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안개의 본질 (1)
우시프 제국 남부 도시 브레누에 위치한 어느 수도원·
빛이 들지 않은 칙칙한 지하 광장서 한 수도사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
“인간의 삶이 영원하지 않듯 모든 만물에 영원이란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질서도 마찬가지겠죠·”
수도사의 화려한 언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대부분의 신도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경직된 자세로 눈동자만 사방으로 굴리는 슈르츠를 제외하고선·
‘뭐야 이거? 완전 광신도 집단이 따로 없잖아?’
거리에서 우연찮게 비밀 수신호를 목격하고 이곳까지 잠입한 것까진 좋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미스트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들은 그냥 안개라고 하는 어떤 특정한 존재에 홀리거나 혹은 그러기를 유도하는 나약한 신도들일 뿐이었다·
용병 생활의 경험이 허투루 있는 게 아니다·
대충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성정을 가졌는지 유추할 수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평생 눈알 빠지게 책만 봤을 법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딱 한 사람·
그의 바로 옆에 있는 남성을 제외하고선·
“····”
사람은 본디 눈이 아닌 경험을 통해 축적한 육체적 감각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동물이다·
작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굵직한 손·
지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근육으로만 다져진 매끈한 몸·
팔뚝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선명한 핏줄까지·
사자가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해서 초식동물처럼 보이진 않는다·
슈르츠는 지금 자신의 옆에 앉은 이 남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왔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렇게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설교 시간이 끝나고
수도원을 부리나케 빠져나가는 그를 슈르츠는 재빨리 뒤쫓았다·
남자가 향한 곳은 민가가 아닌 도시의 바깥 방향이었으며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은 일절 없었다·
그렇게 잘 가는가 싶더니 대뜸 제자리에 뚝 멈춰버렸다·
그러곤 좌우를 한번 살피고선 갑자기 대로 옆 골목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슈르츠는 놓칠세라 그를 황급히 따라갔다·
남자는 모퉁이를 돌고 돌아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으며 슈르츠 또한 그의 꼬리를 놓치지 않고 악착같이 뒤따랐다·
그렇게 잘 따라가는가 싶은 순간
“···?”
돌연 남자가 사라져버렸다·
의아한 표정과 함께 뒤를 돌아본 슈르츠의 앞엔
“···!”
방금 전까지 뒤따랐던 남성이 바로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위협을 감지한 슈르츠는 재빨리 망토 속에서 검을 뽑아냈다·
-챙!
1초의 빠른 판단이 그를 살려냈다·
남성이 내지른 단도의 끝은 정확히 슈르츠의 목을 향해 있었다·
급습을 막아낸 슈르츠는 망설이지 않고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긴장감이 차오른 나머지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으며 등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와 변명을 던지고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일 터·
이에 슈르츠는 자신의 목숨을 건 한가지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땡그랑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남성의 미간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두 손에 단단히 쥐고 있던 검을 슈르츠가 그의 앞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이름은 슈르츠· 성은 없습니다·”
그러곤 아예 양손까지 들어 올리며 공격의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당신은 그러니까 진짜 안개의 추종자가 맞으십니까?”
남성은 대답 없이 굳은 눈빛으로 슈르츠를 응시했다·
“수도원에서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이상한 교리나 읊는 수도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요! 전 당신들을 찾기 위해···!”
더 들을 필요성이 없다는 듯 돌연 검을 집어넣은 남성은 무심하게 돌아섰다·
한순간 다급해진 슈르츠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미스트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 말은 차마 무시할 수 없었는지 남성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살기에 젖은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떨림을 유발했지만 가람 왕국에서 보았던 그 남자만큼은 아니었다·
슈르츠는 침착하게 손에서 마나 구체를 발현해냈다·
구체에선 짙은 어둠 속성의 마력이 생생하게 퍼지고 있었다·
자신이 조직에 들어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나름의 증명이었다·
“····”
남성은 슈르츠가 발현한 마나 구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꽤 관심 있게 지켜보는가 싶다가도 또다시 몸을 돌려버렸다·
당황한 마음에 뭐라도 더 해야 하나 싶어 우왕좌왕하던 찰나
-스윽
다시금 고개를 돌린 남성이 슈르츠를 보며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꿀꺽하고 침을 한 번 삼킨 슈르츠는 바로 남성의 뒤를 따랐다·
* * *
용병 생활을 하다 보면 동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대부분 돈이나 여자 같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그래도 심심찮게 나온 주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대륙 제일의 암살 집단 미스트에 관한 것이었다·
돈이나 재물이 아닌 그들의 사상과 교리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
만약 일을 하다 그들과 마주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즉시 의뢰고 나발이고 그 자리를 벗어나라고 했다·
그 암살자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했다·
그들은 다른 인간들처럼 욕망과 본성에 입각하여 사는 이들이 아니기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개밥 주듯 내놓는 놈들인 만큼 그런 놈들과 부딪쳐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도시 밖 숲속 한 가운데에 위치한 외딴 움막·
사람 두 명은 간신히 들어갈 법한 작은 공간이었지만 안에선 무시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남성은 들어가라는 듯 슈르츠에게 시선을 보냈다·
슈르츠는 심호흡을 한번 내쉰 뒤 안으로 들어섰으며 남성 역시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나무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작은 단검을 제외하고선·
당연하겠지만 절대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검은 칼날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무언가가 오감을 자극했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을 일깨우게 했다·
