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황녀와 암살자 (2)
“···!”
재회의 감흥을 느낄 새도 없이 아린의 요동치던 눈동자는 곧 시안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짙은 살기를 내뿜으며 날카롭게 세워진 자줏빛 칼날·
그 검을 쥔 팔을 서서히 따라 마침내 시안의 눈동자에 이른 순간
아린은 깨달았다·
지금 시안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물러서십시오 황녀님!”
레시무스 또한 이를 눈치채고선 아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검을 뽑은 동시에 다른 손으로 발현한 마나를 바로 검에 전승시켰다·
불과 1초 남짓한 시간에·
-우우웅
마나에 반응한 검이 공명을 일으키면서 푸른 오라가 생성되었다·
그녀 역시 눈앞의 남자가 시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가 아닌 미스트의 암살자 시안 베르트와의 첫 만남·
악마와 눈을 마주쳐도 이 정도로 떨리진 않을 것이다·
칼날 같은 가득 맺힌 독기와 살기·
조금이라도 정신을 잃었다간 그 기운에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레시무스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은 황녀를 지키는 수호의 검·
마주 선 자가 악마가 아닌 마왕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지켜야만 했다·
-저벅
장검으로부터 뿜어지는 강한 마력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걸음을 내디뎠다·
“더 이상 다가오면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응하겠습니다!”
레시무스는 단호하게 소리치며 경고를 던졌지만 시안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레시무스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가 짧고 간결한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후웅
불필요한 움직임을 모두 없앤 오로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최선의 동선·
반격의 틈조차 보이지 않을 그야말로 완벽한 동작이었지만
-챙!
시안은 너무나도 간단히 그녀의 검을 막아버렸다·
이미 동선을 다 예측했다는 듯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하압!”
허나 레시무스는 당황하지 않고 기합을 지르며 더욱 강한 힘을 끌어냈다·
무력과 마력이 더해진 그녀의 검은 시안의 단검을 서서히 밀어냈으며 그녀에게 있어 좀 더 유리한 자세를 만들어냈다·
“····”
무감각했던 시안의 눈도 그제야 반응이 일어났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힘에 조금 놀란 듯 시선이 돌아가긴 했으나 그것도 잠시일 뿐·
“···!”
레시무스의 검이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챙!
이에 레시무스는 순간적으로 발을 틀어 자세를 바꿔버렸고 밀려오는 시안의 검을 다른 쪽으로 보내버렸다·
그러곤 연격을 못하도록 재빨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하아 하아····”
겨우 몇 초 남짓의 짧은 한 합이었지만 레시무스는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머지않아 깨달았다·
방금 전 시안은 자신을 봐준 것이라고·
그녀가 자세를 바꿨을 때만 해도 그에겐 분명 연격의 여지가 있었다·
검을 틀어낸 순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검의 방향을 바꾼 것이 그 증거였다·
레시무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시안은 우려와 다르게 검을 휘두르지 않았고 이렇게 거리를 벌리는 것까지 손쉽게 허용해주었다·
그것이 기만인지는 배려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막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절대 정상적인 방법으론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레시무스는 아린을 살짝 돌아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황녀님! 제가 시간을 벌 터이니 밖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무슨 말이야 레시무스?”
“애석하게도 제힘으론 아직 저 남자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붙들면서 시간을 끌어볼 터이니 절 믿고 도망가주십시오!”
아린으로선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레시무스가 자신을 지키는 기사라고 한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려 하는 그녀를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허나 지금의 아린에겐 그런 고민의 시간조차 사치에 불과했다·
“하압!”
시안이 한 걸음을 더 내디딘 순간 레시무스는 고민 없이 달려가 그의 이동을 저지하였다·
“····”
시안은 그 일격조차 아무 어려움 없이 막아냈다·
그의 시선은 레시무스가 아닌 온전히 아린에게 향해 있었다·
“네 기사의 말대로 하거라·”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쿤델 또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안일했던 생각이 너희에게 그만 화를 일으키고 말았구나· 저놈의 성격상 나나 네 기사를 죽일 것 같진 않지만····”
쿤델은 시안의 붉어진 눈동자의 가득 서린 부정적인 감정들을 발견한 순간
“너만큼은 확실히 죽이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자연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바로 손을 올려 아린이 들어온 문 쪽을 가리켰다·
“결계를 잠시 풀어주겠다· 얼른 나가서 영지의 기사들에게 내 이름을 대고 도움을 요청해라· 그렇게만 하면 저 녀석도 더 저지르려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총장님께선!”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닌 바로 너다· 아린 황녀····”
쿤델은 단호한 대답에 아린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시안과 그를 저지하려는 레시무스와 쿤델·
그런 상황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가는 일밖엔 없는 나약한 황녀·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최악의 상황이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아린은 재빨리 문으로 뛰쳐나갔다·
밤이 찾아온 거리에 기사는커녕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선 기사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할 터 당장에 생각난 곳은 훈련와 영주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둘 다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이라 한다면
“성문!”
