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성서 (3)
어딘가 우중충한 오후의 아카데미 도서관·
수업 자료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아린은 문득 서고 한쪽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였다·
‘루나브?’
그녀도 그녀였지만 손에 쥐고 있는 책에 차마 눈이 안갈 수 없었다·
두툼한 솜이불을 떠오르게 하는 엄청나게 두꺼운 양장본·
한눈에 봐도 학생이 읽을만한 책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와는 또 어울려 보였다·
이에 아린은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히 다가갔다·
“안녕 루나브?”
갑작스런 인사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아린의 인기척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
“미 미안! 혹시 독서 중에 방해됐어?”
“아뇨 괜찮아요· 이미 읽었던 책이라 딱히 집중해서 읽고 있진 않았어요·”
아린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 읽었던 책이라고?”
“네· 한 세 번 정도 봤던 걸로 기억해요· 간만에 생각나서 다시 정독 중이었는데 역시 예전만큼 흥미롭진 않네요·”
더 읽을 가치를 못 느꼈는지 루나브는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두었다·
“채 책 읽는 걸 좋아하나 봐?”
“네 뭐 학회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거라곤 독서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그래도 방금 일던 책 굉장히 어려워 보이던데····”
겉만 봐선 아카데미 연구진들이나 읽을법한 책이었다·
“딱히요? 여기 있는 책들 전부 한 번씩은 다 읽은 것들이에요·”
다른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면 허풍이라며 무시했겠지만 아린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여 여기 있는 것들을 다?!”
“네 학회에도 책은 많았으니까요· 거기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거라곤 독서랑 마법 실··· 아무튼 그랬어요·”
“대 대단하다····”
뭔가 뒷말을 얼버무린 것 같긴 하나 아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시안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루나브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굉장히 지루해 보였다·
“그럼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해보는 건 어때?”
“신청이요?”
“응! 원하는 책을 적어서 사서관님에게 신청하면 구해주시다고 들었거든· 루나브도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거잖아?”
“뭐 그야 그렇긴 하지만····”
아린의 말에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루나브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요· 신청한다 해도 아마 아카데미에선 못 구해다 줄 거예요·”
“그래? 책 이름이 뭔데?”
책 이름을 묻자 루나브는 살짝 머뭇거렸다·
“히스크레아요····”
책 이름 치곤 뭔가 사람 이름 같았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하나 좀처럼 떠오르진 않았다·
“뭔가 이름만 들었을 땐 굉장히 난해할 것 같은 책이네?”
“꼭 그렇지도 않아요· 지은이가 좀 특별해서 그렇지····”
“특별하다고? 어떤 사람이 쓴 건데?”
“사람이 아니에요····”
아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사 사람이 아니라고?”
“네· 그냥 저희보다 조금 위에 있는 분들께서 쓰신 마법 교서 같은 거라····
인간이 아닌 상위의 존재에 의해 쓰인 마법 교서·
그런 책이라고 한다면 지금 아린이 알고 있는 책은 단 한 권뿐이었다·
“호 혹시 성서(聖書)를 말하는 거야?”
루나브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카데미에서 통용 중인 어느 역사서의 첫 페이지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신의 외면적인 모습을 가장 닮았으나 신의 전능한 능력을 가장 받지 못한 종족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 험한 대륙에서 살아남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나약했으며 그렇기에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취급을 받아왔다·
그런 인간을 위한 최우선적인 생존도구가 바로 마법·
맨몸으론 자연의 험난함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던 인간은 끊임없는 지식과 성장을 추구해야 했다·
인간의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은 곧 신의 교리와 유사한 그들만의 독자적인 마법 체계를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본인들의 존속을 위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존재하는 법·
마법 역시 창조주인 신의 힘을 빌려오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들이 이룰 수 있는 경지엔 한계가 이었다·
이에 빛의 신 루멘델은 이런 인간들의 한계를 보완해주기 위해 한 가지 교서를 내렸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성서 히스크레아·
만약 인간들 사이에서 이 성서를 정확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 순간 인간의 존속을 위협하는 어둠의 안개는 모두 걷히고 진정한 구원의 빛만이 남을 것이라 하니
어둠의 존재들은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라 했다·
시간이 흘러 현재는 잊혀진 전설 취급이나 받던 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지금 시리카의 눈앞엔
바로 그 성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져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는 기분·
시리카로선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오만했던 것일까?
아님 무지했던 것일까?
암살자에게 있어 망설임은 죽음과도 같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가 바로 자신이거늘
그런 자신이 어찌하여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일까?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시리카님께서 속성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등급까지 숨기고 계실 줄은 몰랐거든요·”
조금 전까지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던 보리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의기양양한 얼굴로 시리카를 내려다보고 있는 또 한 명의 보리스만이 남아있을 뿐
한 손엔 찬란한 광채를 내뿜고 있는 성서와 함께인 채로 말이다·
“일으켜드릴까요?”
