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2화
522. 베스트 or 워스트 3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슨.”
현장에 찾아온 사람은 황룡영화제 때 내가 도와줬던 제이슨 조였다.
그는 현재 JJ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남성복 패션 디자이너로 한국에서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원래 남성복뿐 아니라 여성용 드레스도 디자인하던 디자이너였다.
그렇기에 난 제이슨 조에게 이번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판에 누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오지석 때의 일을 이 정도로 보답할 수 있으면 다행이죠. 그리고 스타그램에 글 쓰는 거로는 큰 문제도 안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난 조진희를 속일 생각으로 제이슨 조에게 스타그램으로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었다.
20만 명 정도의 팔로워를 가진 그의 스타그램은 주로 패션계나 기자들이 팔로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제이슨 조가 가짜 의상에 대해 댓글을 남긴다면 조진희도 유진이의 최종 의상이 바뀌었다는 ‘거짓 정보’를 믿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제이슨은 유진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스타그램에 글만 올려 주십시오. 사진은 필요 없습니다.”
“알았어요.”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젠 작전을 실행할 차례다.
난 탈의실 앞에 서 있는 유진이에게 말했다.
“유진아. 1번 붉은 모기장 드레스 좀 갈아입고 나올래?”
유진이가 경례를 하며 말한다.
“예썰!”
이영아 대표가 얼굴을 망사로 덮는 붉은 모기장 모자와 치파오스타일의 드레스를 들고서 유진이와 함께 탈의실로 들어간다.
이어서 난 이제 배신자가 된 이예서 실장을 불렀다.
“이 실장님. 폰 줘보세요.”
“여기요.”
난 이예서 실장의 폰을 받은 다음 유진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제이슨 조가 먼저 제안을 꺼냈다.
“정 팀장님. 제가 유진 씨 드레스를 보고 감탄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는 게 어떨까요?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그러면 제이슨은 유진이를 보고 손뼉만 쳐주십시오. 유진이를 먼저 찍고 제이슨은 따로 찍겠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드레스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 정도는 나와야지 조진희가 믿을 거예요. 조진희를 조지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혹시나 동영상이 유출될까 봐 걱정했지만 제이슨은 괜찮다며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고 말한다.
“휴우.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가짜 의상을 진짜인 것처럼 만드는 한편의 페이크 영상을 찍을 차례였다.
그때 이수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이수찬]
전화를 받는 순간 조진희가 어떤 회사로 들어갔는지도 알 수 있었다.
-형님. HK 의류의 구왕수 대표가 조진희 그 여자의 배후에 있습니다. 벌써 HK에서 한 자리 차지한 모양이던데요?
HK 의류는 홍성범 전무가 잡혀간 이후 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업계 1위의 의류업체.
충분히 이런 짓을 하고도 남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잘 되었다.
이번 일이 성공하게 된다면 조진희뿐만 아니라 HK 의류에게도 큰 엿을 먹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소식 고맙다.”
-예 형님. 그러면 계속해서 뒤를 캐보겠습니다.
“오케이.”
전화를 끊은 난 디자인이 유출된 회사를 말했다.
소식을 들은 문영미 대표가 싸늘하게 웃는다.
“HK 의류라······ 그동안 당한 걸 제대로 복수할 수 있게 됐네요.”
HK 의류는 업계 1위에도 불구하고 무던히 LM 의류를 괴롭혀왔다고 한다.
덕분에 문영미 대표도 확실히 타격을 입히겠다며 벼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유진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붉은 모기장을 연상케 하는 시스루 천은 모자에서 뻗어 나와 가슴께까지 내려와 있었다.
붉은색 치파오 드레스는 옆이 쭉 찢어져 있었는데 그 드레스 위로는 다양한 종류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수도 없이 많은 나라를 여행한 캐리어 가방에 스티커가 잔뜩 붙은 것처럼.
유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몸을 웅크리며 한숨을 내쉰다.
“오빠. 빨리하고 끝내요. 저······ 멘탈 나갈 거 같아요.”
강인한 멘탈의 유진이도 쉽사리 소화할 수 없는 옷이었다.
“어. 빨리빨리 할게.”
