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비밀의 속삭임 (3)
“황녀님· 레시무스입니다·”
노크와 함께 신원을 밝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에 레시무스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중앙엔 탁상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는 아린 황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엔 정리해야 할 수십 장의 서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금 막 제국의 각 도시 및 영지로 황실의 공문을 보냈습니다· 내일쯤이면 가까운 곳을 시작으로 점차 소식이 퍼질 것으로 보입니다·”
“수고했어· 레시무스·”
아린은 무심한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레시무스는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떼려는가 싶다가도 이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길 10분 정도·
“비올렛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알림에 두 여인의 시선이 그대로 돌아갔다·
아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기다리고 있던 2황녀 비올렛이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수고가 많아요· 아린·”
“어서 오세요· 언니·”
아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정중한 자세로 그녀를 맞이하였다·
“바쁜 와중에 찾아온 것 같아· 미안하네요· 여러모로 일을 떠넘긴 것 같아서 언니로서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일이 아린에게 있어선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잖아요· 괜히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그렇죠·”
“···!”
고개를 숙인 아린의 동공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
“오해하진 말아요· 이번 일을 계기로 혹시라도 다시 나타나 아린의 마음을 힘들게 하진 않을지 걱정돼서 한 말이에요·”
허나 그 감정을 드러내진 않으려는 듯 아린은 밝은 미소와 함께 얼굴을 들었다·
“다 지난 일입니다· 눈앞에 닥친 지금에 집중해야죠·”
“훌륭하네요· 아바마마께서도 몸이 편치 않으신 지금 저희라도 더 굳건히 나아가야 해요· 그래야 바람직한 황실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죠·”
“더 노력하겠습니다·”
비올렛은 의미심장한 격려의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아린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하던 집무를 재개했다·
남들이 보았을 땐 이전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생각하겠지만
“····”
그녀를 10년 가까이 지켜온 레시무스의 시선은 달랐다·
지금 그녀가 보는 아린의 무심한 눈빛엔
이전에 없던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것이 비올렛 황녀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언급한 그 사람에 대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 *
어느 능글맞은 퇴역 기사단장과의 두 번째 만남 이후 이틀이 지난 시점·
거리 중심부에 있는 게시판 앞으로 황실의 공문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들었었다·
그들의 시선은 저마다 불신과 의문의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빛의 기사단의 성녀이자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사자 네프로디테 아이리스의 죽음·
차라리 사망 소식만 전해졌다면 또 모를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넘어 혼란을 선사할 내용들까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세 세상에 이게 다 사실이야?”
“성녀가 아니라 광녀였군! 그것도 모르고 이제껏 좋다고 찬양한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야·”
“그럼 빛의 기사단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공문엔 네프로디테 성녀가 최근 가람 왕국에 있었던 화이트 엘프 납치사건과 더불어 기사단이란 무력 집단을 이용해 온갖 개인적인 비리와 횡포를 저지른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있었다·
적당한 과장과 소설을 가미한 것 같긴 하나· 그건 중요하지 않을 터·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경악 자책 그리고 이어지는 불안·
대체로 분노에 젖은 사람들보단 불안함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충격스럽겠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성녀와 빛의 기사단의 위신이 한순간 나락으로 추락한 순간이다·
뭐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지만
어느 정도 알 건 안다고 할 수 있는 내 시선으로 봤을 땐 그야말로 어이가 없다·
사망 사유가 뭐? 자책감 및 처지 비관에 의한 자살?
내가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준 건 사실이다·
허나 애초에 그 정도로 자살을 결심할 만큼 나약한 여자였다면 60년 동안 뻔뻔하게 성녀로 군림하지도 않았을 거다·
복수의 칼을 갈아도 모자랄 판에 자살?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도 안 나온다·
내 오랜 암살 감각이 그녀는 자살이 아닌 타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걸 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거리 다른 곳에선 전에 보았던 수도원의 쭉정이들이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째 이전 날 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붙는 느낌이다·
성녀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지·
이건 단순히 성녀의 악행을 고발한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는 그녀와 더불어 그녀가 몸담았던 빛의 기사단을 넘어 우시프 제국의 위신 또한 스스로 깎아 먹는 행위다·
황실은 대체 이걸 무슨 자랑거리라고 당당하게 공표한 걸까?
디오네 황제의 뜻은 아닐 것이다·
황제는 2년 전 지병이었던 심장병이 또 한 번 도진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정무조차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황제가 아닌 다른 황실 인원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1황자 루이넬은 실권을 잃고 황성을 떠나진 오래이며 현 황후 카산드라의 아들인 파비앙 네로비앙 형제는 별다른 힘없이 황궁에서 쥐 죽은 듯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이는 둘·
현재 가장 큰 실권을 쥐고 있는 2황녀 비올렛과 혹은 그녀를 시종처럼 따라다니는 황실의 마지막 일원
아린 황녀일 가능성이 현재로선 가장 높겠지·
7년 전 나에게 지금의 상황을 말해준다면 아마 소설 소재로도 못 쓸 거라며 한심하게 말했을 것이다·
내 입으로 나아가라는 조언을 하긴 했지만 정말 어디로 나아갈지 예상이 안 되는 느낌이다·
나는 발길을 돌려 사흘 전 노인을 만났던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곤 그때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에서 익숙한 노인이 올라와 내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늦어서 미안하군·”
벌써 세 번째·
같은 장면이 하도 반복되다 보면 이제는 늘 있었던 일인 것처럼 익숙해진다·
허나 오늘은 좀 다르다·
이전의 능글맞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근엄한 기사의 눈빛만이 남아있었다·
“오래 있을 시간은 없으니 바로 본론만 얘기하겠네· 방금 전 부하들과 합의를 했어· 난 이 길로 황성에 갈 생각이네·”
“세상일 따윈 신경 안 쓸 퇴역 기사님 아니셨던가?”
