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이름 없는 유적 (3)
주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그늘 진 어둠 속·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카론은 바로 도청 방지 결계를 생성했다·
루나브는 덤덤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회에선 루나브님이 여기 계신 걸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면 제가 여기 있을 리가 없겠죠·”
알면서 왜 묻냐는 듯한 말투였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카론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루나브님의 이런 단독행동이 학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아직도 모르시는 겁니까? 일전엔 불미스러운 일까지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결과적으론 멀쩡히 잘 살아 있잖아요·”
그녀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제가 장담하는데 아카데미에서 교관을 제외하고 저 남자들 보다 든든한 사람은 없어요· 나름 절 지켜줄 수 있는 최강의 수호 기사들과 함께 온 거예요·”
카론은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였다·
루나브 또한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서의 진위를 확인하러 오신 겁니까?”
“이 이름 없는 유적에 사는 괴생명체의 이름이 마서의 이름과 동일하다죠? 저 또한 마법의 발전을 추구하는 학회의 일원으로서 그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동행을 요청한 것도 저였고 어차피 제 동행인들은 거기 사는 생명체에 관심이 있을 뿐 마서에 대해선 관심도 없어요·”
루나브의 말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에 카론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학회에 보고는 미루겠습니다· 허나 루나브님이 여기 계시다는 걸 제가 감출 거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일이 끝나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학회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세요·”
그녀는 상관없다는 의사를 보이며 결계 밖으로 나갔다·
“저 시안이란 남자도 마서에 대해 모르는 겁니까?”
“알면 같이 오지도 않았죠·”
시선조차 주지 않은 무심한 대답을 끝으로 루나브는 다시 시안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솔직히 건전한 정보수집보단 강압적인 조사를 예상했었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불순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저 환호와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들을 보라·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온 누군가를 참으로 무안하게 만들 광경·
그 모습을 지켜본 세트는 어이없는 마음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 세트 왕자님?!”
그를 발견한 일부 주민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마을에서 사고를 치고 쫓겨난 망나니를 다시 본 것처럼·
참다 참다 폭발한 세트가 마침내 그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아 다들 귀신이라도 봤어? 왜 사람 얼굴을 그런 식으로 보는 거야!?”
희끗희끗한 머리의 연로한 남성이 대단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또 뭘 부수러 오셨소· 세트 왕자?”
“부수긴 뭘 부숴? 내가 무슨 망나니인줄 알아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주민들의 반응이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 녀석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꽤나 상습적인 사고뭉치였던 모양이다·
“참나 간만에 고향에 온 사람을 반겨 주긴커녕 몹쓸 말이나 하고 있고· 진짜 정나미 없는 마을이라니까?”
“고향?”
“아 너한텐 설명 안 했구나? 난 이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 그래서 여기 주민들 얼굴은 웬만해서 다 알아! 저 할아범은 이 마을의 촌장이고·”
“왕성 놔두고 굳이 왜?”
“아 그건 그러니까 뭐 개인적인 사정!”
녀석답지 않게 딱 잘라 끊는 걸 보니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보였다·
그럼 조금 전엔 단순 왕자로서가 아닌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주민들을 위해 분노했다는 건가?
비꼬려는 건 아니다·
왕족으로서 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바보 왕자뿐만이 아닌 아카데미에 계시는 어느 황녀님께서도 발 벗고 뛰쳐나가셨겠지·
“그건 그렇고 이게 다 뭐요· 할아범?”
“가람 왕국의 무슨 학회에서 온 사람들이라는데 우리 마을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면서 대뜸 선물을 주더이다·”
외딴 마을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식재료 옷 생활용품 등 가람 왕국의 특산품들이 여러 보따리에 나누어져 있었다·
“아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놈들이 주는 걸 덜컥 받아요? 이 사람들 큰일 날 사람들이네 진짜?”
뭐 사실 강압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이상하다고 본다·
가람 학회원들에게 있어 이곳은 엄연한 타국의 마을·
적당한 회유와 보상을 통해 주민들의 입을 원하는 대로 조절해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강압적인 조사는 스파니아 왕국에게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참나 뭔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부리나케 달려왔더니만 아주 놀자 판을 벌이고 있었네·”
세트는 푸념을 내뱉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니 내심 안심한 듯 보였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소· 세트 왕자? 지금이라면 아카데미인지 뭔지 하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유적에 사는 마수 놈이랑 한판 더 붙으러 왔지! 이번엔 같이 싸워줄 동료도 데리고 왔다고!”
“거 멀쩡히 잘 있는 놈은 왜 자꾸 건드려는 건지· 아무튼 그 카론이라는 자와 똑같은 목적으로 오신 것 같구려· 그자도 그 유적에 사는 마수에 관해서 묻더이다·”
때마침 카론과 대화를 마친 루나브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오자마자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얘기 잘 끝냈어요·”
내게 안심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정말 잘 끝낸 거 맞아?”
“적어도 선배에게 피해는 없을 거예요·”
그건 네 입장에선 잘 된 게 아닐 텐데?
