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비밀의 속삭임 (2)
벌써 몇 시간째·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마검의 본체를 지그시 바라본 것뿐·
말은커녕 아무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에 내가 뭘 할지 빤히 알만한 상황에 정말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
평소라면 이렇게 튕겨줘야 내 애검 답지라며 물 흐르듯 넘어갔겠지만
이번만큼은 좀 다르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그녀와의 거리감이 새삼 와닿게 된 기분이다·
“이거 의외로군!”
어제와 마찬가지·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머금은 퇴역 기사님께서 내 앞에 털썩 앉았다·
“설마하니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나를 어지간히 반가워하는 그와 다르게 내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 마검 아가씨와의 대화는 잘 끝났나?”
나는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테이블 위에 무심히 올려진 마검의 본체를 발견하고선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괜찮네! 원래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고 하지 않던가? 이리저리 휘둘리다 다시 돌아오는 법이라네!”
“잡설은 집어치우고 본론만 이야기하시지?”
내 예상과 다르게 제레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의문의 반응을 보였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 말인가?”
“책의 저자인 디오 하펜커스에 대해서 알려주려 했던 거 아니었나?”
“아 맞아! 내가 선의를 베풀어준답시고 그걸 알려주려 했었지?”
꿍꿍이가 잔뜩 낀 그의 야비한 눈빛이 나를 마주한 순간· 내면에서 솟아오른 싸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한데 그때는 우리의 조건이 좀 안 맞았던지라 내가 맞춰주려 했던 것뿐이고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지 않나?”
“무슨 말이지?”
“이제는 자네가 내게 선의를 베풀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거네·”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입꼬리를 두어 번 정도 씰룩였다·
“이봐 영감님· 지금 남은 생 단축시켜 달라고 발악하는 거야?”
“이야기를 정 듣고 싶지 않다면 뭐 그래도 되네· 하지만 그리 추천하고 싶진 않아· 여기 오기 전에 내 부하들에게 당당히 일러두고 왔거든·”
제레온은 세상 자신만만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금일 해가 질 때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 즉시 빛의 기사단에 전신을 보내라고 말이야· 진짜 안개의 추종자가 날 납치했으니 어서 빨리 구하러 와달라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다·
그렇다고 눈 하나 깜짝할 내가 아니긴 하지만·
“자네 같은 부류는 눈빛만 봐도 어떤 성격일지 대충 보인다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일 테지· 안 그런가?”
바로 맞췄다·
빛의 기사단이 오든 빛의 군단이 오든 내 입장에선 전부 쓸어 버리면 그만이다·
정작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빠르게 해결할 자신은 있지·
문제는
“그 간사한 혀 놀림으로 단장직에 오르셨나?”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
저 노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쭙잖게 정보를 얻고 죽여봐야 당장은 몰라도 이후의 일이 더 귀찮아지겠지·
그 일을 딱히 바라진 않는다·
“내 의사는 달라진 게 없네· 서로를 위해 정보를 주고받는 거래 그뿐이야!”
“진짜 안개의 추종자에 대한 것 말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오늘은 조금 바뀌었네· 내가 알고 싶은 건 안개의 추종자가 아닌 바로 자네일세!”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굳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약간의 경멸을 담아서·
“거 표정 무시무시하구먼· 자네가 마검의 주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그 7년 전 일의 주역이란 것도 덩달아 밝혀진 것 아닌가? 그럼 이제 와 서로 숨길 게 뭐 있겠는가? 내 인생 전부를 걸고 자네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을 것임을 내 약조하겠네·”
그는 대뜸 허리춤에 검을 뽑는가 싶더니 기사의 맹세를 시전 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에 천장을 보며 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대충 합의를 본 것 같으니 내 그만 자네가 궁금한 것에 대해 말해 주도록 하겠네· 디오 하펜커스란 이름에 대해 궁금한 거겠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간단하게 한 줄로 먼저 설명해주겠네· 하펜커스는 구시대에 검은 안개를 추종했던 일가의 이름이야·”
그 무심함이 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뭐? 검은 안개의 추종자?
제레온은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한 30년 전쯤이었나? 내가 빛의 기사단장으로 막 부임했을 무렵 네프로디테 성녀와 독대를 한 적이 있었네· 그때 그녀가 대뜸 묻더군· 우리가 안개를 걷어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냐면서 말이야·”
조금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질문이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그녀는 하펜커스 일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네· 아! 이 이야기를 먼저 해줘야겠구먼· 자네가 알고 있는 빛의 기사단의 성녀는 말이야· 사실····”
“화이트 엘프라는 거?”
