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황녀의 순방 (1)
“저 왔어요 마리안님!”
시안과의 만남을 끝낸 엘리스는 마리안과 약속한 장소로 돌아왔다·
이에 먼저 기다리고 있던 마리안이 그녀를 맞이해주며 물었다·
“동생하고는 잘 만나고 왔니?”
“네! 어찌나 좋았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그동안의 못다 한 교감을 나누고 온 엘리스의 얼굴은 이전보다 한층 더 밝아져 있었다·
“잘 만났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그래서 이제는 어떡할 생각이니?”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할 일을 하기로 했어요· 시안과 이야기도 나눴으니 이제는 제 할 일을 하러 가야죠·”
“알겠다·”
엘리스의 말을 이해한 듯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바로 오색 빛의 광채가 발하였으며 곧 인간이 아닌 드래곤 본연의 몸으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 날카롭고 탄탄한 몸체에 엘리스는 자연스레 올라탔고 마리안은 순백의 날개를 성스럽게 펼치며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식당에서 하스티아를 봤어요! 시안에게 듣기론 여러 사정으로 인해 함께 있게 됐다고 하던걸요?”
“안 그래도 나 역시 지금 그 아이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제 동생이지만 참 신기하네요· 무뚝뚝하고 세심함이란 요만큼도 없는 아이인데 은근 인기가 많다니까요· 그래서 더욱 안심했어요· 생각보다 시안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그래· 웬 이상한 요물도 달고 다니더구나·”
“요물이요?”
엘리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다· 저대로 가만히 잘 있기만 한다면 딱히 문제는 없겠지· 다만····”
마리안은 새파란 안광이 새어나오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조금 전 하스티아와 보았던 나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네 동생 잘 지켜야 할 거다·”
“···?”
“제어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저 폭주할 요물을 막을 수 있는 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
마리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두 여인은 새벽의 푸른 장막 사이를 날아들며 전선으로의 비행길에 올랐다·
* * *
누나는 머지않아 곧 다시 만날 거란 말과 함께 내 곁을 바로 떠났다·
그녀에게서 느낀 힘의 정체에 대해선 딱히 묻지 않았다·
나도 날 말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녀에게 뭘 따질 입장은 안 될 것 같으니·
때로는 말을 해서 아는 것보다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서로를 믿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새벽의 장막이 걷히고 둥근 해가 떠오른 아침·
싱숭생숭한 마음도 정리할 겸 홀로 고독하게 아침이나 먹을까 싶어 혼자 식당에 왔건만
식당 앞에 사열한 기사들을 보고선 식욕이 싹 가셔버렸다·
그 중심엔 밤을 꼴딱 새운 듯 얼굴이 다소 초췌해진 아린 황녀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말없이 서신 하나를 건넸다·
베르트 가문의 문장이 찍힌 벨리아스에서 온 서신이었다·
마계 정벌을 위한 지원군 요청·
이것은 요청이라는 이름의 황실을 향한 선전포고와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황실을 향한 베르트 공작의 선전포고와 다르지 않았다·
황제의 지시하에 제국과 대륙을 수호한다는 숭고한 일념으로 마수의 침공을 저지하는 것이 바로 베르트 가문의 이념이다·
즉 공작에겐 자의로 마계 정벌을 단행할 수 있는 권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베르트 공작이
아직 제국 내부의 혼란도 진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황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멋대로 마계 정벌을 단행하려 한다고?
이건 황실을 비롯해 제국을 능멸한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이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절대 공작의 뜻이 아니라고·
“제게 이걸 직접 보여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읽은 서신을 다시 황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너의 의중을 묻고 싶어서야· 그 서신 정말로 네 아버지께서 보내셨다고 생각하니?”
황녀의 눈빛을 보아하니 그녀 역시 이 서신엔 베르트 공작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어느 정도는 추측한 듯했다·
“아바마마께서도 여러 번 말씀하셨어· 베르트 공작은 그 누구보다 대륙의 평화가 존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그건 곁에서 보고 자란 네가 더 잘 알겠지····”
나는 침묵으로 수긍했다·
혹여 정말로 지원군이 필요한 상황이 아닐 수 있냐 물을 수 있는데 서신에 적힌 네 글자만 봐도 그 진의를 알 수 있다·
마계 정벌·
아버지는 절대 정벌이나 전쟁이라고 하는 무력 투쟁을 원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앞장서 그 행위를 막으려 할 사람이지·
감히 단언컨대 이 대륙에 혼돈의 바람이 부는 것을 그 누구보다 싫어할 것이다·
“에쉘 공 아니 에쉘 베트르로 추측되는 남자가 벨리아스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알고 있었니?”
“예·”
“그럼 이야기가 더 쉽겠네· 난 이 서신 베르트 공작님이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너랑 내가 그날 두 눈으로 직접 봤잖아· 그 사람에게 어떤 힘이 있었는지····”
황녀는 비장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성검의 힘을 기사들에게 전승해 마음대로 조종하고 병상에 누워있던 아바마마를 강제로 일으켜 검을 휘두르게 했던 남자야· 비올렛 언니도 말씀하셨어· 그 남자가 가진 현혹의 힘을 조심하라고····”
현혹의 힘·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전생의 나는 무슨 이유로 인해 그에게 전부를 바쳤던 말인가?
나뿐만이 아니다·
그와 인연이 닿고 손길을 거쳐 간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를 호전적으로 대하거나 더 나아가선 찬양도 서슴지 않았다·
왜? 어째서?
단순히 그의 언변과 능력이 좋아서?
