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화
79. 제안
법무팀장과 회의 중이던 강지영 본부장에게 음성 메모 파일을 내밀었다.
연이어 이동민 실장이 삼촌뮤직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다친 데는 없어요?”
“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응급실에 가서 진단서는 끊어 놓으려고요.”
“진짜 수고하셨어요. 두 분 모두.”
안도한 강지영 본부장은 녹음한 음성 메모를 듣기 시작했다.
녹음 파일에서는 에필 K와 삼촌 뮤직의 단골 고객인 S급 작곡가들이 언급되고 있었다.
강지영은 덕분에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웃음을 지었다.
“호호호. 생각 이상이네요. 그러면 여기 계신 분들은 홍보팀이랑 해서 후속 대응 논의하시고 정 대리는 저 좀 잠깐 따로 봐요.”
“저를요?”
“네. 지금 바로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강지영 본부장을 따라 본부장실로 향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차 타올게요.”
“아 제가 타겠습니다.”
“됐어요. 이 시간에 커피 마시면 잠 못 자요 저.”
본부장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자 강지영 본부장이 직접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타왔다.
사과 향 같기도 하고 한약 향 같기도 한 은은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드세요.”
“예. 본부장님. 향이 참 묘하네요.”
“몸에 좋은 거래요.”
강지영 본부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생글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정 대리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게 많이 없네요.”
“1년 차잖습니까. 당연히 뵐 기회가 적었으니까요.”
“1년 차요? 풋. 누가 정 대리를 그렇게 봐요?”
강지영 본부장이 입을 가리고 웃는다.
반달로 휘어지는 눈이 매력적이었다.
“이번 건. 솔직히 정 대리가 밝혀내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요.”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이번엔 진짜로 운이 좋았다.
승진 턱을 동기들부터 쏘지 않았더라면 도란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겠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데뷔 전날 알았다면?
어후.
생각만 해도 오싹하네.
몸을 부르르 떨자 강지영 본부장이 궁금해한다.
“무슨 생각 해요?”
“솔직히 지금 이런 일을 겪어서 다행이지. 체리블라썸 컴백 전날 겪었다면 망했겠다 싶어서요.”
“그렇죠?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식은땀이 막 흐르더라니까요.”
강지영 본부장은 마치 아이처럼 해맑게 웃음을 지었다.
그 뒤론 업무는 어떻냐 일은 할 만하냐 하는 상투적인 말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새 강지영 본부장이 자기 삶을 털어놓는 단계까지 이어졌다.
“전 이 업계. 14살에 들어왔어요. 아이돌 지망이었거든요.”
“14살요?”
“그게 좀 웃긴 데 듣고 웃지 마세요?”
진지한 그녀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강지영의 14살의 아이돌 도전기가 어찌나 웃기던지.
“아 진짜! 안 웃기로 했잖아요!”
“흠흠. 죄송합니다. 14살에 단식 하루하고 기절했다는 게 좀 웃겨서요. 흠흠. 이제 더는 안 웃을게요. 근데 왜 하다 그만두셨어요? 아이돌 하셨어도 잘 어울리셨을 것 같은데요?”
“하아. 그땐 아이돌이 그렇게 힘든 건 줄 몰랐죠. 막상 연습 들어가니까 밥을 안 주더라고요! 그래서 죽겠다 싶어 한 달 만에 탈주를 하다가······.”
강지영 본부장은 중학교 땐 살이 많이 찌는 체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배고픔을 못 이기고 도망쳤다고.
하긴 그런 애들이 한둘이 아니지.
“하여간 그 뒤로 고등학교 입학하고서는 미스코리아 모델 배우까지 전부 다 도전해 봤어요. 근데 안 되더라고요. 끼란 거 없으면 진짜 안 되는 판이잖아요. 이 연예계란 곳이.”
연예계에선 아무리 예쁘고 잘생겨도 끼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이쁘면 반짝인기는 끌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인기가 독이 되어 점점 목을 죄어오면서 더는 버티질 못한다.
강지영 본부장의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제 이야긴 이런데 정 대리님은 어떻게 살았는지 말 안 해줄래요?”
“······.”
그녀의 질문에 갑작스레 말이 막혀버렸다.
이동민 실장과 프로가 되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 이야기 같은 건 쉽게 나왔는데 내 삶에 관해 말하려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회귀 전 기억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제일 먼저 말해주기로 생각한 사람이 있어서인가?
