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안개의 본질 (2)
인간은 나약하면서도 적응이 참 빠른 동물이다·
뭐든 첫 시작이 어려울 뿐 한 번 적응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늘 하던 일인 것처럼 자연스러워진다·
나도 그랬지·
시련을 통과하고 암살자의 검을 처음 잡을 때만해도 내 안엔 쓸데 없는 망설임으로 가득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검을 찔러 넣은 자가 누군 줄 아는가?
바로 나였다·
시련을 통해 마주한 내가 아닌
검을 쥐고 있는 바로 나 자신·
내 안의 깃든 나약한 본성을 칼로 찌르고 피를 통해 배출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암살자의 검을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그 후엔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지·
나와 관계가 있었든 하다못해 피가 섞였든 상관없이 나는 내가 죽여야 할 모든 이들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죽였다·
나여서가 아니라 암살자라면 그래야 했으니까·
근데 이건 무슨 경우일까?
그러지 않을 거라고 할 수 있겠냐고?
당주는 정말 내가 아린 황녀를 암살하는데 조금이라도 주저할 거라 생각한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진심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제가 그 껍데기 같은 황녀를 정말로 못 죽일 거라 생각하세요?”
“99%의 확률로 죽일 수 있겠지·”
좋아할게 아니다·
100이 아닌 99는 의미가 분명하게 다르다·
그녀는 1% 확률로 내가 아린 황녀를 못 죽일 거라 생각하고 있다·
인정한다·
내게 있어서 아린 황녀는 마냥 평범한 관계는 아니다·
그녀에게 황제가 되어보라고 처음 길을 제시한 것도 나였고 황성에서 마리오네트에게 암살당할뻔한 것을 구해준 것도 나였다·
그뿐인가?
파비앙 네로비앙 황자가 내게 암살자들을 보냈을 때도 그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검과 방패를 구축하도록 일조했으며 마지막엔····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앞으로 나아가라 했지·
그래 인정해! 인정한다고!
나답지 않은 오지랖을 여러 번 부리게 한 것도 그 여자고
이따금 꿈에 나와 제발 한마디만 해달라고 간청했던 그때의 순간을 자꾸만 상기시켜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도 그 여자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그런 그녀도 내가 죽여야 할 대상이라고 인지한 순간
나는 가차 없이 죽일 자신이 있다·
여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무슨 근거로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여태 정화 작업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당주께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드린 적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 없었지· 넌 그 누구보다 암살자로서의 책무를 잘 수행해줬어·”
순간적으로 울분이 치솟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당신이 왜 날 못 믿는 건데?
“그럼 나도 하나 묻자꾸나·”
당주는 눈을 치켜세우며 내게 물었다·
“7년 전 브레누에서 넌 네 형을 왜 죽이지 않은 거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설마 이 타이밍에 당주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네 복수 대상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고통을 주기 위해서라 했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음에도 결국은 널 무너트릴 수 없다는 좌절감을 안겨주기 위해서라 했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넌 생각했겠지· 다 감당할 수 있다고· 그들이 무엇을 계획하고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지르든 간에 상관없이 넌 네 스스로가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거야·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맞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책임을 갖고 감당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를 위해 그리고 내 범주에 있는 모두를 위해·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넌 지금에 와서 알 필요가 있어·”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기분이다·
이기적? 이기적이라고?
그래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힘이 없는 자의 거창한 소신?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집이고 객기일 뿐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난 나를 지킬 수 있고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설사 내 앞을 가로막는 자가 신이라면 그 신마저 죽여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런 내가 이기적이라고?
여태 당주에게 들어왔던 잔소리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넌 전생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살아온 지금의 삶이 온전히 너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거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건 아주 큰 착각이란다 시안· 지금의 넌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 하나의 인간일 뿐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7년 전 그 악마 자식의 머릿속에도 확실히 각인시키지 않았던가?
