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진면 (2)
전생의 기억을 살짝 더듬어본 결과 지금 저 바보 왕자와 비슷한 상태가 하나 떠올랐다·
이른바 절대 코마(The Absolute Coma)·
이형의 존재로부터 정신을 착취당해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상태·
여기서 말하는 이형의 존재란 인간보다 상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절대자라는 이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들 말이다·
생기는 잃었지만 초점은 또렷한 눈 그 안에 담긴 무지막지한 살기 한낱 인간으로선 가질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까지·
이건 틀림없는 절대 코마 상태다·
[뭔가 상황이 재밌어지고 있다 주인아?]
살짝 미간을 찌푸린 케이람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대체 어떤 지점에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 건지 마음 같아선 하나부터 열까지 따지고 싶었다·
허나 일단은 혼잣말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이 영역의 주인께서 자기 별장을 더럽힌 것에 화가 나신 모양이야·]
거 누군진 몰라도 아주 옹졸한 주인이시로군·
솔직히 생각나는 존재가 딱 한 명 있긴 한데 아직은 추측으로 미루고자 한다·
더 이상 생각을 거듭하기엔 짜증이 치밀어오를 것 같으니·
“····”
녀석이 루나브가 생성한 저항의 벽을 빤히 훑어보았다·
방금 전까지 기절해 있던 사람이 깨자마자 만든 벽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견고한 벽이었다·
적어도 무력만 가지곤 절대 못 부술 것이다·
하지만
-후웅
그딴 건 상관없다는 듯 그가 다시 한쪽 주먹을 들어 올렸다·
주먹 주위로 갈색빛의 기류가 감도는 것이 보인 순간 나는 재빨리 루나브를 끌어안고선 구석으로 몸을 던졌다·
-콰장창!
철옹성처럼 단단했던 벽이 유리창 부서지는 것마냥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살짝 아슬아슬했다·
얼마나 파급력이 컸으면 주먹을 내지르고 나서 3초 정도 거친 모래바람이 살결을 스치고 갔다·
“선배도 절 다른 사람 손에 죽게 하긴 싫은 모양이네요?”
“그런 시답잖은 농담이나 할 때가 아니야 후배님·”
“저도 알아요· 근데 조금 어이가 없긴 하네요· 저 말도 안 되는 힘은 뭐죠? 아무리 봐도 마력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진짜 육체의 힘인가요?”
굳이 설명하자면 녀석이 가진 육체의 힘에 어떤 절대자의 힘이 살짝 얹어진 거라 봐야겠지·
이를 상대하기 위해선 나 역시 같은 수준의 힘을 이끌어내야 한다·
-우드득
살벌한 뼈 소리를 내며 녀석이 다시 한 번 주먹을 쥐었다·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한 기운이 그의 주먹으로 몰려들었다·
“뒤로 물러서! 최대한 멀찍이!”
이번엔 잘 피한다고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루나브를 뒤로 보낸 뒤 바로 앞으로 나아가 마찬가지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면에서 이끌어낸 검은 안개가 오른 주먹으로 몰려들면서 흑빛의 오라가 반짝였다·
의도한 만큼의 힘이 모인 순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내뻗었다·
-쾅!
공간을 가르며 깊게 내지른 두 주먹이 부딪치자 양쪽으로 거센 파장이 불었다·
맞닿은 지점에선 미세한 떨림이 일어났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압도하기 위해 더 강한 힘이 몰려들었다·
(네놈· 마수의 피를 먹었구나·)
잔잔한 물결처럼 잘게 울린 목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당연하지만 이건 바보 왕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수뿐만이 아니군· 드래곤의 피도 섭취했어· 단순히 검은 안개의 힘을 가진 것만이 아닌 이미 육체는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구나·)
“거 혼자 떠들 거면 속으로 말씀하시지 그래?”
목소리의 주인은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체 어디서 너란 놈이 나타난 거지?)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인데? 당신이야말로 어느 쥐구멍에 숨어계시다가 대뜸 나타나신 걸까?”
(흥! 곧 죽을 놈에게 설명은 무의미하지· 모래의 신 사불롬의 이름으로 아에르의 계승자인 네놈을 이 땅에 묻도록 하겠다·)
“···!”
난데없는 자기소개에 얼 탈 시간은 없었다·
곧 그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지어지면서 동시에 주먹을 감싸고 있던 모래가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너는 인계에 있어선 안 될 불필요한 존재다· 원망은 너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려 했던 네 주인에게나 해라!)
-쿠구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유적 내부가 미친 듯이 울려댔으며 벽에는 하나둘씩 생겨난 작은 균열들이 나뭇가지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별장을 더럽힌 거에 화가 난 나머지 아예 부숴버릴 생각인가?
“어이! 당신의 하수인까지 같이 묻어버릴 생각이야?”
붕괴가 발생하면 나와 루나브만 휘말리는 게 아니다·
이 바보 왕자도 필시 우리와 같이 묻히게 될 것이다·
(나를 숭배하고 이 땅을 수호하는 일족으로서 거룩한 희생을 하는 것이다· 이놈으로선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지·)
“하! 말 한번 거하게 번지르르하시네·”
결국 소모품으로 쓰고 버리겠다는 뜻 아닌가?
하긴 하찮은 인간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될 지고한 분들이신데 이 정도 인성은 애교에 불과하겠지·
미안한데 난 이미 그런 거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이거든?
내가 감히 예고하는데 네놈이 인간이건 신이건 상관없이 그 같잖은 상판대기가 오늘 제대로 짓뭉개질 것이다·
-쐐액!