그게 뭐가 되었든 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 대답이 늦어지자 강지영 본부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갑작스레 물었네요. 나중에라도 이야기해 주세요. 나중에.”
“네.”
그제야 무겁게 닫혔던 내 입의 봉인이 풀렸다.
잠깐의 침묵 뒤.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본부장님. 진짜로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강지영 본부장이 찻잔을 만지작대다 천천히 본심을 털어놓았다.
“실은 정 대리가 제 편이 되어 주면 좋겠다 싶어서요.”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나 역시 찻잔을 만지작대며 고민에 싸였다.
마음 같아선 이미 당신의 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놓고 강지영 본부장의 라인을 타면 내가 생각했던 계획을 이뤄낼 수 없었다.
가령 이번에 정보를 얻은 동기 모임을 갖는 거라든지.
김동수 실장의 밑에 사람을 빼내오는 것 같은 거 말이다.
라인을 대놓고 타면 반대 라인의 사람들에겐 배척부터 받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거절하자.’
고민을 끝낸 난 그녀의 달콤한 제안에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위에서.
그리고 난 밑바닥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는 게 아직은 좋을 때다.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부장님.”
강지영 본부장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가요?”
그녀의 말엔 뼈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넙죽 답할 순 없었다.
비록 약간은 급속도로 가까워진 거리가 조금은 멀어질지라도.
하지만 한 가지 정도는 말해줘도 되겠지.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만 전 김동수 실장과는 같은 길을 갈 순 없을 거 같긴 하네요. 그분 스타일은 저랑 정말 안 맞거든요.”
강지영 본부장이 날 지긋이 쳐다본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듯 안도한 표정으로.
“알겠어요. 그럼 지금은 여기까지 하는 거로?”
“예. 여기까지죠.”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리고 유진 씨가 2월 14일 날이랑 15일 스케줄 비워달라고 요청했던데 맞나요?”
며칠 전.
유진이가 14일 오후부터 15일 밤까지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요청했단 보고를 올렸다.
2월이 가기 전 미소를 눈썰매장에 데려가려면 <파란 하늘>의 촬영이 없는 그때뿐이었으니까.
“예. 미소가 스키장을 가고 싶다고 졸라서요.”
강지영 본부장이 안도했다.
“휴우. 전 또. 남친이랑 간다는 줄 알았네요.”
어쩐지 바로 허락하지 않더니 그 이유였군.
유진이는 현재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더니 이번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고 한다.
“흠.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스키장에 유진 씨 혼자 보내도 될는지 모르겠네요.”
“안 그래도 제가 데려다주고 케어하다 다시 데리고 오려고요.”
강지영 본부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배우 때문에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미안해요. 정 대리.”
“저희 일이야 다 그렇죠.”
잠시 고민하던 강지영 본부장이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요?”
“그날은 특근 처리해 줄 테니까 법인 카드도 들고 가서 유진 씨 케어 잘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세요. 요즘 유진 씨랑 정 대리 둘 다 진짜 고생 많이 했으니까.”
법인 카드를 받아가라니!
돈 굳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느라 한참을 애써야 했다.
“아 그리고요. 나중에 통장 한번 보세요.”
“네? 그건 왜······”
“제 방에 이렇게 같이 오래 있었던 이유 하나는 만들어 드려야죠. 설마 제 라인 타라고 불렀다는 걸 동네방네 떠드실 거예요?”
말단 직원이 본부장과 개인 면담을 했으니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할 거라나?
“알겠습니다. 그럼 미리 감사드리겠습니다.”
강지영 본부장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인사를 하고 본부장실을 나와 곧바로 까메오 뱅크를 열었다.
그런데 놀랄 만한 금액이 입금되어 있었다.
[까메오 뱅크 : 정윤호 님]
[입금 : 8619310원 (상여금)]
[총 잔액 : 22317250원]
무려 천만 원!
비록 세금을 왕창 떼다 보니 실제로 들어온 건 860만 원이지만 말이다.
“와. 세금 봐라. 140만 원을 한방에 때 가네.”
회귀하면서 죽음마저 피했건만 세금은 피하지 못하다니.
그래도 총 잔액을 보니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큰 규모의 상여금이 나 말고 주어진 적이 있었나?’
