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징조 (2)
퀴젤 가의 영지에서 꼬박 하루를 달려 세벨리너스에 도착한 쿤델·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이자 대륙에 얼마 없는 9성급 대현자의 방문인 만큼 황실에서도 귀빈 대우로 맞이해주었다·
쿤델의 방문 목적은 단연 황제와의 만남이었으나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황제로부터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이에 황궁 내에서 하염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의 만남은 아직 어려운 거요?”
“조금 호전되시는가 싶더니 다시 발작이 일어나신 모양입니다· 송구합니다만 황제 폐하와의 독대는 당분간은 어렵지 않을지····”
관계자가 찾아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니 쿤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루이넬 황자는 어쩌고 있소?”
“외 외출을 하진 않으셨으니 방에 계신 거로 압니다만····”
“그럼 황자를 만나러 가겠소·”
쿤델은 망설임 없이 바로 일어났다·
“하 하오나 지금 황자님께선 근신을 자처하신 터라 아무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만····”
“그럼 만날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시오·”
황자의 마음 따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담대한 태도에 관계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쿤델이 자리를 박차며 알현실을 나가려는 순간
“비올렛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황제도 황자도 아닌 제3의 인물이 그를 찾아오고 말았다·
쿤델 또한 예상하지 못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비올렛 황녀가 찾아왔다고?”
그와 동시에 알현실의 문이 열리며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국의 2황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총장님· 아니 외할아버님····”
피가 이어진 혈육이지만 쿤델은 그녀 입에서 나온 외할아버님이란 말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황성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한걸음에 달려오지 않은 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오 오랜만이오· 비올렛 황녀····”
외손녀이긴 해도 그녀의 신분은 엄연한 황녀·
장소도 아카데미가 아닌 황성인 만큼 쿤델은 존대를 서슴지 않았다·
“잠시 외할아버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데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황녀의 지시가 떨어지니 머지않아 둘을 제외한 모두가 방에서 나갔다·
얼떨결에 남겨진 쿤델은 의심 어린 시선으로 2황녀를 바라보았다·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외할아버님· 그러는 편이 말씀하시기 더 수월하실 테니까요·”
“···무슨 생각이냐 비올렛?”
쿤델은 돌릴 것 없이 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일단 앉으세요· 외할아버님의 바쁘신 시간 많이 뺏지는 않겠습니다·”
아카데미에서도 보지 못한 그녀의 외향적인 모습에 쿤델은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번 순방에 저를 위해 수호 기사를 증원해주신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별 탈 없이 무사히 다녀왔어요·”
쿤델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파견한 기사들로부터 순방에 대한 소식을 전해 받은 만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쿤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별 탈 없었다는 황녀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절 경계하고 계시군요·”
이를 눈치챘는지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저를 보시는 외할아버님의 눈빛이 이전과 너무나도 달라서 그렇습니다· 안타깝네요· 지금 외할아버님께서 경계하셔야 할 건 제가 아닐 텐데····”
순간 쿤델이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비올렛 황녀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대로 말을 이었다·
“기사를 보내주신 이유에 제 오라버니가 포함되어 있다는 거 전 이미 알고 있습니다·”
“···!”
“더불어 그곳에서 혼란을 일으켜 절 죽이려 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고요· 외할아버님께선 그걸 방지하기 위해 제게 기사를 보내주신 거겠죠·”
쿤델은 다시금 감정을 제어하며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저를 향한 오라버니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제 나름대로 대비책을 구상해놨었죠· 그것이 온전히 잘 진행된 것 같진 않았지만····”
그 대비책이 무얼 뜻하는지 이 역시 쿤델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절 황제로 만들어주세요· 외할아버님·”
쿤델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지도 못 들었다 싶어 고개를 갸웃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의 입에서 왜 황제라는 말이 나왔는지에 대한 의문만이 얼굴에 가득할 뿐이었다·
“아바마마의 건강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계세요· 병이 도지시는 일도 갈수록 잦아지고 있죠· 하지만 오라버니를 후계로 삼으려는 마음은 아직 굳건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황위의 자리는 오라버니에게 가겠죠·”
현 황후 측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이상 무난하게 흘러갈 흐름이었다·
“하지만 참된 황제가 될 거란 생각은 안 드네요· 그건 외할아버님께서도 잘 아실 테고요·”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 것이냐?”
“그럼 한 번 여쭤볼게요· 외할아버님께선 오라버니가 황제가 되었을 때 저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시나요?”
“····”
쿤델은 차마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화합과 포용력이 없는 황제에게 다가올 미래는 파멸뿐이라 했죠· 오라버니는 황위에 오른 순간 모두를 죽일 거예요· 그런 황제를 외할아버님께선 정말 원하고 계신가요?”
