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진리 (2)
하늘은 사람에게 딱 세 번 일생일대의 기회를 준다고 한다·
카론은 이 낯선 타국에서 루나브를 마주친 순간 그 일생일대의 기회가 자신에게 왔음을 단번에 자각했다·
맘에도 없는 거짓된 마음으로 가람 학회에 존속해왔던 지난 20년·
그동안 마법 발전의 의의를 필요성 없는 열등한 인간들에게까지 적용하려 했던 학회의 이상향에 거부감을 느껴 뛰쳐나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버티고 버텨 마침내 학회에 2인자에 오를 수 있던 원동력은 단 하나·
리겐스 학회장의 손녀이자 학회의 희망이라고 불렸던 루나브 레인리버 덕분이었다·
이 어둡고 가능성 없는 학회에 나타난 한 줄기의 빛·
세상에 이렇게 경이로우면서도 완벽한 존재가 있을까?
그 어떤 꽃과 보석을 비유한대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순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히 최고의 재능·
그녀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올바르게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필시 드래곤 마족 더 나아가 지고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로 성장할 것임을 카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학회는 그런 희망적 존재를 그동안 너무나 가혹하게 다뤄왔다·
이대로 간다면 완전한 꽃을 피우기도 전에 줄기가 꺾어지고 말 터·
그럴 순 없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또다시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지금이 바로 하늘이 내려준 두 번 다신 없을 기회·
다소 무의미한 저항은 있었으나 사실 7성급에 달하는 자신의 마력을 상대로 이렇게 버틴 것도 엄청난 일이다·
이제는 그녀가 가진 가능성을 자신이 세상 밖으로 제대로 실현시킬 차례·
“이때를 기다렸습니다· 루나브님····”
카론의 입가로부터 그동안 가면 속에 감춰져 있던 환희의 미소가 드러났다·
흥분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마침내 그녀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순간
카론을 포함한 학회원들의 눈이 번뜩 뜨였다·
“···!”
아무런 기척이나 조짐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샌가 나타나 버린 의문의 존재·
뒷모습에서 풍기는 서늘하고도 괴기스런 기운이 오감을 자극했으며 이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매우 낯선 기운이었다·
게다가 그 존재는 학회원들에게 있어 초면이 아니었다·
“시 시안 베르트?”
루나브의 동행인이자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
시안이었다·
* * *
가관이다·
너무 가관이다 못해 이 상황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통 감이 서지 않는다·
대충 뭔 일이 있었는지는 보인다·
빛 속성 방어마법 저항의 벽을 펼치고 있던 루나브
그 벽을 무너트리기 위해 마력으로 제압하고 있던 카론·
우리 후배님께서 아무리 괴물 소리를 들을 만큼 천재라곤 하나 수십 년간 마법을 연구하고 단련해온 전문가를 감당할 순 없다·
그걸 본인도 모르진 않았겠지·
허나 그녀는 몸 안에 남은 마지막 마나까지 모두 쥐어짜 벽을 유지했으며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거짓말같이 바로 쓰러져버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미소까지 보이면서·
누가 보면 희망의 구원자라도 온 줄 알겠군·
뭐 솔직한 마음으로 그녀가 얌전히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포기하고 얌전히 응했더라면 저리 쓰러질 일도 없었을 마당에
뭐 그렇게 자기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저항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못 살 몸이라며 무기력하게 있을 땐 언제고
지금은 살 의지가 철철 넘치다 못해 하늘로 치솟을 지경이네·
“시 시안 베르트?”
