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징조 (3)
브라이언에겐 하루 중 운동만큼이나 빼먹지 않는 일과가 하나 있다·
바로 아카데미 수신처를 다녀오는 것·
시안의 종자로서 그에게 온 서신이나 물건은 없는지 날마다 확인하고 있으며 온 게 있다면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시안에게 갖다 준다·
물론 내성적인 시안의 성격 상 편지 같은 것이 그리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다·
종종 엘리스로부터 애정이 담긴 안부 편지가 오는 것을 빼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엘리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서신 하나가 와있었다·
발송인의 이름은 딱히 쓰여 있지 않았다·
허나 서신의 뒷면을 확인한 브라이언은 입을 떡하니 벌리며 바로 시안이 있는 로열관으로 달려갔다·
편지 한쪽엔 베르트 가문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도 도련님 서신이 하나 왔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와중에도 서신만큼은 일말의 구겨짐 없이 고이 유지된 상태였다·
“····”
시안은 어디서 보냈는지에 대해 딱히 묻지 않았다·
서신에 찍혀 있는 인장으로 보아 이미 판별을 한 것처럼 보였으며 늘 그렇듯 덤덤하게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의 종자 노릇을 한 지도 어느덧 3년차·
없던 눈치도 이때쯤이면 생겨날 판이라 했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브라이언도 저 편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트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는 거라면 당연히 베르트 가문의 일원이 썼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엘리스가 보낸 편지라면 저리 고급스럽게 포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치 가문의 주인이 가문의 일원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문서 같은 것은 아닐지 브라이언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았다·
“하····”
한숨과 헛웃음의 딱 중간사이·
한눈에 봐도 굉장히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
뭔가 좋지 않은 내용을 읽은 것으로 보였다·
시안은 이후 아무런 말없이 근 10분 동안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급격하게 무거워진 공기·
함부로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은 엄중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브라이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선 채로 굳어버렸다·
-툭
그러던 것도 잠시
시안은 세상 무심한 손짓으로 읽고 있던 서신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나갔다 온다·”
이내 외마디 말만 툭 하니 던진 채 그대로 방을 나가버린 시안·
상황을 이해 못 한 브라이언은 그 자리에서 눈만 깜빡였다·
“뭐예요? 뭔데 그래요?”
한쪽 벽에 기대 상황을 지켜보던 에밀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서신에 뭔가 불편한 내용이라도 있었던 건지····”
“이거 벨리아스에서 온 거 맞죠? 인장까지 찍혀있을 정도면 적어도 첫째 도련님이나 공작님이 보내신 걸 텐데?”
에밀리의 손엔 어느덧 시안이 던진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화 확인하실 생각인가요?”
“네? 아니 뭐 이렇게 무심하게 던지실 정도면 별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설사 내용은 물어볼 수 있을지언정 아무리 그래도 주인의 편지를 몰래 읽다니 브라이언으로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 자제해주십쇼· 에밀리님·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읽기엔 무리가····”
“알죠! 그거야 저도 아는데····”
암만 가벼운 성격의 그녀라지만 그래도 시녀로서의 도의는 있었다·
허나 그런 도의마저 거스르게 할 정도의 강한 호기심에 둘은 차마 편지로부터 시선을 못 떼고 있었다·
“벼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말씀해주시겠죠· 뭐····”
이내 단념한 에밀리는 서신을 소파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미련을 애써 억누른 두 남녀는 다시금 자신들의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끼익
그런 와중 잠에서 깨어난 나나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하아암!”
앙증맞은 하품과 함께 그녀는 자연스레 소파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눈을 비비던 것도 잠시 나나는 곧 자신의 옆에 놓인 한 장의 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
그러고 시간이 지나기를 5분 정도·
그 5분의 시간 동안 나나의 눈은 서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나나야 일어났···?!
잠시 후 다시 거실로 나온 브라이언은 나나의 손에 쥐어진 서신을 발견하고선 몸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이에 나나는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함께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파파 결혼해?”
* * *
[파릇파릇한 새신랑 얼굴이 어째 이리 어두우실까?]