난 현장 상황을 녹화하기 전 간단한 연기 지도(?)를 하고 리허설을 마쳤다.
다들 유진이를 향해 손뼉을 치고 감탄사를 터트리라고 말이다.
연기 지도를 끝낸 난 모두에게 말했다.
“자~ 슛 들어갑니다. 5 4······ 1. 슛!”
슛이 나온 순간 유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마치 자신이 프랑스 파리 패션쇼의 한복판에 있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골반을 살짝 뒤틀면서 말이다.
그와 동시에 제이슨 조는 벌떡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영아 대표는 고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이후 깃털 옷 하이칼라 옷 등을 촬영하면서도 다들 즐겁게 환호성을 지르며 녹화를 마쳤다.
이후 난 이예서 실장을 시켜 조진희에게 까톡을 보냈다.
미끼를 던졌으니 물고기가 낚이길 기다릴 시간이다.
* * *
조진희는 MBS <연기대상>이 방영되는 12월 30일까지 옷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이예서 실장에게 디자인 도안을 받자마자 HK 본사의 의상 제작실로 이동했다.
그런데 제작실에 들어가기 직전 이예서 실장으로부터 까톡이 도착했다.
까톡에 포함된 영상에는 정유진이 파리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서나 볼 법한 난해한 의상들을 입어보며 즐거워하는 영상들이 있었다.
심지어 현재 한국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소리를 듣는 제이슨 조가 감탄하고 있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당황한 조진희가 즉각 이예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실장. 이 영상은 대체 뭐야?”
-아 그거요? 하~ 지금 막 새롭게 의상이 교체되어서 영상 찍은 거예요.
피팅룸은 보안이 철저해 폰을 쓸 수 없다던 이예서 실장이다.
하지만 제이슨 조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그를 안내하느라 잠시 동안 보안이 살짝 뚫렸다고 한다.
그 틈을 타 이예서 실장은 소리가 나지 않는 무음으로 동영상을 찍었다고 한다.
“연기대상 때 입을 의상이 교체되었다고?”
-예. 제이슨 조가 디자인 한 거로 교체됐어요.
“제이슨은 남성 정장만 디자인하고 있었잖아. 황룡영화제 대상 때 이태풍 옷 디자인해줬고! 근데 갑자기 웬 여자 드레스야?”
-그 사람 원래 뉴욕에서는 여성복 디자인을 더 많이 한 거 아시잖아요. 알고 보니까 그동안 여성복도 런칭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더라고요.
“뭐?”
-하여튼 아까 보여준 디자인 도안은 다음번 브랜드 런칭 때나 나올 거예요. 그리고 이번 MBS 연기대상에는 제이슨 조가 디자인한 작품이 나갈 거예요. 그거 알려드린다고 연락했어요. 고생한 우리만 X 됐어요.
의류계에서는 이름값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조진희 자신도 한 땐 종종 회사 디자이너들의 작품 대신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런칭한 적이 많다.
하지만 제이슨이 디자인했다는 붉은 모기장 드레스는 지나치게 전위적이고 파격적이었다.
조진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게 진짜로 제이슨 조의 디자인이 맞다는 거지?”
-왜요? 설마 저 의심하는 거예요? 영상에도 제이슨 조 좋아하는 거 안 보여요?
살짝 골이 난 이예서 실장의 목소리를 듣자 조진희가 슬쩍 발을 뺐다.
디자이너라면 어떤 경우라도 화를 낼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 아니. 내가 널 왜 의심하겠어? 다만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그리고 내가 볼 땐 원래 디자인이 훨씬 나아서 그래.”
-하아~ 그쵸?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긴 해요. 근데 어쩌겠어요. 네임드 디자이너가 판톼스틱한 디자인이라는데! 그리고 이영아 대표도 이름빨 때문인지 제이슨 말이라면 다 맞다고 하더라고요.
한참을 툴툴대던 이예서가 다시 한번 말한다.
-하여간 정 의심나면 제이슨 조의 스타그램이나 보세요. 그 인간이 아까 현장에서 L.M.L이랑 손잡게 되었다고 글 올렸어요.
“아 알았어. 그러면 이 디자인이 최종 디자인이라는 거지?”
-예.
