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황녀와 암살자 (1)
사람 천성은 나이 먹어도 안 변한다고 했던가?
어디 공기 좋은데 앉아 여생을 보내셔야 할 분이 아직도 교직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로열 아카데미 같은 거대한 곳이 아닌 열 명 남짓의 소교실이라곤 하나 본인이 원해서 하는 거라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뭐 그렇기에 내가 찾아온 것도 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웃기는구나· 네놈은 내가 이 책의 저자를 왜 알 거라 생각한 것이냐?”
“확신하고 온 건 아닙니다· 다만 총장님께선 아카데미를 거쳐 간 모든 학생을 기억할 만큼 관찰력이 뛰어난 분이시지 않습니까? 혹시나 스쳐 지나간 사람 중엔 있진 않을까 싶어 온 겁니다·”
“능구렁이 같은 면모는 여전하구나·”
총장은 전혀 바뀐 게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꼭 그 책의 저자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냥 하펜커스라는 이름에 대해 아시는 게 있다면 다 말씀해주시지요·”
“그래· 딱 한 명 있었다· 하펜커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카데미의 학생이····”
인생사에 있어 헛걸음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을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네놈이 자퇴서를 냈던 그쯤이었을 거다· 평민 출신의 명예 귀족 신분이었지 아마? 정규 신입생이 아닌 특수 전학 절차를 통해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름이 뭐였습니까?”
“미아 하펜커스·”
나로선 당연히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네놈이 자퇴서를 던지고 얼마 안 가 나도 총장직을 내려놨는데 나로선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다·”
총장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불쾌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뭐 관련된 이름이라도 알았으니 아예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다만
“졸업은 했답니까?”
“글쎄 난 모른다니까 그러네? 정 궁금하면 네가 아카데미로 가서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 뭐 사트웰이 알았다고 순순히 내어줄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별로 귀엽지도 않은 제자를 위해 내 굳이 힘을 써주고 싶진 않구나·”
장담하는데 저거 나 놀리려고 한 말이다·
힘을 쓰는 거야 애초에 기대도 안 했으니 그냥 넘어간다 치고
결국 단서를 더 찾기 위해선 아카데미로 가야 한다는 건데
어지간히 또 귀찮아지게 생겼군·
여차하면 브라이언한테····
“한데 찾아오는 순서가 좀 잘못된 건 아닌가 싶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네놈이 알고 싶었던 건 결국 디오 하펜커스라고 하는 이 책의 저자인 것 같은데 그럼 나보다도 이 책을 배포한 당사자를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 거 아니냐?”
“····”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골방에 틀어 앉아 애들이나 가르치는 늙은이도 아는 사실을 대륙 제일의 살수 집단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확실하지 않은 정보 찾자고 마수 굴에 들어갈 순 없지 않습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한 거였지만
“말은 잘하는 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또 뭘 말입니까?”
“아린 그 아이 지금 이 도시에 있다·”
“···!”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움찔했다·
“아까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걸 봤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공적인 일이 있어 오진 않은 것 같더구나· 늘 함께 다니던 기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함께 다니는 기사라 하면 더 볼 것도 없이 레시무스다·
정말 미련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고작 수호 기사 한 명만 데리고 아퀴젤에?
지금 주변에 있는 수백 개의 칼날이 언제 본인을 노릴지도 모르는 마당에 정말 팔자 좋은 황녀님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봐야 하는 법이지· 하다 하다 황실에서 안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이리 힘 써줄 줄 누가 알았겠느냐? 네게는 지금이 기회 아니더냐? 아직 멀리 가진 않았을 터이니 직접 가서 물어보거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한 건지····”
권유가 아닌 강요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허나 틀린 말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디오 하펜커스라는 책의 저자에 대해 알고 싶었으면 당연히 그 책을 전파한 사람을 찾아가야겠지·
게다가 그 사람이 지금 엄청나게 가까운 곳에 있다는 데
나로선 안 찾아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저벅저벅
지면을 타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문 너머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다·
묵직한 남자의 발걸음이 아닌 조신하면서도 당당한 여인의 발걸음·
아직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미지의 발소리지만
“···!”
어째서인지 심장이 두근거리며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마치 발걸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몸이 일깨워주는 것처럼
나에게 있어 마주치면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똑똑
잠시 후 걸음은 문 앞에 멈춰 섰으며 문을 똑똑 두드렸다·
“계세요 총장님?”
* * *
특별한 일이 없다면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늦은 시간·
이런 때 찾아오는 것 자체가 실례인 줄은 알면서도 아린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계세요 총장님?”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어봤지만 넘어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람이 없는 것 같진 않았다·
문 너머로부터 분명 미약한 온기와 인기척이 느껴지는 만큼 한 번 더 두들겨보려는 순간
“들어오거라·”
안에서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이에 아린은 레시무스와 함께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혀 안 놀라시네요?”
“아까 네 기사와 함께 거리를 지나다니는 걸 봤다· 놀라긴 그때 놀랐지·”
긴장한 마음을 풀어주는 유쾌한 대답에 아린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셨어요 총장님?”