아직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케이람을 꺼내 바로 전방을 갈랐다·
한걸음 뒤로 물러난 세트는 곧바로 주먹을 쫙 펼치며 마법진을 생성했다·
(데저트 블레이드(Desert Blade)····)
이윽고 마법진에서 모래로 만들어진 것 같은 갈색빛의 칼날이 나타났다·
문제는 하나가 아닌 다수라는 것·
나는 즉각 방어 자세를 취했다·
-챙
날 선 쇠붙이를 후려친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지면서 팔에 적잖은 충격이 전해졌다·
녀석은 그런 내 모습에 흥미를 느낀 듯 기분 잡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신의 계승자로서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다 죽는 것이 그나마 네놈에겐 가치 있는 죽음이겠지· 아끼지 말고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고선 장렬하게 죽어라· 나 사불롬이 그런 너의 마지막을 똑똑히 지켜봐 주마!”
친절하고도 자비로운 은총에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는 아랑곳 않고 케이람을 고쳐 잡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암무 9식: 마검 발현·”
* * *
한편 뒤에서 시안과 세트의 격돌을 지켜본 루나브는 속으로 생각했다·
경이롭다·
그러면서도 참 흥미롭다·
대체 저 기이하면서도 신비한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나마 확실한 게 있다면 지금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마나에 근간 된 것이 아니라는 정도·
마치 원천적인 본질은 같지만 속성은 다른 두 개의 힘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세트도 세트지만 특히 시안에게서 뿜어지는 검은 안개에 시선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의 부정을 담고 있는 듯한 무지의 검은 안개·
자신이 아는 범주 내에서 저 검은 안개의 근원이 될 만한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저게 선배의 진면? 그럼 설마····”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르려던 것도 잠시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다른 곳에 집중해야 한다·
일단 시안의 모습을 봤을 때 세트를 상대로 고전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1분 1초가 지날수록 점점 더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지금 당장 자신이 개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럼 눈 여겨야 할 것은 저들이 아닌 바로 이 유적·
-쿠구궁
머리 위로 작은 파편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벽의 균열은 손대면 무너질 정도로 이미 심각하게 갈라진 상태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유적을 벗어나야 하지만 저 둘은 이미 서로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주위에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에 루나브는 차분히 눈을 감으며 한 손을 바닥에 갖다 대었다·
모래바람으로부터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 공기의 양 지면의 온도 등·
마법 실행에 필요한 모든 자연의 요소들을 즉석에서 계산해야 한다·
현재 자신들이 위치한 곳은 지면으로부터 약 30m 아래·
밖으로 이어진 입구까지의 순수한 거리는 대략 1km 이상·
워낙 짧지 않은 거리인데다 이곳이 지하 유적인 것을 감안한다면 훨씬 더 섬세하고도 정밀한 거리 계산을 해야 한다·
사실 계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보다 어려운 계산도 평소 밥 먹듯 해왔기에 이미 머릿속에서 95% 이상 진행을 완료하였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현재 자신에게 남은 마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조금 전 저항의 벽을 생성하면서 그나마 있던 마나도 소진되었다·
최대한 있는 걸 다 긁어모아 봐야 5%가 채 넘을까 말까한 상황·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포기하는 것 보단 나을 것이기에 루나브는 초연한 마음으로 마나를 이끌어냈다·
“큭!”
시작과 동시에 바로 무리가 왔다·
사실 풀 컨디션으로 해도 가능성이 크지 않을 마법을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시도해야 한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하지 않으면 지금 눈앞에 있는 소중한 사람이 모래 더미에 자신과 함께 묻히게 생겼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둘이 영원히 말이다·
“사실 그편이 더 나을지도····”
잠시 멈칫한 그녀의 얼굴에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후웅
문득 뒤에서 느껴진 낯선 기운에 루나브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휘날리는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있는 미지의 형상·
너무도 빨리 사라진 탓에 정확히 무엇이었는진 알 수 없었다·
다만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교차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조금 전까지 바닥을 드러냈던 자신의 마나가 조금씩 차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뭐 뭐지?”
마나 뿐만이 아니었다·
마나가 흐르는 심장 주변으로 또 다른 무언가가 급류처럼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이 기운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상태라면 분명 하고자 하는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결심이 선 루나브는 바로 주문을 읊었다·
“공간의 순리를 거슬러 불어닥친 위기를 벗어나리라····”
주문과 동시에 발밑에 자그마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진은 빠르게 퍼져나가 곧 그녀를 넘어 시안과 세트가 있는 곳까지 크기를 넓혔다·
이에 격하게 치고받던 두 남성 또한 발밑의 마법진을 발견하고선 시선을 돌렸다·
“···?”
둘 다 마법진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얼굴빛이 눈에 띄게 변했다·
“대공간전이(Spatial transition)!”
이윽고 마법진에서 밝은 푸른빛이 일며 주변을 감싸 안으니
-슈욱!
빛에 잠식된 이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털썩!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
마법의 빛이 사라지자마자 이를 반겨주듯 뜨거운 태양 빛이 시야를 가렸다·
“되 된 건가?”
자신의 마법이 정말로 성공한 것인지 아직 믿을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하던 순간·
대뜸 그녀의 앞으로 시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뭐한 거야!”
좀처럼 보기 힘든 당황한 눈빛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녀는 늘 그렇듯 세상 무덤덤한 눈으로 답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너 설마 진짜로 대공간전이를···!”
“아고고 머리야!”
가볍다 못해 있던 긴장감도 늘어지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두 남녀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땅바닥에 벌러덩 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세트·
조금 전 살기 가득했던 눈은 어디 가고 본연의 바보 왕자를 떠올리게 하는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