난 그저 네놈의 본질을 알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그거 아니 시안? 인간은 작은 온정 하나 때문에 대의를 망칠 수 있을 만큼 무척 어리석은 존재라는 걸· 네가 네 스스로 인간이기를 자청한 이상 너 또한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지 않다면 절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기분 더럽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대뜸 울고 있는 아린 황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마치 당주의 예상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네가 너와 네 사람들을 위해 모두를 방관시켰던 것처럼 이번엔 우리가 너를 위해 너를 방관시킬 거다·”
복잡한 감정에 닫힌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열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초라해질 것 같으니·
“정 몸이 근질거린다면 가서 심심해하는 나나의 산책이라도 시켜주렴· 되도록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이지·”
당주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점점 더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가 끝내 저 먼 곳에서 끊길 때까지 내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때쯤 케이람이 튀어나와 지금의 내 초라한 상황을 한껏 비웃었겠지만
[····]
이제는 그럴 그녀조차 내게 나타나 주지 않았다·
“킥!”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그냥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만큼 지금의 내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거겠지·
* * *
<···이에 황실은 빛의 기사단을 해체 및 새롭게 재구성할 것을 결정· 추후 결정되는 사항은 다시 공문을 통해 각 영지에 알리겠습니다·>
<발신인: 아린 세벨러스·>
황성 도착을 코앞에 두고 받게 된 황실의 공문·
경악을 금치 못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제레온의 얼굴은 굉장히 무심했다·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임을 처음부터 예상한 사람처럼·
“왜들 그런 표정을 짓나? 우리가 이제 빛의 기사단도 아닌 마당에 기사단이 해체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제레온님께선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필요가 없어지면 뭐든 바로 버려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는가? 내가 이런 것까지 자네들에게 얘기해줘야 하나? 다들 나이를 꽁으로 먹었군·”
제레온과 비슷한 연배는 아닐지언정 그들 역시 흰 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 진 황혼의 시기였다·
“애초에 완전한 해체도 아니고 새롭게 재구성한다고 여기 쓰여 있지 않은가? 시대가 변하면 자연스레 수행해야 하는 역할도 달라지는 법이네· 빛의 기사단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을 뿐이지·”
수하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해 애먼 곳만 쳐다보았다·
“상급 마수들 앞에서도 안 떨던 자네들이 겨우 글자 몇 자에 참 우스꽝스런 표정들을 짓고 있군·”
제레온은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둘러보았다·
“이대로 황성에 가실 겁니까?”
“가야지· 가서 예전만큼의 대우는 못 받겠지만····”
예전만큼의 대우가 아닌 정반대의 대우를 당할 수도 있었다·
“보통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굳이 가봐야 좋은 꼴을 못 볼 것이기에 만류하는 차원이겠지만····”
수하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살펴본 제레온의 입가엔 이내 미소가 지어졌다·
“자네들 다 황성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로군· 가서 끝장을 보겠다는 느낌이야·”
수하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자네들을 두고 내 어찌 황성에 혼자 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뭐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가자마자 감옥에 처넣진 않겠지·”
그들의 심각했던 낯빛이 그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가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보고 오세나· 우리의 걸어왔던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이었는지 말일세·”
“단장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제는 단장이라는 부름조차 어색하게 들릴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제레온을 비롯한 수하들의 눈은 몇십 년 전 순백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서 당당히 자리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이들의 결속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그 결속은 정확히 8시간 후에 깨지고 말았다·
아침 해가 번쩍 떴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제레온에 의아함을 느낀 마크가 그의 방으로 들어간 순간
“제 제레온님?”
마크는 눈을 의심했다·
수하들과 함께 황성으로 갈 것을 약속한 제레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다녀오겠네·>
무심한 한마디가 담긴 서신 하나만을 남겨둔 채·
* * *
“안 그래도 조만간 저희가 모셔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비올렛이 그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제레온은 황녀가 건넨 차를 지그시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홀짝 들이켰다·
“설마하니 비올렛 황녀님께서 절 맞이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찾아와서 불편하신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딴에는 아린 황녀님께서 찾아올 거라 생각해 그리 말씀드린 것입니다·”
비올렛은 입을 가리며 고상하게 웃어 보였다·
“그 아이는 많이 바빠서 말입니다· 어엿한 황실의 일원이 되겠다고 매일 같이 힘을 써주고 있지요· 언니로서 여러모로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빛의 기사단의 해체 말인가요?”
“아린 황녀께서 황실의 집무를 보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퇴역하기 전만 해도 황실은 폭풍이 불어닥치기 일보 직전의 분위기였는데 설마하니 그분께서 이리 어엿하게 성장해 황녀의 역할을 수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깟 핏줄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능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옛날의 제레온 단장님처럼····”
비올렛의 의미심장한 말을 제레온은 차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제가 성문을 통과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 개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말인가요?”
“전자는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기사들에게 연행당하는 상황이었고 두 번째는··· 지금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연행이라니요? 어찌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신 겁니까?”
비올렛은 사뭇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앞선 상황이 더 낫소· 그렇게 되면 현 사태에 대한 황실의 의도가 뭔지 빤히 알게 되니 말이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얘기가 다르지요·”
“어찌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빛의 기사단의 해체를 선언한 상황에 전 빛의 기사단의 단장이 황성에 떡하니 나타났는데 황실 입장에선 좋을 게 뭐가 있겠소? 한데 그런데도 날 이렇게 친절히 대해준다는 건····”
제레온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세워졌다·
“내게서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거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비올렛 황녀님?”
그의 냉철한 물음에도 비올렛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오히려 무척 만족스러운 상황이라는 듯 보기 좋게 웃고 있었다·
“역시 제레온 단장님이군요· 냉철하십니다! 그럼 저 역시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비올렛은 제레온의 두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저희의 구원자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