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신념과 의문 (1)
뒤죽박죽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
허나 현재 사람들의 머릿속엔 공통으로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지금 저 금빛의 검을 든 기사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황제의 명령을 따른다는 명분으로 움직이고 있긴 하나 그들의 눈에는 자아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기사들은 나은 편이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이는 단연 황제·
저 듬직하고 우람한 자태를 보라·
어느 누가 오늘 아침까지 병상에 누워있던 병든 황제라고 보겠는가?
이래서야 마치 어떤 미지의 힘에 조종당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의 저런 상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황제 폐하의 명이잖아! 당장 가서 지원을 해야 한다고!”
“그 그렇긴 하지만····”
일부 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 눈치만 보며 여러 의문만 내비치고 있었다·
이에 상황을 지켜보던 제레온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네들의 검엔 빛이 없군·”
성검의 힘을 전승받은 기사들은 대부분 구원의 기사 혹은 실력을 검증받은 황군 소속의 베테랑 기사들이었다·
힘을 받지 못한 기사들은 달리 말해 받은 이들에 비해 전력이 한참 못 미치는 일반 기사들이었다·
성검의 힘을 발현 중인 이들은 비단 황군과 구원의 기사만이 아니었다·
“어 어서 돌아와라 제이크!”
“무슨 일이냐 바머! 왜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야?”
“당장 내 앞으로 달려오란 말이다 마리넬!”
아우성치다 못해 고성을 내지르는 일부 귀족들·
현장엔 회담을 위해 귀족들과 동행한 개인 수호 기사들까지 암살자들을 처단하겠다며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황제의 명보다 주군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라야 하는 기사들이었다·
주군의 말이라면 죽고 못 살아야 할 기사가 자신들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으니 귀족들로선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물론 그 기사들의 검에도 성검의 빛이 쨍쨍하게 발현되고 있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이내 암살자와 혈전을 벌이고 있던 한 구원의 기사가 머뭇거리는 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우리는 이 땅의 악을 정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구원의 기사다!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방해하는 저 불순분자들을 당장 토벌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에 질세라 황군 소속의 기사도 목소리를 냈다·
“황제 폐하의 명이 떨어졌다! 그대들은 왜 망설이고 있는 것이야!”
“하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것에 의문을 품지 마라! 우린 그저 황제 폐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굳은 신념을 가지고 검을 들어라 기사들이여!”
그 말에 감격했는지 한참을 망설였던 일부 기사들이 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허나 그런 모습마저 제레온에겐 거북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대들이 말한 신념의 힘이란 게 이걸 말한 것이었나?”
어떠한 의문이나 의심도 없는 무조건적인 복종·
이래서야 인형과 다를 바가 뭐 있겠는가?
이런 건 절대 올바른 질서라고 할 수 없었다·
“제레온님 저희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상황을 듣고 달려온 부하들이 그에게 지시를 요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부하들을 비롯해 지금 상황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함부로 나서지 않는 기사들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에 제레온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실험을 하나 해보도록 하지·”
난데없는 실험이란 말에 기사들의 의문을 표했다·
“강요는 하지 않겠네· 허나 난 지금부터 저 암살자들에게 다가가 저들과 함께 싸울 예정이라네· 마음이 있는 자들만 나를 따라주게나·”
기사들은 질색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암살자들과 함께 싸우다니요? 왜 그런 일을····”
“지금 자네의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그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랄까?”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사는 눈을 번뜩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념이 아닌 의문이라네· 우리가 저 암살자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저 암살자들이 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 그 의문을 계속해서 던진다면····”
제레온은 굳은 눈빛으로 검을 빼 들었다·
“이 상황에 대한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지·”
그의 눈엔 수십 년간 묵혀왔던 하나의 의문을 이 자리에서 해결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 * *
성검의 힘을 한껏 발산하며 암살자들을 상대하는 기사들
시안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에쉘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 누가 저 치열한 경합에 끼고 싶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저 영역은 절대 끼어들 수 없다는 걸 아는 만큼 아린은 시선을 돌려 자신이 상대해야 할 대상을 마주하였다·
“····”
흐트러짐 없는 근엄한 시선으로 아린을 마주하고 있는 디오네 황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검을 잡은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져야만 하는 걸까?
세상의 그 많은 이들을 놔두고 가장 친애하고 존경하는 황제이자 아버지에게 검을 겨누어야 한다니
아린으로선 이런 비극도 없었다·
그 미련한 마음을 잊으려는 듯 아린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분명 스스로의 힘이 아닌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주입한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터·
더 무리가 오기 전에 진정시켜야 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현재 자신밖에 없음을
아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뒤를 봐줘 레시무스!”
“알겠습니다 황녀님!”
아린은 힘찬 기합을 지르며 바로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챙!
망설임 하나 없는 진심이 담긴 일격이었지만 황제는 아무런 무리 없이 막아냈다·
생각보다 더 묵직한 느낌에 잠시 당황했지만 아린은 쉬지 않고 바로 연격을 가했다·
-챙! 챙!