보리스는 주저앉은 그녀에게 보란 듯이 손을 내밀었다·
이에 시리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푸확!
뭔가가 터진 듯한 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앞으로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악!”
이와 동시에 주변에서 비명과 함께 대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리카 또한 힘이 풀린 나머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시퍼런 검날이 살을 파고들어 뼈까지 진동시키는 고통·
검을 달고 사는 암살자들에겐 매우 익숙한 고통이긴 하나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왜? 어째서?
검에 베인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공격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한 것이라곤 그가 소환한 마리오네트들을 처리한 것밖에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런 상황에····
“저주가 터진 모양이군요·”
보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시리카는 대원들이 처리한 마리오네트에 시선을 돌렸다·
“받은 만큼 돌려주라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사랑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제 인형들은 그걸 실천했을 뿐입니다·”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엉망진창으로 파괴된 인형들·
어처구니없게도 그 인형들이 입은 피해가 대원들에게 똑같이 적용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입힌 피해를 그대로 돌려받은 것처럼 말이다·
“대 대체 무슨 짓을?”
“<인형 저주술>입니다· 소환된 마리오네트에게 저주를 걸어 해를 입힌 대상에게 그 피해의 일부를 돌려주는 마법이죠·”
그런 마법은 살면서 접해보지 못했다·
자신이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아마추어도 아닌 마당에 이런 듣도 보도 못한 환상 같은 것을 마법이라 한다니 시리카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보리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을 이었다·
“흑마법이란 것도 결국 일부 편협한 자들이 빚어낸 농간일 뿐입니다· 본인들이 할 수 없으니 남들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선을 그은 것이죠·”
보리스는 태동하듯 꿈틀거리는 자신의 마력을 보란 듯이 내보였다·
“제가 한 것도 결국 똑같은 마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성서의 마법?’
나약한 인간의 경지로선 아직 닿을 수 없는 신의 마법·
저 하얀 책 안에 담겨있는 무수한 마법이 과연 이 대륙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오게 될까?
확실한 게 있다면 그 변화가 자신들에겐 결코 긍정적이지 않으리란 것이었다·
“빛의 신 루멘델께선 저희 인간이 신의 경지에 가장 먼저 이를 수 있는 종족이라며 높게 평가하셨지만 공교롭게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의 힘은 저희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아직 과분하니까요· 그건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시리카?”
그의 말을 들은 시리카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시안 베르트는 왜 감싸시는 겁니까?”
“그 잘난 성서에 그런 건 안 적혀있나 보죠?”
온전히 대답해줄 그녀가 아니었다·
“질문을 다시 하죠· 시안 베르트가 정말 마검의 주인입니까?”
“····”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긴가민가했습니다· 소유주의 몸을 탈취하는 것이 마검의 본성이라 들었는데 어째 그 소년에겐 그렇다 할 기미가 전혀 안 보였거든요·”
성서의 보유자도 꿰뚫어 볼 수 없던 시안의 속마음·
그야말로 빛 한 점들 않는 안개 속을 보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웠습니다· 분명 저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을 텐데 저를 무슨 전생의 원수 보듯 대하더군요· 마치 저에 대해서 뭔가를 안다는 듯이····”
여유가 가득했던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불쾌감이 느껴졌다·
“대체 누굽니까? 시안 베르트는····”
시리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어찌 말해야 할지 그녀조차 감이 안 잡혔을 뿐·
허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그녀의 입에서 내뱉어진 첫마디는 바로····
“훗!”
웃음이었다·
마치 질문 자체가 너무나도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
시리카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말이죠· 그냥 완벽한 아이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당돌한 제자를 생각하고 있자니 그녀의 입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었다면 딱 당신 같은 사람에게 당했을 거라 봐요· 아마 꼭두각시처럼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졌겠죠·”
좀 전에 당한 상처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릎마저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어요·”
“···!?”
“그 악독한 마검도 넘보지 못하는 아이를 고작 네놈 같은 능구렁이가 넘보려 하다니··· 말이 안 되잖아?”
일순간 위화감을 느낀 보리스가 잠시 움찔했다·
“그 아이는 많은 것을 바꿀 아이거든····”
몸을 일으킨 시리카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암살자의 자세가 아니었다·
-우우웅
“말하다 보니 어째 유언처럼 됐네요?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전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고 제 사랑스러운 제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겁니다·”
그것은 암살이 아닌 마법을 시전 하기 위한 자세·
그녀는 몸에서 곧 살기와 마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검은 마나의 빛이 발현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