아니다·
그냥 그의 곁에 있었을 때만큼은 그를 따르지 않으면 나 스스로가 절대 편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마치 그 남자가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그런 감정이 생겨난 이유가 정말 아린 황녀의 말대로 근원 모를 어떤 일련의 힘이 작용한 거라면
그를 위해 살라고 했던 아버지의 당부도 어느 정돈 이해할 수 있겠지·
물론 이해한다 해서 용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해서 황녀님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설사 이 서신에 베르트 공작이 아닌 다른 사람이 뜻이 담겼다고 하더라도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너무 뜬금없지 않아? 갑자기 마계 정벌이라니? 우리 우시프 제국은 개국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마계 정벌에 대해 논한 적이 없었어· 이건 분명 마계 정벌을 빌미로 무언가를 끌어내겠단 뜻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나도 모르겠어· 그래서 황실의 이름으로 직접 확인해 보러 갈 생각이야·”
황실의 이름을 통해 직접 확인한다·
그 말의 의미는 곧
“전선으로 순방을 나설 생각이십니까?”
황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호위 기사단 선별도 다 마친 상황이야· 하지만 단순히 기사들만 대동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그래서 조금 특별한 수행원들을 모집하려 해·”
아린 황녀는 곧 뒤에 있는 레시무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에 레시무스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보석함을 갖고 와 내게 건넸다·
“열어 봐·”
나는 황녀의 말에 따라 바로 함을 열었다·
함 속의 물건은 내게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금빛 문장에 양쪽으로 검이 교차한 작은 브로치·
황실의 일을 돕는 수행원을 상징하는 일종의 증표였다·
“제게 수행원이 되어달라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건 황실의 일을 넘어 너의 집안의 일과 관련된 거잖아· 즉 우리가 충분히 손을 잡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난 생각해·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네게 정중하게 제안하고 싶어·”
황녀는 함 속의 브로치를 손수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지체할 것이 그녀의 눈을 보며 바로 되물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뭐든지·”
“황녀님이 원하시는 수행원은 베르트 공작가의 자제입니까? 아니면··· 미스트의 암살자입니까?”
황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5초 정도 뜸을 들였다·
“그 선택에 따라서 내가 바뀌는 게 있을까?”
“별거 없습니다· 그저 제가 황녀님의 곁에서 황녀님을 지킬지 아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황녀님을 지키게 될지 그 위치가 달라질 뿐입니다·”
“그렇구나·”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 황녀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내 곁에 있는 것도 좋지만 난 솔직한 너의 모습을 원해· 그러니····”
“후자 쪽을 원하십니까?”
황녀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에 나 또한 말없이 그녀가 건넨 브로치를 받아들였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이틀 뒤야· 혹시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할까?”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벨리아스에서 보자·”
목적을 달성한 황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나가려나 싶다가도
“아 참고로 이번 순방에 참여하는 수행원은 너 혼자가 아니야·”
“누가 더 있습니까?”
“응· 루나브도 함께하기로 했어·”
의문을 느낀 나는 자연스레 미간이 좁혀졌다·
“제국의 일에 굳이 타국의 인사까지 낄 필요가 있습니까?”
“너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정중하게 제안했어· 너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니까 고민 없이 바로 따라가겠다고 하던걸?”
그러고도 남을 후배님인 만큼 별로 놀랍진 않았다·
“아 그리고 한 명 더 데려올 수도 있다고 했어·”
“또 누굴 말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나중에 직접 보면 알게 될 거라 하더라고· 너는 몰라도 그 사람은 되게 좋아할 거래·”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강한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몰라도 나를 되게 좋아할 사람?
그런 사람이 있었나?
대체 누굴까 싶어 머리를 빠르게 굴려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누군가가 떠오르진 않았다·
* * *
“이제와 다시 여쭙는 것도 그렇지만 정말로 가실 겁니까?”
“황녀님과 약속까지 한 마당에 이제는 무를 수도 없으니 가야겠죠·”
“하 하지만 전선이란 곳은····”
슈르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해 침만 꿀꺽 삼켰다·
“직접 가본 적은 있지만 그래도 연이 없는 곳은 아니에요· 과거엔 전선에 상주한 내통원을 통해 비밀리에 공급받은 마수의 피로 연구를 한 적도 있었으니까·”
루나브의 눈엔 불안함보단 기대심이 역력해 있었다·
“굳이 시안 선배 때문에 가는 건 아니에요· 이번 일엔 제 개인적은 탐구욕이 더 크게 반영되어 있어요·”
성서 히스크레아는 루나브를 보며 말했다·
그녀에게서 탐구자의 냄새가 난다고·
배움을 염원하고 진리를 갈구하려 하는 그런 탐구자의 냄새 말이다·
루나브로서도 딱히 부정할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미지의 무언가를 탐구하고픈 욕망 재미·
그녀에게 있어 전선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개척지와 같았다·
더불어 전선 너머 소위 마족이라고 이종족들이 사는 세계를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그만큼의 위험성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니 저희를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바보 아니 지원군을 데려가면 좋겠죠·”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마침내 도착한 세벨리너스의 동쪽 경계·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됐을 텐데····”
혹여 먼저 도착해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건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려는 순간
“아 글쎄 나 수상한 사람 아니라니까!!”
억울함이 한가득 담긴 한 남성의 성난 외침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음을 인지한 루나브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진짜 변한 게 없네요· 저 선배도····”
멀리서 봐도 우람하고 탄탄한 근육이 돋보이는 거구의 남자·
그는 황성이 떠나갈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경계문의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 왕자라고 왕자! 스파니아의 1왕자 세트 샤하르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