나를 발견한 그들이 저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왜 여기 있는지를 도통 모르겠다는 눈빛들·
저런 같지도 않는 놈들의 어리둥절한 반응 따위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쓰러져있는 루나브의 얼굴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1% 아니 0·5% 정도·
그야말로 체내에 있는 마나를 하나도 남김없이 끌어다 썼다·
그나마 그녀이기에 99% 까지 죄다 끌어 쓴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한참 전에 기절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진짜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후배님이 아닐 수 없다·
“그 손 떼십시오····”
꽤나 살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누가 그러더라·
사람에게 있어 가장 탐나는 보물은 돈이나 보석이 아닌 다름 아닌 사람이라고·
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미인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능력자 등·
사람이란 보물은 단순히 옆에 있어 주는 걸 넘어 소유자의 인생 자체를 변화시켜줄 수 있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것이라 했다·
나도 내가 그런 줄 알았지·
어쩌면 보물에서 폐기물로 전락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이들도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 루나브 레인리버라는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이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거라 본다·
“그냥 못 본 척 조용히 돌아 가주십시오· 지금이라면 저희 또한 당신을 그냥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다·
마수는 어떻게 처치한 건지 통로에 있던 동료들은 어떻게 된 건지 이곳엔 어떻게 오게 된 건지 등·
하기야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남발하는 것보단 낫다고 본다·
“오해할만한 광경이긴 해도 그녀를 걱정하실 필욘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서 그대의 할 일을 하시지요· 시안 베르트····”
구구절절한 설명은 들을 필요가 없으며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한 말투·
피차 마찬가지다·
나도 저들이 뭘 원하고 뭘 꾸미려 하는지에 대해선 알고 싶지도 않으며 참견할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내 일이 아닐 땐 쥐뿔도 관심 없다가도 나와 조금이라도 엮이면 금세 돌변한다는 거·
나쁜 건 아니라고 본다·
이 지랄 맞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니·
놈의 말마따나 지들 학회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뭘 계획하고 있던 간에 나와 관련이 없으면 굳이 오지랖을 부릴 필요가 없다·
그래 분명히 그럴 테지·
휘말리면 귀찮을 사사로운 일 따윈 일체 관심조차 주지 않을 나인데
어차피 뒤 돌면 남 더 이상 내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하겠다·
머리는 부정하는데 몸은 움직이는 그런 경우도 아닌
그냥 나라는 인격 자체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싫다면?”
-파직!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의 손에서 순간 스파크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새하얀 번개가 번쩍였다·
어쭙잖은 위협용이 아닌 엄연히 날 죽일 작정으로 쓴 마법이다·
물론 이따위 마법에 눈 하나 깜짝할 내가 아니지만····
“시 심판의 번개가?”
일단 발에 불이 붙을 만큼 달려오긴 했다만 천상 그녀를 데리고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 이상의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럼 목격자도 여럿 남길뿐더러 다방면으로 골치 아파지겠지·
하지만 이미 나에게 살의까지 보인 놈들을 상대로 어중간한 대처는 화만 부를 뿐 도움 될 게 없다·
그렇다면 답은 더욱 간단해진다·
전부 죽이면 되지·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고 빠르게 뒤처리만 한다면 괜찮지 않겠는가?
원래 급박한 상황에 생각은 오래 하지 말라 했다·
그냥 되는 대로 저지르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이치이며 지금껏 계속 그래왔다·
마음을 정한 순간 바로 케이람을 꺼내 들었다·
“암무 6식: 무(霧)의 공간·”
주문과 동시에 학회원들이 서있는 발아래로부터 검은 안개가 드리워졌다·
나름 영광이라면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곳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구경조차 못 할 신의 아공간·
의미 없는 돌바닥이 아닌 이런 신성한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데 무척이나 황홀한 일이지 않겠는가?
“겨 결계 해제!”
일부는 제한 결계라고 생성했는지 애먼 곳에다가 마력을 남발했다·
뭐 잘못된 방법은 아니다·
그들의 마력이 내 안개의 힘을 뛰어넘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면 얼마든지 파훼할 수 있겠지·
허나 그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뭐 뭐야 이게?”
그나마 아직까진 정상적인 눈을 유지하고 있는 카론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 어둠 속성 마법? 아니야 이런 더럽고 추악한 기운이 마력일 리 없어! 이건 필시····”
시궁창에 있다 보면 시궁창 냄새에 무뎌지게 된다지·
나야 이 칙칙한 기운에 적응된 나머지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난다지만 가끔은 무슨 기준으로다가 이 힘을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 표현하는 건지 참 의문이 든다·
“시안 베르트!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당신 따위가 어찌 이런 힘을?”