레시무스까지 합세하며 호흡이 척척 맞는 맹렬한 기세를 보여주었지만
“····”
황제는 발 한 번 떼지 않고 그녀들의 일격을 모두 쳐냈다·
마법이나 성검의 힘 같은 게 아니었다·
이것은 순수하게 황제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힘·
단순한 검술만으로도 2대1이라는 불합리한 전투를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황제는 애초부터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아린?”
잠시 거리를 벌린 그녀들을 향해 황제가 입을 열고 물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병상에 누워계셨던 아바마마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힘을 숨긴 게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겁니까?”
“힘이 없다면 수명을 깎아서라도 쥐어짜야 하는 것이 황제의 숙명이다·”
황제의 대답은 실로 단호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제국이 더 나아가 대륙까지 큰 혼돈에 휩싸일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난 일어설 수밖에 없다· 설령····”
황제는 검을 들지 않은 반대쪽 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필사적인 제어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극명한 떨림·
분명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증상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허나 황제는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듯 주먹을 굳게 다잡았다·
아린은 그런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격렬히 호소했다·
“아바마마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들은 대륙에 혼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무엇이 진리인지는 좀 더 두고 보고 판단하셔도····”
“내겐 그럴 시간이 없다· 아린·”
돌아온 것은 황제의 무심한 대답이었다·
“황제로서 이 제국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이 내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제는 변함없는 굳은 눈빛으로 아린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니 나를 설득하려 들지 마라· 그래도 네 신념이 옳다는 것을 정 보이고 싶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를 쓰러트려라 아린!”
“···!”
“나를 쓰러트리고 이 자리를 네가 대신할 수 있겠느냐?”
아린은 차마 그럴 수 있다는 답을 하지 못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신념은 어쭙잖은 고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론 절대 황제가 될 수 없다!”
자리를 박찬 황제는 곧 아린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였다·
아린은 방어하기 위해 급히 자세를 잡았지만
-깡!
황제의 무시무시한 근력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그대로 몸이 튕기고 말았다·
“황녀님!”
레시무스가 황급히 달려가 황제의 검을 대신 받아쳤다
아린은 공중에서 몸이 두 바퀴 돌며 바닥에 엎어졌지만 지체하지 않고 바로 일어났다·
‘아바마마께선 대체···?’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시안을 돕는 것은 결국 황실과 제국의 뜻에 반하는 일·
즉 그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아린은 증명해야 했다·
어설픈 설득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실천을 통해서·
황제란 자고로 사소한 것 하나도 허투루 생각해선 안 되기에
항상 모든 것을 감당하고 희생할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황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건
그야말로 같잖은 객기에 불과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아린은 재차 황제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아바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신념은 고집에 불과하지요! 그러니 보여드리겠습니다! 저의 준비된 신념을!”
시안을 보고 달려온 지난 7년간의 노력·
그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아린은 성검의 힘이 아닌 내면에 잠든 본연의 마나를 전부 끌어냈다·
-기이잉
곧 마나에 반응한 검에서 은빛 오라가 일렁였다·
시안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시안을 구원하고픈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황제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달려온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 각오를 이제 황제 앞에서 증명할 시간·
준비를 마친 아린은 바로 황제에게 질주했다·
“····”
황제 또한 잠시 억눌렀던 성검의 힘을 발현하며 방어할 준비를 마쳤다·
가만히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간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오직 시안만이 아린에게 황제가 되어보라며 처음으로 길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상관없이
아린은 처음으로 생긴 목표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황제는 그런 아린을 기특하게 여기며 무리하지는 말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듣기 좋은 조언에 불과할 뿐·
황제는 이제 조언이 아닌 황제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갖춰야 할 가혹한 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만약 그 준비가 조금이라도 되어있지 않다면 지금 그녀가 휘두르는 검은 황제에게 닿지도 못한 채 뿌리쳐지고 말 터·
그것을 그녀 스스로도 알기에
아린을 끌어낼 수 있는 자신의 모든 걸 담아 황제에게 검을 휘둘렀다·
-챙!
청아한 파열음과 함께 한 자루의 검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검은 이내 힘없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으며 밝게 빛났던 광채는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하아 하아····”
모든 힘을 토해낸 아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살짝 건들면 바로 쓰러질 만큼 아슬아슬한 상태였지만 정신력을 발휘하며 필사적으로 버텨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리는 거라곤 그녀의 힘겨운 숨소리뿐·
이에 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처음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
허나 그의 손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아린의 손엔 아직도 선명한 마력이 발하고 있는 은빛의 검이 쥐여있었다·
쳐낸 것이다·
황제의 검을·
황제가 되고자 하는 그녀의 각오를 황제에게 증명한 것이다·
일직선을 그리던 황제의 입이 마침내 반원을 그리며 열렸다·
“잘했다· 아린·”
다른 어떠한 말도 필요하지 않은 짤막한 한마디·
그 한마디를 끝으로
-풀썩
황제는 아린의 품에 힘없이 쓰러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