경비병들의 위병소가 자리한 성문이었다·
그곳이라면 아직 보초를 서고 있는 기사들이 있을 터·
아린은 황급히 해당 방향을 향해 질주했다·
머지않아 성벽과 함께 보초를 서고 있는 소수의 기사들이 보였다·
안도의 마음과 함께 계속 달리려던 순간
아린의 두 발이 대뜸 제자리에 뚝 하고 멈춰버렸다·
이것이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인가?
위기의 상황에 이렇게 꼴사납게 도망치기 위해 자신은 지난 7년을 그리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황녀라는 직책이 결코 부끄럽지 않도록
주어진 모든 일에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나아가겠다고 한 자신이 어찌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다시금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아린은 허리춤에 꽂힌 황실의 검을 당당히 움켜쥐었다·
강인한 마음으로 정신을 굳게 무장한 채 다시금 몸을 돌린 순간
“···!”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레시무스와 검을 맞대고 있던 시안이
겨우 열보 남짓한 거리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를 막겠다고 했던 레시무스와 쿤델은 어찌 된 것일까?
설마 그들마저도 기어이 죽이고 자신에게 온 거라면?
불안한 시선으로 검을 뽑은 아린은 그 끝을 시안에게 겨누며 물었다·
“레시무스와 총장님은··· 어떻게 했어?”
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 네 스승 같은 분이셨고 네가 구원해준 사람이었잖아· 그런 사람들을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이 죽인 거야?”
“그딴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란 걸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듣다 듣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감정이 역력한 말투·
무려 7년 만에 내뱉은 그녀를 향한 첫 마디였다·
“몇 초였습니다·”
“···?”
“몇 초만 더 뛰어갔으면 성문의 기사들이 황녀님을 발견했을 겁니다· 그럼 즉각 달려와 황녀님을 호위했겠죠· 그렇게만 되었어도 전 마음을 접고 물러났을 겁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시안의 첫 마디를 들은 순간부터 아린의 입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나마 이성을 되찾은 제가 귀찮은 일에 휘둘리기 싫어 마음을 접었다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황녀님을 못 죽인다는 게 아닙니다· 설사 황녀님이 아퀴젤에 있는 모든 기사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전 황녀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시안의 말은 허풍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완벽한 사실이었다·
그걸 아린도 모르진 않았다·
“한데 살 기회가 있었음에도 황녀님께선 망설이셨더군요·”
“망설인 게 아니야! 난 단지···!”
“전 분명 황녀님께 나아가라 했습니다!!!”
감정이 폭발해버린 시안은 기어이 아린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기를 바랐습니다! 분명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나약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잊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시안의 눈엔 이제 분노를 넘어 허탈함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황녀님께선 그걸 잊으신 모양입니다····”
잊지 않았다·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말을 잊지 않고 실천하기 위해 살아온 것이 지난 7년이다·
아린으로선 무척 억울할 일이었다·
“황녀님께서 했어야 할 일은 제게 맞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안은 다시금 아린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처량하게 도망치는 것·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황녀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습니다·”
허나 그 최선의 행동마저 하지 않은 그녀에게 닥쳐올 것은
매정한 죽음밖에 없었다·
시안은 천천히 아린을 향해 계속해서 다가갔다·
아직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미련한 황녀에게 이 이상 미래를 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 자리에서 그 복잡한 삶의 굴레를 잘라주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최선일 것이라고
시안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그래? 내가 했어야 할 일이 도망치는 일이라고?”
아린은 이를 부정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은 널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일이야!”
오히려 검을 쥔 자세를 고치는 등 시안에게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대응에 시안의 발이 멈춰버렸다·
“왜 못 할 것 같아? 불가능할 것 같니?”
힘이 없는 자의 같잖은 객기가 아니었다·
아린의 눈빛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반드시 그러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서려 있었다·
“미안한데 시안· 난 지난 7년간의 삶이 불가능함 그 자체였어·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넌 절대 모를 거야·”
평소라면 분명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와야 할 상황인데·
어째서인지 시안은 그러지 못했다·
이 미련한 황녀가 기어이 정신이 나간 건가 싶다가도 믿고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싶어 괜스레 불안감마저 피어올랐다·
아린은 그런 당황한 시안을 보며 당당히 말했다·
“우시프 제국의 5황녀 아린 세벨러스의 이름으로 명한다·”
“···?”
“대륙의 수호자 베르트 공작가의 자제 시안 베르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무릎을 꿇고 투항해라!”
10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아린은 굴복하라는 명령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미칠 듯이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시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어이 미치신 겁니까?”
시안은 의문과 더불어 경멸에 찬 시선으로 물었다·
“그래 미치기라도 해야 널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어· 미치지 않았고 지금까진 한 말은 다 진심이야·”
아린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답했다·
“제가 아직도 귀족의 탈을 쓴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로 보이십니까?”
“넌 아직도 내가 황실의 탈을 쓴 껍데기 같은 황녀로 보이니?”
시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쭙잖게 가르치려 하지 말고 그냥 네가 하려던 일 해· 난 맞설 준비가 돼 있으니까····”
시안의 앞엔 더 이상 7년 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능한 황녀가 자리하지 않았다·
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아린 세벨러스라는 이름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