새신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대꾸해봤자 나만 피곤할 걸 알기에 그냥 한숨으로 무마시켰다·
그동안의 행보를 봤을 때 언젠가 올 거라 생각은 했다·
황실 일가의 막내 아린 세벨러스와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 시안 베르트의 약혼·
사실 황족도 아닌 내가 아카데미에서 로열관을 배정받았을 때부터 거의 확정되었다고 봐야겠지·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황녀와 내 나이는 이제 겨우 열셋·
귀족 자제들 사이에선 보통 아카데미 졸업 이전에 약혼하는 것이 관례라곤 하나 그것도 열여섯 빨라 봐야 열다섯 정도에나 하는 것이지 이렇게 이른 시기에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알 만 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단 황가와 공작가 사이의 약혼은 단순히 두 남녀의 결혼만이 아닌 서로를 위한 일종의 지원세력이 될 것을 약조하는 의미가 있다·
즉 나에겐 제국 황실의 부마라는 타이틀이 아린 황녀에겐 베르트 공작가라는 지원 세력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일단 내 입장에선 좋을 게 하나 없다·
이미 황실의 다른 일원들에게도 이 사실이 퍼졌을 터 이제부턴 나를 주시하고 경계하는 눈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사람을 보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은 물론 나에 대한 본격적인 뒷조사 또한 시작되겠지·
그럴수록 내 움직임은 더욱 제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제가 주선하고 아버지가 동의한 이상 내게는 이 약혼을 거부할 권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아린 황녀도 마찬가지·
최악의 상황에서 제일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려 버렸다·
일단 그 일은 잠시 나중으로 제쳐두기로 하고 당장에 해결해야 할 일부터 하고자 한다·
아공간 제일 구석에 위치한 짙은 안개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아에르의 제단·
간만에 찾아온 내 물주님의 보금자리다·
제단에 발을 들임과 동시에 드리워졌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케이람이나 너나 어째 날 찾아오는 이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오는 법이 없구나·)
정색에 가까운 표정의 나를 보며 아에르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웃을 상황을 당신이 좀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반쯤 진심 섞인 대답이었다·
“시간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어딨어? 성서의 주인?”
(····)
아에르는 바로 답하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라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알면서도 나나 당주에게 말하지 않았지· 고로 이런 사태가 발생해 버렸고····”
오묘한 미소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아에르의 눈동자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진 대강 알 수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에르는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신계에서 배척당한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신으로서의 본질이 사라진 건 아니지· 인간이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부정당했다 해서 짐승이 되진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맞는 말이다·
내가 여태 죽여 왔던 놈들이 사람 취급도 못 받을 쓰레기였다곤 하나 사람으로서의 본질 자체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지·
하물며 우리 지고한 신들께서도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신들 사이에는 탄생한 순간부터 거스를 수 없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규칙?”
(그래· 서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절대 신 이외의 존재에게 발설해선 안 된다는 것이지· 이걸 어길 시 단순히 배척당하는 걸로 끝나진 않는다·)
“어떻게 되는데?”
(소멸한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답변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뒤에 있는 케이람에게 향했다·
(하물며 네가 만난 그 성서의 주인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성서 또한 케이람의 존재를 알면서도 발설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입을 다물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검과 성서는 결국 신의 힘으로부터 탄생한 자식과도 같은 만큼 엄연히 신적인 존재로 봐야 할 것이다·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지고하다 못해 두려울 게 없는 분들께서 뭐가 무서워 아랫것들에게 입단속을 시키는 거지?
그것도 까딱하면 존재 자체를 없애버릴 정도의 엄청난 제약까지 걸면서?
지금의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두려운 것이냐? 성서의 주인으로부터 네 존재가 드러날까 봐?)
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딱히 두려운 건 아닌데 그렇다고 신경이 안 쓰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기운·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해한다· 신경 쓰이는 거겠지· 네 정체가 탄로 남으로써 주변인들에게 퍼질 여파를 말이다·)
정곡을 찔린 느낌이라도 든 것일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에르의 말마따나 내 정체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선 나는 딱히 문제가 없다·
그렇다 해서 세상이 날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언제부턴지 내 주변에 하나둘 지켜야 할 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 몸 하나만을 최우선으로 간수해야하는 암살자에게 지켜야 할 것이라니 웃어넘길 농담도 못 되지·
남을 위해 살던 인생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내가 아니던가?
구차한 부정 따윈 하고 싶지 않다·
전생엔 그 악마 자식 하나만 바라봤던 것과 달리 지금의 난 이 두 손에 담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고민할게 뭐 있고 문제 삼을 게 뭐 있겠는가?
그걸 지키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고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있다면
모조리 찾아서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상관없이·
(이거 뭐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하겠군· 눈빛만 봤을 땐 신도 죽일 기세로구나·)
아에르는 그런 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결론 내리자면 당신도 딱히 말해줄 생각은 없다는 거지?”
정황상 안 해주는 게 아니라 못 해주는 것에 가깝겠지·
결국은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니 더 이상 그를 붙잡고 늘어져 봐야 소득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지켜야 할 게 많아질수록 이를 위협하는 적들도 많아지는 법이지· 성서의 주인도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겠느냐?)
“무슨 말이야?”
(너를 도와주는 아군을 만들라는 의미다·)
다시 몸을 돌린 나를 보며 아에르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제안하기라도 하려는 듯·
(마서(魔書)를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