“오랜만이구나· 아린·”
쿤델은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혹시 하시던 일을 제가 방해한 건 아닌가요?”
“신경 쓸 거 없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
쿤델은 본래 읽고 있던 책을 조용히 책상 아래로 집어넣었다·
“일 때문에 온 것이냐?”
“네·”
“사전에 공문도 보내지 않고 찾아온 걸로 보아 뭔가 공적인 업무를 하러 오진 않은 것 같은데 황실이 아닌 네 개인적인 일이더냐?”
“그렇다고··· 해야겠네요·”
쿤델의 추궁을 아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부정해봐야 숨겨질 일도 아니었다·
“오래 있을 시간은 없어서 그냥 바로 여쭤볼게요·”
쿤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시안이 이곳에 왔나요?”
쿤델은 대답에 앞서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짜고짜 내게서 그놈은 왜 찾는 것이냐?”
“말씀드리긴 좀 곤란한데 어쩌다 시안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지 않았다·”
세상 단호한 대답에 아린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고 싶었지만 이미 다물어진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변할 것 같으면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 했지· 그놈을 구원하고 싶다는 네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마음을 실현할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아린의 눈엔 허탈한 감정이 역력했다·
“처음엔 목검으로 바위를 부술 정도의 힘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힘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어리석었죠· 제가 바꿔야 할 불가능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닌데····”
무릇 배움이란 이전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동시에 깨닫게 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를 향한 구원이라는 목표를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지난 7년·
분명 그 시간 동안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나 이전의 자신이 얼마나 크고 허황된 꿈을 꾸었는지 아린은 여러 번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신이라도 되어야 하는 건가 싶을 만큼····
“오랜만에 와서 푸념이나 늘어놓고 정말 부끄럽네요· 다음에 학생들을 위한 선물이라도 잔뜩 들고 올게요·”
더 있진 않으려는 듯 아린은 그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레시무스와 함께 나가려는 찰나
“이제 와 묻는 것도 웃기지만····”
쿤델이 그녀를 한 번 더 붙잡았다·
“그놈을 지금 만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이냐?”
아린은 돌아서지 않은 채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잘 지냈냐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의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황녀로선 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아린은 고개를 떨굼과 동시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은
아직은 그를 만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사실 얼마나 지나야 할진 모르겠지만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그를 당당히 마주할 날을 위해
아린은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달릴 뿐이었다·
무엇이 있는지 모를 안개의 쌓인 그 길을·
“혹시 시안이 오면 저 대신 전해주세요·”
“직접 전하거라·”
“···?”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넌 지금 황녀로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직접 전하거라· 황녀가 아닌 너 아린 세벨러스로서····”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직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당황한 기색으로 되묻자
-딱!
쿤델은 어느샌가 손에서 발현해낸 마나를 손가락을 튕겨냈다·
그러자 작은 공명과 함께 그들의 주위로 투명한 마법 결계가 퍼져나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뒤에서 지켜보던 레시무스도 황급히 달려왔다·
“갑자기 결계는 왜···?”
순간 아린은 느꼈다·
공간 왼쪽 끝 모서리·
촛불의 빛이 닿지 않은 암흑의 공간·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누군가의 인기척을·
공교롭게도 그것은 낯선 인기척이 아니었다·
낯설지 않은 무척이나 익숙한
7년 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잊을 수 없던 그 기운·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던 바로 그 기운이 지금
아린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벅
선명한 발소리와 함께 이윽고 어둠 속에서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흑발에 검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남성·
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의 무심한 눈빛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시안?”
* * *
발소리 아니 노크가 울렸을 때만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마법이든 비기든 아님 그냥 창문을 깨고 나가든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어둠 속에서 숨어서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 엿들었다·
머리가 시켰다기보단 그냥 몸이 알아서 움직여줬다고나 할까?
총장은 그런 나를 눈감아주었고 내가 왔냐는 그녀의 질문에도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뭐 설마하니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 그러진 않았을 거다·
그냥 지금 같은 더 큰 판을 짜기 위한 나름의 계획이었겠지·
“···!”
나를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심히 요동치고 있다·
딱히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무덤덤하다면 그게 더 놀랄 일이겠지·
그래도 눈빛 자세 분위기 등 7년 전과 비교했을 때 꽤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는 건 인정하려한다·
제국에 도움이 되는 어엿한 황실의 일원·
지금이라면 내 입에서도 그 말이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내 알 바야?
잘 지냈냐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게 정녕 나한테 할 소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황실을 능멸하고 빛을 모욕한 대역죄인 나 시안 베트르한테?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온다·
사람의 천성은 정말 변하지 않는다던데
이 황녀의 미련함은 정말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안 변할 듯싶다·
몸 안에 오랜 시간 꺼져있던 분노의 심지가 간만에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다·
그러곤 머릿속에서 한 생각이 자연스레 피어올랐다·
어차피 곧 있으면 당주와 대원들의 손에서 죽게 될 여자인데
그냥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이면 되는 거 아니냐고·
“····”
내 손엔 머지않아 날카로운 검 첨에 살기가 한가득 모여든 추악한 마검의 본체가 쥐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