그리 쥐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는 검이었다·
“잡아라·”
남성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슈르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선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검을 잡았다·
-화아악
그러자 단검에서 뿜어나온 검은 안개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슈르츠는 순간적으로 감아버린 눈을 서서히 떠보았다·
그의 몸은 어느새 움막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안개의 공간으로 전이되어 있었다·
낯선 상황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슈르츠는 눈은 곧 정면에 나타난 이형에 존재에게 향했다·
짙은 흑발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굉장히 낯익은 사내·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눈가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붉은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으며 손에는 핏물로 범벅된 단검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안 됐던 것은
지금 저 검을 들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자신의 얼굴과 무척 닮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똑같았다·
이것은 마치 알 수 없는 미래의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두 눈에 흐르는 피눈물 속엔 분노와 살의의 감정들이 가득했으며 그것은 슈르츠 본인조차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하아····”
그가 음침한 한숨을 내뱉으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반가운 악수나 하겠답시고 다가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엄연히 슈르츠를 죽일 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에 슈르츠는 머지않아 깨달았다·
이것은 시련이라고·
이 시련을 넘어야지만이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비로소 다음 길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먹은 슈르츠는 검을 빼 들었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슈르츠가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깡!
얼굴 그것도 눈 쪽을 노린 무지막지한 일격이었다·
허나 동선 자체는 이미 훤히 보였던지라 막는 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뭐 뭐야?”
슈르츠는 곧 눈을 의심하였다·
얼굴 상태만 봐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더니 부닥친 검너머로부터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풀컨디션의 자신조차 절대로 낼 수 없는 힘이었다·
당황한 마음에 일단은 거리라도 다시 벌려보려 했지만
“크윽!”
또 다른 슈르츠는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너는 이미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듯 그의 붉은 단검은 서서히 슈르츠의 얼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사의 마지막 끝에서 경험하게 되는 죽음의 한기·
이윽고 피 묻은 검 끝이 그의 목덜미와 맞닿은 순간
-쏴악!
주변을 잠식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면서 원래 있었던 작은 움막으로 다시금 돌아오게 되었다·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은 슈르츠는 바닥을 보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남성은 그런 슈르츠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전 네가 만난 이는 복수심에 젖어 분노와 살의로 잠식된 너의 또 다른 이면이다·”
“이 이면?”
“분노야말로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최상으로 끌어내는 강한 원동력이지· 허나 이성을 제어하지 못한 상태로 얻게 된 힘은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피눈물을 대가로 얻게 되는 무지막지한 힘·
그것을 실제로 경험해본 슈르츠에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 보였다·
“허나 그 분노로 잠식된 스스로마저 이길 수 없는 자는····”
남성은 아무렇지 않게 책상 위 검을 집어 품속으로 넣었다·
“암살자의 검을 잡을 자격이 없다·”
그러곤 쓰러진 슈르츠를 무심하게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게 된 슈르츠는 지쳐버린 나머지 아예 벌렁 드러누웠다·
“분노에 잠식된 나를 이겨내라고? 그게 가능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의문이었다·
“대체 당신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자신으로선 아직 발끝만큼도 닿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슈르츠는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 * *
(후회는 없는 것이냐?)
“아에르님을 모시기 시작한 그 날부터 항상 기다려왔던 날입니다· 무엇이 후회스럽겠습니까?”
(이리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묻는 말이다·)
“암살자에게 있어 망설임은 죽음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제일 잘 아시는 분께서 어찌 그럴 걸 물으시는지요?”
(뭔 말을 못 하겠구나·)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아에르는 고개를 저었다·
-탁탁탁!
그런 그들의 귀로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더 빨리 알아차린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 여차하면 내가 변호해줄 수 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정신 감응은 이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흥미롭게 지켜보시길····”
(잔인한 말을 하는구나·)
아에르는 그 말을 끝으로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감은 눈을 서서히 들어 올린 시리카의 앞엔 평소와 같은 무심한 표정의 시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눈초리가 이전과 다르게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호기롭게 나타난 것과는 별개로 시안은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하거라·”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내가 할 말은 지령서를 통해 전달했을 텐데?”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백지 말입니까?”
“잘 알아들었구나·”
시리카는 그럼 뭔가 문제냐는 듯 시안을 보며 턱을 치켜올렸다·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제가 아린 황녀를 암살하는 것에 대해 주저할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허나 자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녀이지 않은가?
그런 얄팍한 이유로 자신을 제외했을 리는 없을 거라고 시안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 할 수 있니?”
시리카는 그런 시안을 향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