통으로 들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가능하시겠네요?”
“뭐를?”
“시안 선배에 대한 죄를 다 사면하셨잖아요? 그럼 본래 약속했던 것도 다시 진행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약속?”
아린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허나 이내 뭔가가 떠오른 듯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루 루나브 너 설마 지금 말하는 약속이란 게···?”
“약혼 말이에요· 원래 선배랑 약혼하셨었잖아요·”
루나브는 세상 무덤덤한 얼굴로 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깜짝 놀란 아린은 급기야 크게 고성을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캠프를 설치 중이던 기사들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루나브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살을 좁힌 반면 아린은 흥분한 나머지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그건 이미 예전에 끝난 이야기야! 이미 파기한 약속을 다시 되돌릴 순 없는 거라고!”
“그래요?”
루나브는 의문의 흘리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제가 먼저 가져가도 되는 거죠?”
“···!”
아린은 이전보다 더 격해진 반응을 보였다·
“뭐 뭘 가져간다는 거야?”
“뭐긴요? 당연히 시안 선배죠· 좋다 좋다 하고 가만두니까 여자들이 끊임없이 느는 것 같아서 안 되겠더라고요· 먼저 찜을 하던가 해야지 이대로 가다간····”
“이상한 소리 그만해!”
아린은 끝내 귀를 틀어막았다·
루나브는 아린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크르르····”
순간 전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이들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하고 몸을 움츠렸으며 바로 대응 태세를 취했다·
“물러서십시오 황녀님!”
레시무스에 이어 기사들이 달려와 아린을 보호하였고 일을 돕던 세트와 슈르츠는 함께 달려왔다·
순방단은 일제히 숨을 죽이며 사주를 경계했다·
해는 어느샌가 다 져버린 탓에 주변엔 까만 저녁 장막이 내려앉았다·
-타닥
잠시후 들려오는 정체 모를 무언가의 발소리·
네발 달린 짐승의 발소리처럼 들렸는데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못해도 셋 이상·
발소리가 이어질수록 그 수는 점차 증가하였다·
“뭔가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는데?”
소리가 들린 곳을 지그시 쳐다보던 세트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울음소리입니다·”
슈르츠 역시 불안감을 내비치며 앞으로 검을 들이밀었다·
“설마?”
모두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당황해하는 순간 아린은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익숙한 소리 익숙한 분위기 익숙한 감흥·
아린은 이내 검을 뽑으며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마수야!”
외침과 동시에 전방에서 붉은 눈동자를 일렁이는 네발 달린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마주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했다·
저건 이 땅의 생물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땅에 존재해선 안 될 생물이다·
전선 순방 경험이 있는 일부 기사들은 이 상황을 믿지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헤 헬하운드?”
마수 헬하운드·
머릿속에 든 거라곤 광기와 살기밖에 없는 마계의 포악한 포식자가 전선도 아닌 엄연한 인간의 영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크르르····”
우와 뭘까?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느낌 거기에 이놈들이 왜 여기 있을까 싶은 의문이 더해져 뭔가 딱 잘라 설명하기 힘든 굉장히 모호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뭐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들과 마주친 것이 절대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나는 혹시나 싶어 주변의 쭉 둘러보았다·
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없다·
그 말은 즉 당장에 보이는 마수들은 이 헬하운드들이 전부라는 것·
그렇담 저쪽에 있는 순방단 기사들이 처리하기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컹!”
놈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대로 나를 향해 돌진했다·
-쐐액!
기분 탓일 수 있지만 왠지 전선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포악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 그래 봐야 어차피 휙 하고 휘두르면 픽 하고 쓰러질 하급 마수라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헬하운드들은 달려 든지 3초도 안 돼서 바로 사지가 찢긴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바로 태우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얘들 주거지 옮기기라도 했다니?]
케이람도 의문을 느낀 듯 조금은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대답과 동시에 손가락으로 놈들의 신체 일부분을 가리켰다·
“목과 다리 부분의 털들이 죄다 부자연스럽게 뭉쳐져 있어· 사슬이나 쇠고랑 같은 거로 구속되어 있던 거야·”
즉 놈들은 협곡에서 자의적으로 넘어온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임의로 이 주변에 풀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무슨 이유로 마수들을 잡아다 이런 곳에 풀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지금 주목해야 할 건 ‘왜’가 아닌 ‘누가’ 했냐는 것이다·
당장의 가능성을 고려해봤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할 이들은 전선의 기사들 밖에 없을 터·
대체 벨리아스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