곰곰이 떠올려 보니 아무리 일을 잘했다고 주는 상여금이라지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다른 직원들의 특별 상여금 수준은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강지영 본부장과 강감찬 대표가 예전부터 날 자신들의 라인에 넣으려고 했다는 걸 말이다.
“이거 제대로 당했네. 하하.”
두 사람의 의도를 알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두 사람이 날 그만큼 생각해준다는 뜻이었으니까.
“이 돈 잘 쓰겠습니다. 대표님. 본부장님.”
* * *
[대기 발령 : 가수 1실 박한철 실장]
1층 로비의 엘리베이터 옆 LCD에 박한철 실장의 대기 발령공지가 붙었다.
그런데 사유란이 비어 있었다.
“이거 뭐야? 박 실장님이 대기 발령? 왜?”
“무슨 실수라도 하신 건가?”
“거참. 우리 회사에서 서예종 라인이 밀리는 건 또 처음 보겠네.”
가수나 배우 담당할 것 없이 매니저들은 로비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특히 가수 1실 직원들은 다른 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 XX. 우리 1실 성적 좋은데 왜 이러지? 설마 회사에서 정리 해고라도 하려는 거 아냐?”
“설마 그럴 리가. 박 실장님은 아무 말씀 안 하셔?”
“분위기 완전 살벌해서 아예 말도 못 걸었어.”
그때였다.
“일들 안 하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기철이 로비에 가득 모인 직원들을 보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 이사님!”
순간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듯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동시에 이기철의 눈에도 박한철의 대기 발령 공지가 눈에 띄었다.
이기철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밤사이 룸살롱 로제에서 김동수와 박한철과 술잔을 나누고 온 사이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실장급 인사가 내가 모르게 이루어졌다고? 이것들이 정말 해 보자는 거야 뭐야?’
이기철은 분노를 담아 빽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뭘 보고 있어! 다들 스케줄 없어? 빨리 튀어 가!”
“예! 예!”
직원들은 고개를 숙이곤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기철은 자신의 방으로 가자 박한철과 김동수를 불러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두 사람을 보자마자 이기철이 소리를 내질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박한철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유를 알지 못해 다들 전전긍긍할 때 박한철의 전화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작권 협회의 장명수 이사다.
박한철은 이기철의 짜증 어린 시선을 뒤로 한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 실장! 어제 왜 그렇게 전화가 안 돼!
“죄송합니다. 어제 좀 접대할 일이 있어서요.”
-하아. 접대고 나발이고 큰일 났어! 굴렁쇠 윗선에서 다 알아차렸다니까? 일부러 공문 안 내려보낸 것까지 싹 다!
“어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아 몰라. 그리고 삼촌 뮤직은 저작권 등록 취소하겠다고 하더라. 하여간 그렇게 되었으니까 잘 대비해. 나 끊는다?
“자 장 이사님! 장······.”
달칵.
갑작스럽게 전화가 끊겼다.
박한철 실장은 왜 자신이 대기 발령을 받은 건지 알 수 있었다.
전화 내용을 들은 김동수와 이기철의 표정이 와작 하고 일그러졌다.
하룻밤 사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자신이 그리던 일이 와장창 수포로 돌아갔으니까.
“김 실장. 무 무슨 방법 없겠냐?”
박한철 실장이 김동수에게 매달렸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김동수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다.
“일단은 박 실장님. 대표님이나 본부장이 부르면 절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십시오. 무조건 딱 잡아떼세요. 그것 밖에는 방법 없습니다.”
“아 알았어.”
이기철은 김동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김 실장. 이번 일 누가 손 쓴 거 같냐?”
“잠시만 좀. 알아보겠습니다.”
그때부터 김동수는 회사 안과 밖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
김동수는 자신이 알아낸 걸 말하기 시작했다.
“법무팀장이랑 본부장이 손을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촌 뮤직에는 이동민 실장이랑 정윤호가 찾아갔다 왔답니다.”
쾅!
이기철이 소파 팔걸이를 내리쳤다.
붉은 오크색의 팔걸이가 낮은음을 울렸다.
“빌어먹을 어떻게 그게 가능해!! 하루 만에 저작권 문제를 해결했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뭐야!”
이기철 이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런데 그 순간.
인상을 찌푸리던 김동수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