“말하지 않았나? 나이를 먹을수록 진실에 민감해지는 법이라네· 그 귀 큰 여자는 자책감에 자살 같은 걸 할 여자가 아니야· 내 60년 기사 인생을 걸고 장담할 수 있네·”
내 생각이랑 비슷하다·
이 노인도 지금 황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빛의 기사단장으로서 오랜 시간 그녀를 옆에서 봐왔으니 어찌 보면 더 정확한 견해겠지·
“오해는 하지 말게· 난 그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녀의 죄를 옹호할 생각도 없지· 나를 교화시키겠답시고 여러 번 수작을 부렸거든· 그때마다 뭐 꾀를 써서 빠져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신념만큼은 확실한 여자야· 자신의 존재가 곧 대륙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음을 굳게 믿고 있었지·”
문득 그 어떤 악의 존재도 자신에게 절망을 안겨줄 순 없다며 울부짖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황실은 지금 그 여자를 성녀가 아닌 악녀로 만들고 있어· 그럼 머지않아 그녀가 속해있던 빛의 기사단의 위신 역시 추락하게 되겠지· 내 아무리 그래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싶은 생각은 없네·”
즉 가서 모든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겠다는 소리였다·
“안타깝지만 자네와의 거래는 좀 더 뒤로 미뤄야겠군·”
“내가 당신과 다시 만난다는 보장은 없을 텐데?”
“만날 걸세·”
그의 눈빛엔 확신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네와는 조만간 황성에서 다시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황성으로 간다고 한 적 없는데?”
“늙은이의 감이라고나 할까? 어디까지나 느낌이 그렇다는 걸세! 실제로 그렇게 될진 뭐 두고 봐야겠지·”
제레온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음에 또 보세· 시안 베르트····”
무슨 거창한 걸 말했다고 의기양양하게 사라지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내가 마검의 주인이란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터·
어디 가서 떠벌릴 노인네도 아닌 만큼 별 신경은 안 쓴다·
그래도 행선지가 정해진 그와 다르게 이후의 난 딱히 계획이 없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나나와 산책이라도 하는 게 나을까 싶은 순간
-털썩
예정되지 않은 또 한 명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말없이 내게 고개를 숙이고선 자리에 앉았다·
내게 처음 가짜 안개의 신도에 관한 문서를 전달했던 미스트의 대원이다·
이전과 다르게 눈가엔 어딘지 모를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당주님께서 급히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는 품에서 꺼낸 밀서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단번에 지령서라는 것을 파악했다·
이 시점에 새로운 정화 작업 대상이라·
황성에서 어느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귀족이라도 본 것인가 싶은 순간
“···?”
나는 받은 지령서를 대원에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무슨 의미야?”
지령서 안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 암어가 숨겨진 것도 아닌· 그냥 백지·
나는 이 백지의 지령서가 무얼 뜻하는지 절대 모르지 않았다·
“전 그저 받은 것을 전하는 처지인지라····”
대원은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불안한 눈빛 속에 담긴 그의 속마음이 내게 그대로 엿보였다·
나는 그 부분을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너희가 받은 지령서도 나랑 같은 거야?”
“···아닙니다·”
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작업 대상은 누군데?”
“····”
“피차 피곤하게 굴지 말고 불어· 나한테 죽나 당주한테 죽나 너한텐 그게 그거야·”
대원은 답답한 마음에 외마디 한숨을 내쉬었다·
지령서의 전달을 왜 하필 자신에게 시킨 것인지에 대한 불만의 감정 또한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스윽
그는 대답 대신 또 하나의 지령서를 건넸다·
정황상 내 것이 아닌 본인에게 내려진 지령서로 보였다·
“다 당주님께선 이 말도 함께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
“이번엔 네가 방관할 차례이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 말과 함께 지령서를 읽던 내 눈이 돌연 돌처럼 굳어버렸다·
백지의 지령서가 뜻하는 바는 실로 간단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너 이외의 다른 대원들이 작업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나서지 말고 무조건 방관하라는 의미다·
“····”
장난쳐?
차라리 아예 모르게 한다면 또 모를까 이걸 나보고 그냥 무시하라고?
지령서 맨 아래 붉은 글씨로 적힌 이번 정화 작업의 대상·
잠시 풀어졌던 내 마음이 한순간 부정적인 감정으로 옥죄여지고 있었다·
<아린 세벨러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