뭐 둘이 대화를 하러 간단 시점에서 그녀가 어떤 식으로 해명할진 이미 예상은 했다·
이 예기치 못한 만남의 결말이 어떻게 이어질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평화적인 선에서 끝나진 않을 거란 걸 몸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세상 살다보니 참 별일이군· 이름도 모를 저 방치된 유적에 이리 관심이 몰릴 줄이야· 이쪽으로 오시오· 모이신 김에 내 유적에 대해서 이야기 해드리리다·
촌장은 우리를 비롯한 학회의 일부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쪽 나리들로선 참으로 운이 좋았소· 사실 내 쪽에서도 난감하던 참이었거든·”
“무슨 말이신지?”
“그 유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오· 유적의 허가가 있어야지 만이 들어갈 수 있소·”
“허가? 그런 게 있었어?”
세트는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유적은 신마전쟁 이전에 세워진 구시대의 유적이오·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로선 전혀 알 길이 없지· 다만 대대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유적에 출입하기 위해선 신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현재 그 조건을 갖추는 이들은 모래 신 사불롬님을 숭배하는 샤하르칸 일족으로만 알려져 있소·”
“뭐야 할아범! 나한테 그런 얘기한 적 없잖아?”
“애초에 당신은 물은 적도 없잖소· 세트 왕자? 내 설명을 듣기 전에 멋대로 들어가 놓고선····”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한숨을 내쉬는 촌장의 마음이 내심 이해가 갔다·
“정리하자면 그 유적에 들어가기 위해선 샤하르칸의 일족의 도움이 필요하오· 세트 왕자와 같이 오신 분들이야 별문제가 없겠다만 연관이 전혀 없으신 그쪽들로선····”
세트의 허가가 있어야지 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즉 유적에 모든 주도권은 현재 이 바보 왕자에게 있었다·
이를 깨달은 카론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이! 그쪽도 유적에 들어가고 싶은 거요?”
예상외로 세트 녀석이 먼저 의사를 물었다·
“그렇습니다·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들로서 단순히 유적에 서린 마력을 탐구하려는 것뿐입니다· 어떤 불순한 목적도 없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나는 물론 루나브도 알고 있었다·
허나 반박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기에 지금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좋아!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거 그쪽 학회를 포함해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주쇼! 그럼 내 기꺼이 당신들을 유적에 동행시켜주지!”
학회원들은 물론 나와 촌장 그리고 루나브까지·
세트가 내린 의외의 결정에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카론은 차마 바로 답하지 못했다·
“못하겠어? 못하겠음 그냥 짐 싸들고 돌아가던가! 난 상관없으니까·”
“무 무엇 때문에 그런 조건을 요구하시는 건지····”
일단 이유라도 들어보자는 의사였다·
“별거 없어! 나랑 시안은 체험학습을 신청해서 합법적으로 온 거지만 저 친구는 아니거든! 몰래 온 입장에서 혹여나 딴 사람 귀에 들어간다면 좋을 게 없잖아?”
속으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이 바보야 여전히 체험학습이 허가된 거로 알고 있겠지만 엄연히 말하면 우리 셋 다 몰래 온 거다·
그런 와중에 그녀를 배려해주겠답시고 이런 조건을 내걸다니
분명 멋있는 광경이긴 한데 어째서인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알겠습니다· 유서 깊은 가람 왕국 마법학회의 이름을 걸고 여러분이 여기 계셨다는 사실을 학회를 비롯해 어디에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못내 고심하던 카론은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루나브는 조심스레 세트를 쳐다보았다·
-찡긋
녀석이 의미 모를 괴상한 눈웃음으로 화답하니 그녀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고맙다기보단 그 끝을 알 수 없는 멍청함에 나처럼 안타까워하는 듯 보였다·
“대충 이야기는 잘 되신 것 같구려· 그럼 내 마지막으로 그 유적에 대해 경고 하나만 해드리겠소·”
잠자코 있던 촌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안에 사는 마수는 굉장히 순한 놈이오· 선을 넘지 않으면 쫓아내려 할 뿐 쫓아오거나 하진 않을 것이오· 다만 그 선을 넘으려 한다면··· 내 뒤는 장담하지 못하겠소·”
촌장은 말끝을 흐리며 놈에 대한 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동자를 돌려 대각선 방향에 있는 카론을 쳐다보았다·
“····”
그의 정제된 눈빛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선을 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돋보이고 있었다·
* * *
세트 왕자와 합의도 했고 촌장으로부터 경고도 들었으니 이제는 유적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학회의 총책임자 카론은 캠프로 돌아와 탐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기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한 학회원이 캠프 안으로 들어왔다·
“저 카론님?”
“무슨 일입니까?”
“정말 학회에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또한 조금 전 카론과 함께 촌장의 대화를 들은 일원 중 한 사람이었다·
“세트 왕자와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합의한 대로 이행할 뿐입니다·”
“하 하지만····”
“어쨌건 저희에겐 잘 된 일입니다· 잠긴 유적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열쇠가 와준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기회까지 찾아왔으니까요·”
“예?”
말을 이해하지 못한 학회원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가까이 오시지요·”
그가 두어 걸음 정도 가까이 다가가니 카론은 바로 도청 방지 결계를 생성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설사 마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순 있을지언정 마서 자체는 이 유적에 없을 겁니다·”
이는 카론뿐만이 아닌 조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관계자 역시 예상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지금 즉시 학회에 전령을 보내세요·”
무표정하게 있던 카론의 얼굴에 갑자기 섬뜩한 미소가 지어졌다·
“리겐스 학회장의 손녀 루나브 레인리버를··· 다시 한 번 납치하겠다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