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거짓된 모습 (1)
시안이 세트와 함께 무단외출을 감행한 지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나나는 시안의 당부대로 수업엔 일절 나가지 않았으며 생존 신고(?)를 위해 하루에 한 번 기숙사 앞을 돌아다니는 것 외엔 어떠한 외부활동도 하지 않았다·
허나 세상에 완벽한 위장은 없고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기어이 로열관을 벗어나 본관 근처에까지 서성거리던 나나와 브라이언은 건물에서 나온 시리카와 마주치고 말았다·
“···!”
그들을 본 시리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꿰뚫어 본 듯한 눈빛·
나나와 브라이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으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장 따라오세요!”
시리카는 그들을 부리나케 자신의 방으로 끌고 왔다·
-쾅!
그녀는 방문을 거세게 닫은 동시에 바로 도청 방지 마법을 시전 했다·
이윽고 감정을 절제하려는 듯 짤막한 숨을 한 번 내쉰 뒤 바로 나나를 보며 물었다·
“왜 당신이 시안으로 변해있는 거죠? 나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헤헤····”
나나는 헤벌쭉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신기가 평소보다 훨씬 짙었어요! 분명 시안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한 것일 테죠? 제가 먼저 봤으니 망정이지 총장님 같은 분이라도 봤다면 바로 들켰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쿤델 총장이 아카데미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그게 도련님께서 이렇게 해달라고 먼저 부탁하신 거라····”
이에 브라이언이 변호를 해주기 위해 입을 여니
“···!”
시리카는 살기 가득한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브라이언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
“싹 다 설명하세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생존 본능이 발현된 브라이언은 시안이 나나를 대역으로 세우고 어딜 갔으며 누구와 갔는지 등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시리카에게 말해주었다·
시안도 혹여 그녀에게 들킨다면 그냥 다 말하라 했으니 사실상 주인의 말을 따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 하····”
시리카는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시안! 기어이 일을····”
확실한 게 있다면 절대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지금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돌아간 뒤엔 단 한 발짝도! 단 한 발짝도 나오지 마세요! 있는 척 하겠답시고 나올 필요도 없어요! 진짜 시안이 올 때까지는 기숙사를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내 말 알아들었죠?”
두 사람은 목이 떨어질 만큼 고개를 끄덕였으며 그러곤 도망치듯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우와! 나 진짜 떨렸어! 시리카님 화나면 엄청 무섭구나· 안 그래 브라이언?”
“서 설마 도련님보다 더 무서운 분이 계실 줄은····”
조금 전의 공포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브라이언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우리 이제 어떡해? 또 방에만 계속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할 것 같아· 도련님께서도 늦어야 일주일이라 했으니 조금 더 기다리다 보면 오시진 않을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복도를 걷던 둘은 이내 또 한 번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산 넘어 산 시련 뒤에 또 다른 시련이 있다고 했던가?
그들로선 마주치면 꺼릴 또 한 명의 여인과 마주치고 말았다·
“시안?”
제국의 황녀이자 이제는 시안의 약혼녀가 된 아린이었다·
그 옆엔 레시무스도 자리하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만남에 그녀들도 놀랐는지 차마 지나치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금 시안으로서의 정체성이 돌아온 나나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그러곤 더 이상의 말 없이 브라이언과 함께 아린을 지나쳤다·
만나면 일절의 대화 없이 인사만 하고 헤어지라 했던 시안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별다른 해프닝 없이 잘 지나가나 싶은 순간
“저기 시안?”
아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불러 세웠다·
나나와 브라이언은 자동으로 몸이 돌아갔다·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대 대화 말입니까?”
둘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황녀와는 절대 말을 섞지 말라며 시안이 신신당부까지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다 보니 머리가 하얘져 버렸다·
그동안 자신과도 꽤 각별하게 지낸 사이가 아니던가?
맛있는 과자도 주고 심심할 때면 놀러 와서 재밌는 얘기도 해준 소중한 사람을 이리 무심하게 지나쳐야 한다니·
나나로서도 매우 편치 않은 일이었다·
“시간 괜찮지?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면 방으로 갈까? 그러고 보니 나나 본 지도 꽤 됐네? 괜찮다면 네 방에서····”
“화 황녀님 방으로 가겠습니다!”
“···?”
덩달아 놀란 브라이언과 레시무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내 내 방에서?”
“안 됩니까?”
뒤늦게 화들짝 놀란 아린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안 되긴! 돼! 되고말고! 내 방으로 가자!”
그녀의 불안했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머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을게 천천히 와줘!”
아린은 황급히 몸을 돌리며 급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화 황녀님! 천천히 가주세요!”
그 뒤를 레시무스가 황급히 뒤따랐다·
다시금 복도에 남겨진 나나와 브라이언·
나나는 멋쩍은 마음에 얼굴을 긁적이며 물었다·
“나 잘못한 거야 브라이언?”
“어 일단은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냥 아린 언니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아무리 내가 파파 행세를 하고 있다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건 싫어! 대체 왜 아린 언니를 이렇게 대해야만 하는 거야?”
“그 그야 도련님이 지시하셨으니····”
“파파랑 아린 언니 곧 결혼할 사이 아니야? 결혼할 사람들이 말도 안 하고 지낸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거잖아! 안 그래 브라이언?”