원할 리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비롯한 황제도 마찬가지일 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 다릅니다· 전 진정으로 모두를 포용할 준비가 돼 있어요· 외할아버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제국의 황제···· 전 될 수 있습니다·”
쿤델은 순간 생각했다·
과연 지금 눈을 마주하고 있는 이 여인이 자신이 알던 비올렛 황녀가 맞긴 한 것일까?
지난 6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봐왔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그동안 숨겨졌던 본모습이 이제 와 드러난 건지 알 수 없기에 쿤델로선 의심과 혼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내 자주는 아니어도 그동안 너를 봐오면서 느낀 게 있다·”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넌 어딜 가서도 절대 나설 성향이 아니다· 싸움이 일어나도 그저 지켜보는 걸 즐길 뿐 싸움에 직접 참여하려 들진 않지·”
인정한다는 듯 황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마음이 변한 것이냐?”
이에 비올렛 황녀는 작게 실소하며 말했다·
“별 거 없습니다· 그저 빛을 보았을 뿐이죠·”
“빛?”
“예· 제국을 위한 더 나아가 대륙과 인간들을 위해 가장 높은 곳에 오를 그런 밝은 빛을요····”
쿤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황녀는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하염없이 유지하고 있었다·
* * *
새로 부임한 보리스 교관이 개인 사정으로 휴직을 신청하고 좀처럼 아카데미를 벗어나지 않던 쿤델 총장 또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황성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아카데미에 전해졌다·
학생들의 복귀가 차츰 완료되면서 이제 막 정상화 궤도에 오르려는 와중 또다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해버리니 다시금 교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아린의 시선이 어느 빈자리로 향했다·
개인 사정으로 휴학을 신청한 시안의 자리였다·
“하아····”
자신도 왜 나오는지 모를 한숨과 함께 그녀는 책을 덮었다·
어느덧 열흘째·
휴학도 휴학이지만 언제쯤 복귀할 거라 예고하지도 않은 탓에 자칫하면 이번 학기 내내 못 볼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내 할 일 이나 잘하자는 생각으로 학업에 전념하고 있긴 하나 아린으로선 그래도 비어있는 시안의 자리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드르륵
그런 와중 교실 뒷문이 열렸다·
아린은 다른 학생이 들어왔겠거니 하며 빈자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등 뒤로 한 학생이 지나가는 가 싶더니
“···?!”
그대로 비어있는 시안의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시 시안?!”
깜짝 놀란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시안? 어떻게 된 거야?”
“수업 들으러 왔습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보 복학한 거야?”
“예·”
있던 질문도 사라지게 만들 무심한 단답이었다·
“이 일은 잘 끝났고?”
“예·”
“무슨 일이었는데?”
“개인적인 일입니다·”
늘 그렇듯 무미건조한 반응에 아린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참으로 한결같은 모습·
급기야 자신이 뭘 기대한 걸까 싶은 자책마저 생길 판이었다·
일단 수업 끝나고 더 얘기해보잔 마음에 아린은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업이 끝나고 서둘러 짐을 챙긴 아린이 다시금 시안의 자리를 쳐다보았지만
“어?”
눈에 담긴 것은 주인 없는 빈자리뿐이었다·
이에 당황한 아린이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린님?”
“레 레시무스! 시안 못 봤어?”
“어? 조금 전까지 계셨는데?”
시안은 이미 빛보다 빠른 속도로 교실을 벗어난 상태였다·
“그럼 그렇지·”
이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지경·
아린은 별다른 동요 없이 레시무스와 함께 로열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본관을 나오니 그녀의 앞으로 한 낯선 무리가 나타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황녀 아린 세벨레스님을 뵙습니다·”
얼굴은 낯설었지만 아린은 본능적으로 황성에서 온 사람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신가요?”
“황성에 계신 황제 폐하로부터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 아바마마한테서요?”
어리둥절한 아린의 눈이 크게 번뜩였다·
가끔씩 서신이 온 적은 있었으나 그마저도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지금처럼 사자가 직접 찾아온 적은 이전에 파비앙 네로비앙 형제가 재학 중일 때도 없었던 일이었다·
뭔가 중대한 소식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일단은 사자들과 함께 로열관으로 복귀했다·
황제의 전언은 형형색색의 비단으로 곱게 포개져 있었다·
“후····”
아린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심호흡을 내쉰 뒤 조심스럽게 전언을 꺼내보았다·
초장엔 안부와 더불어 그녀의 아카데미 생활을 걱정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현재 황제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마냥 편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애써 감정을 자제시키며 전언을 천천히 읽어가던 것도 잠시
마지막 장에 쓰인 엄청난 내용을 본 순간 아린은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섰다·
“이 이게 무슨?!”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건 덤이었다·
전언을 잡은 양손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으며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과 함께 사자들을 보며 소리쳤다·
“시 시안이랑··· 약혼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