의기양양했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아 알고 있었나?”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시지·”
제레온은 멋쩍은 눈빛과 함께 말을 이었다·
“자네도 검은 안개의 신을 따르는 자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보지 않았나? 안개의 추종자는 이 땅에서 왜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이야·”
굳이 답을 하자면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의 농간 때문이겠지·
그 성녀를 비롯해 나와 관련이 있는 몇몇 인간들에 의한·
“그 여자는 말하더군· 선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안개의 추종자는 구시대의 평화를 깨부수는 것도 모자라 기어이 신들끼리도 피를 보게 했던 만악의 근원이라고 설명했네· 자신은 빛의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자로서 그 역사를 봐온 산 증인라고도 했지·”
만악의 근원이라·
그것도 사실 승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작게 피어올랐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겠지만·
“그 시대에 살지 않았던 우리로선 뭘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거야· 이 책의 저자인 그 디오 하펜커스란 자가 자네 이전의 검은 안개의 추종 세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일세·”
제레온은 자신의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라는 듯 몸을 뒤로 젖히고선 입을 다물었다·
구시대에 검은 안개를 추종했다고 알려진 일가 하펜커스·
케이람은 그 하펜커스라는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치 내가 알면 안 된다는 듯이·
[아마 딱 이때쯤이었을 거야· 그 머저리 새끼도····]
그때 케이람이 내게 말한 그 머저리 새끼란 놈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렇게 되면 그 디오란 자는 나 이전에 케이람을 가졌던····
“제 제레온님!!”
고된 상념을 깨는 다급한 부름에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노인의 부하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1층에서 다급히 올라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술집 밖에서 대기하라 하지 않았던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전할 말이 있는지라···!”
남성은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비밀 얘기하듯 제레온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신경 끄고 내 생각이나 하자는 마음에 눈을 감은 순간
-쾅!
잠자코 있던 제레온이 자리를 거세게 박차고 일어났다·
“성녀가 죽었다고?”
* * *
서로를 향한 거짓된 미소 그 사이에서 이어지는 엄중한 분위기·
소매 속에 품은 칼날이 언제 목으로 향할지 모르는 와중에도 보리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밖에 기사들이 있습니다· 지금 절 죽인다고 해서 이곳을 편히 빠져나가실 순 없을 텐데요?”
“그딴 걸 신경 쓸 내가 아니라는 걸 아직 모르시는 건가요?”
“본인이라면 몰라도 이후 계승자에게 벌어질 일만큼은 신경을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 함부로 놀리지 마세요· 그러다 정말 계승자도 신경 안 쓸 만큼 제가 폭발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칼날을 소매 속으로 숨긴 시리카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 또한 이전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가 황성에 있었다는 걸 모르셨던 것도 아닐 텐데요?”
“내가 여러 번 살려줬다는 것도 모르진 않죠? 처신 꽤 잘하시던걸요? 마법만이 아니라 줄타기에도 재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시리카는 보리스가 황성에 상주 중이란 사실을 이미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대원들을 붙여 그의 움직임을 감시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보리스는 시안이나 미스트에 대한 사실을 조금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니그리티 가의 장녀로서 황성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무능한 황녀를 유능한 꼭두각시 황녀로 만드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아카데미에 계속 계셨더라면 이름 좀 날리셨겠어요?”
“큰일 날 소리 하시는군요· 전 그저 방향만 잡아드렸을 뿐입니다· 이 모든 건 황녀님께서 스스로 이루어내신 일이죠·”
보리스의 시선은 곧 탁상 위에 놓인 검은 책으로 향했다·
“사람의 생각은 정직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에 더 관심이 가게 되죠· 7년 전 그날 이후 황녀님께선 의문을 품으셨습니다· 과연 검은 안개란 것이 우리의 질서를 무너트릴 만큼 악독한 존재인지 말이죠·”
“그래서 뭐 그 진면을 알려드리기라도 하셨나요?”
“진면을 알아내는 방법을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보리스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간단합니다· 그 무언가에게 힘을 주면 되는 것이죠· 모든 만물은 힘을 가졌을 때 감춰져 있던 본성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하물며 당신들이라고 다를까요?”
“···!”
머릿속에 난잡하게 널브러진 추측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진 순간·
시리카의 동공이 곧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별거 없습니다· 그저 당신들에게 힘을 줄 생각입니다·”
책을 집어 올린 보리스는 그녀에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디오 하펜커스· 현재 검은 안개의 신을 모시고 있는 당신이 이 이름을 모를 리는 없겠죠· 이 책에 적힌 교리를 통해 머지않아 대륙의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겁니다· 안개란 것이 사실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감당할 자신 있나요? 우리가 그 추종자들을 데리고 어쩔 줄 알고요?”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이왕이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셨으면 합니다·”
시리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남자가 본인들의 계획을 그것도 자신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일 순 없었다·
“안심하십시오· 황녀님께선 아직 시리카님이 미스트의 수장이란 걸 모르십니다· 아마 빛의 기사단 해체 이후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저와 함께 의논할 거라 생각하시겠죠· 뭐 실제로도 그러고 있고요·”
빛의 기사단을 해체하고 생길 공백을 저들이 가만 놔둘 리는 없다·
그 빈자리를 자신들의 채움과 더불어 뭔가 새로운 계획을 추진할 것임을 시리카는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앞당겨야 할 것 같네요·”
허나 내색하진 않고 바로 여유로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그 잘난 면상이 쓰레기 구겨지듯 일그러질 날을 말이에요· 우리도 우리의 계획을 좀 더 앞당겨야겠어요·”
“그거 기대되는군요· 과연 누구의 얼굴이 먼저 일그러지게 될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시리카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보리스는 천장을 올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머지않았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되는 날이· 그때처럼 말이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