“뭘 새삼스럽게 그래? 니들 학회에서도 나 주시하고 있었다며 그럼 뭘 숨기고 있다는 거쯤은 어느 정도 예상한 거 아니야?”
순간 카론을 비롯한 학회원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 그걸 어떻게?”
“쟤가 다 말해주더라·”
쓰러져 있는 루나브를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 말도 안 돼! 어째서 루나브님이 당신에게? 대체 왜! 설마 루나브님이 학회에 배신을?”
배신?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도 안 나온다·
지들이 배신이라고 느낄 만큼 그녀에게 신뢰를 주긴 한 건가?
그녀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은 수식어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뛰어나다·
그뿐이야?
나란 놈조차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똑똑하면서도 현실적이지·
사막 한가운데에 던져놔도 혈혈단신의 몸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여자다·
그런 여자가 수상하기 그지없는 나란 놈에게 단순히 좋다는 이유로 모든 걸 퍼주고 있다·
왜? 그녀는 니들이 잘 되거나 망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닌
그냥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 는 무가치한 존재로 보고 있으니까·
이건 순전히 네놈들이 자초한 거다·
“가람 학회의 이단 아우람 학회 소속 마법사 카론 레인즈·”
“···!”
마법의 발전을 인간 모두에게 적용시키려 하는 가람 학회의 이상향에 반발심을 느끼고 이에 반하는 조직에 가담했지· 마법은 능력 있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산유물이라고 했던가?”
“그 그걸 당신이 왜?”
왜긴 왜야?
궁금하면 자랑하듯 떠벌리고 다녔던 전생의 네놈한테나 물어보던지·
“내가 볼 땐 니들 다 똑같아· 내가 장담하는데 너희 쟤 데려가봤자 쟤가 가진 가능성 온전하게 못 끌어낼걸?”
“당신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겁니까!”
“나도 모르니까 지껄이는 거야·”
“···?”
“인생 지랄 맞게 산 나조차 끝이 안 보일만큼의 가능성을 가진 후배님인데 저 여린 몸에 얼마나 많은 잠재능력을 지니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냐고?”
그걸 너희 같은 놈들이 빛도 못 보게 망쳐버려서 문제지·
마법의 발전? 인간의 이상?
감히 추측하건대 그냥 놔두면 그녀 혼자 알아서 다 이뤄낼지도 모른다·
꽃잎은 인고의 시간을 거쳐 스스로 만개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그 시간을 단축시키고자 억지로 피게 한다면 아무런 의미 없이 망쳐질 뿐이지·
만약 네놈들도 나처럼 다음 생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때는 이 진리를 꼭 머릿속에 새겨두길 바란다·
“아아아악!”
무지의 검은 안개 속에서 울려 퍼지는 절규에 찬 비명·
허나 안타깝게도 그 비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서····
* * *
깜깜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별 하나 뜨지 않은 어두운 밤하늘처럼·
작은 희망조차 남지 않은 자신의 미래처럼·
그런 침울한 공간 안으로부터 갑자기 낯선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칙칙하면서도 음산함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 흐름을 느끼려 하니 안개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포근함·
이 검은 안개는 대체 무엇이길래 자신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걸까?
아예 몸을 던져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따뜻하면서도 편안했다·
그 기분에 심취해 살며시 눈을 감으니
이윽고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후배님····”
따뜻함이라곤 먼지만큼도 안 느껴지는 무심한 부름·
루나브는 바로 눈을 떴다·
“돌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
웃으라고 한 말인진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뭔가 크게 깨달은 것이라도 있는 듯 루나브는 본인의 몸을 감싸 안고 있는 시안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선배죠?”
“뭘?”
“괴한들에게 납치당한 날 구해줬던 사람 그거 선배 맞죠?”
시안은 입은 벌어진 상태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덩달아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는 한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선배잖아! 내 몸에서 하트 커브 떼 준 사람!!”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무거워지며 예기치 못한 적막함이 흘렀다·
루나브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또렷한 눈동자로 시안의 당황한 눈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