나나의 뛰어난 언변에 브라이언은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뭐 도련님이 아니라는 것만 들키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이미 저지른 일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
시안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둘은 아린의 방이 있는 로열관으로 향했다·
나나를 처음 들켰던 2년 전 이후 다시 오게 된 아린의 방·
황녀의 방답게 정갈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졌다·
자리에 아린은 3초 정도를 머뭇거린 뒤 짧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자리를 진즉에 가졌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우유부단하다 보니 그러질 못했네· 미안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나나는 최대한 시안의 말투를 흉내 내며 답했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난 시안과의 약혼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예···?”
나나와 브라이언의 동공이 거의 동시에 흔들렸다·
“다 다른 뜻은 없어! 알다시피 난 시안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왔으니까· 너와 약혼하면 필시 그 바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물론 시안 너는 그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진 않겠지만····”
“왜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황녀로서도 황실의 일원으로서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나잖아· 넌 내게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반대로 난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어· 오히려 피해만 주겠지····”
나나는 순간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녀가 알고 있는 아린은 분명 착하고 능력도 있을뿐더러 자신과 마찬가지로 파파를 생각하는 마음도 넓은 사람이 아니던가?
허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꼭 시안이 아린을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안이 아린을 싫어한다?
나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시안은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상냥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닌 아린에게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했다·
다만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것뿐·
이에 나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
“전 사실 황녀님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습니다·”
“···어?”
귀를 의심한 아린은 눈을 깜빡였다·
“황녀님은 분명 능력 있는 분입니다· 제가 감당하기에도 벅찰 만큼 말이죠· 저 또한 황녀님과의 약혼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마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리라 생각조차 못 했던 상황·
사실상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시안으로부터 이리도 호의적인 말을 들은 것이·
과연 눈앞에 있는 소년이 정말로 시안인 건지 의심마저 생길 정도였다·
“지 진심이니 시안?”
“물론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
드디어 시안으로부터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린은 복받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나머지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뭔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는데 그게 전부 사라진 느낌이네·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시안····”
마음 한켠에 쌓여있던 굳은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기분·
아린은 그 어떤 웃음보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덩달아 기분 좋아진 나나도 생긋이 웃으며 옆에 있던 브라이언에게 속삭였다·
“나 잘했지 브라이언?”
허나 브라이언은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지금 나나가 황녀에게 전한 말들은 무엇인가?
진짜 시안이라면 절대 거짓말로도 하지 않을 매우 위험한 언행이었다·
애초에 시안은 아린과의 약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그녀와 대화하지 말라 한 것도 일종의 거리를 두기 위한 조치였거늘 이제와 황녀의 마음을 감동시킬 말을 하다니·
브라이언은 시안이 돌아오면 이 사태를 어찌 설명해야할지 벌써부터 두려움이 차올랐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나랑 밥 먹을 시간이 돼서요·”
“그 그래! 나나가 많이 배고파하겠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난 나나는 뭔가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대뜸 아린의 손을 붙잡았다·
“뭐 뭐 하는?!”
아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너무 낙담한 얼굴로 지내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세요· 황녀님은 이미 충분히 멋진 사람이니까요·”
“시안····”
아린의 눈가로 감동을 머금은 이슬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름 시안과 아린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는 것에 나나는 속으로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임무(?)를 완수한 뒤 미련 없이 떠나려는 순간
“근데 시안···?”
나가려는 둘을 아린이 다시금 붙잡았다·
이전과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엔 다소 의문이 담겨있었다·
“너 왜 꼬리가 달려있는 거야?”
* * *
혼란스러웠던 아카데미와 도시의 분위기가 다소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출입을 꺼려했던 상인들이 하나둘 루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며 하루의 끝이 다가올 무렵·
검문을 마친 다섯 명의 상인들이 옷감 식료품 마법 재료 등이 실린 마차를 이끌며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도시 주변을 둘러보던 상인들은 이내 왁자지껄한 시장이 아닌 인적 드문 뒷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째 전에 왔을 때보다 검문이 더 빡세진 느낌인데? 이 의뢰 정말 진행해도 되는 거유? 영 찝찝하면서도 불안하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구나· 제이슨· 네놈이 제일 들떠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선두에 있던 갈색 수염의 남성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물론 그렇긴 하지· 일반 귀족도 아닌 무려 황실에서 준 의뢰잖수? 선금만 해도 몇 년을 놀고먹을 돈인데 일 끝나고 받을 잔여금까지 생각하면 흥분을 안 할 수가 없지·”
“입조심 해라 제이슨! 보는 이가 없다 해도 되도록이면 이 도시 안에서 황실과 관련된 건 언급하지 마라·”
“알아요! 알아! 그래서 우리가 죽여야 할 놈이 누구라고?”
갈색 수염의 남성은 입을 열기 전에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내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바로 도청 방지 마법을 시전 했다·
“타깃의 이름은 시안 베르트· 대륙의 수호자라 불리는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아들이다· 의뢰인 쪽에선 흔적을 최대한 잔인하게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 몸을 수십 조각으로 토막 내도 좋고 벌거벗은 채로 저잣거리에 내놔도 좋다 하더군· 아무튼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이 분노할 수 있도록 말이야·”
“어지간히 미친 의뢰네! 그래서 더 맘에 들어! 그럼 그 시안이란 공자 내가 좀 데리고 놀아도 되는 거지?”
“뭐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번만큼은 고려해보지· 내 용병일 20년 하면서 네놈만큼 극악무도한 취미를 가진 놈은 못 봤으니 말이다·”
완전하진 않은 반 정도의 승낙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제이슨은 그 자리에서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같은 동료들조차 소름이 돋은 듯 전부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시안 베르트라···· 귀엽게 생겼으면 좋겠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