“오케이. 혹시 또 변화되는 게 있으면 연락줘.”
-죄송해요. 최종 픽스된 게 그거고 앞으론 보안이 더 심해져서 이제부터는 전화도 안 될 거예요. 연말 무대 끝날 때까지 디자인실 식구들 전원 호텔 감금이에요. 말은 보안인데 딱 봐도 제이슨 작품으로 변경된 것을 가지고 다들 투덜거릴까 봐 입막음하려는 거 같아요.
“알았어. 하여간 고마워.”
-고맙긴요. 일 잘 풀리면 저 HK로 영입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당연하지. 나만 믿어.”
달칵.
전화를 끊은 조진희는 혼란에 빠졌다.
“다들 미친 거야? 아니면 내가 유행을 못 따라가는 거야? 하아~ 진짜 미치겠네.”
혼잣말을 내뱉은 조진희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하고 제이슨 조의 스타그램에 접속했다.
[@Jason_Joe]
MBS 연말 시상식 무대 기대.
아름다운 드레스.
L.M.L과 손을 잡다.
#MBS연기대상 #L.M.L드레스 #최고의디자인 #보안때문에사진은없음 #최고의모델 #뮤즈를 만났다.
(댓글)
-baro : 제이슨 님. 설마 이번 연말 시상식에서 정유진 씨랑 콜라보 하는 거예요?
-lieorlie : 대박. 이분 요즘 제일 잘나가는 디자이너임.
-tellmetruth : 미친 듯. 제이슨이 정유진을 뮤즈로 삼는 거라면 완전 대박인데? 정유진 급이 완전히 올라가는 거임.
-amen99 : 에이~ 그건 아니다. 솔직히 급은 정유진이 더 높지.
-paboto : 아님 패션계에서는 정 반대. 제이슨의 지금 행보만 보면 곧 한국의 샤넬이 될지도 모름.
스타그램을 본 조진희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제이슨이랑 손을 잡은 거였어?”
그 순간 조진희 역시 믿을 수밖에는 없었다.
제이슨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쉽게 이런 글을 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조진희는 이를 꽉 깨물고 HK 의상 제작실로 향했다.
변경된 디자인으로 옷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 * *
HK 의류에서 보내온 의상을 입게 된 건 이제 막 신예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TNT 엔터의 박연수였다.
박연수는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착한 인상이지만 실제론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가득한 여배우였다.
그래서 박연수는 이번에 정유진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는 걸 받아들였다.
하지만 의상실로 전해진 HK 의류의 옷은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디자인의 옷이었다.
박연수는 의상실에 함께 있던 유강석 대표에게 따지듯 말했다.
“대표님. 이게······ 정유진이 입을 옷이라고요?”
“그래.”
“아니 어떻게 연기대상에 이따위 옷을 입어요?”
“디자이너들이 좋다니까 정유진도 좋다고 했다던데? 봐봐. 여기 영상······”
유강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유진이 드레스를 입고 즐거워하는 영상을 내보였다.
영상을 본 박연수가 헛웃음 짓는다.
“헐······ 미친 거 아냐?”
“나도 똑같은 생각이긴 한데 어쩌겠냐. 디자이너들이 다 좋다는데. 하여간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내가 다 보상해줄 테니까 넌 정유진만 끌어내려.”
유강석 대표는 조진희와 HK 의류와 만나 작전을 다 짜놓았다고 말했다.
정유진과 같은 의상을 대중에게 선보이면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정유진이 조연인 박연수의 옷을 뺏었다며 언론 플레이를 할 거라고 말이다.
“하아······ 알았어요. 대신에 진짜 다음 작품은 저한테 주연자리 주셔야 해요?”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오늘 네 연.기.가 중요해. 대중들 앞에서 저 붉은 옷이 네 거라는 걸 제대로 어필해. 알았지?”
“알았어요. 저만 믿어요.”
박연수는 붉은 모기장 스타일의 드레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탐욕 가득한 생각으로 그 드레스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 * *
12월 30일.
MBS의 <연기대상> 시상식 날이 되었다.
오후 7시부터 MBS 본관 앞에 깔린 레드카펫에서 연예인들이 의상들을 뽐내기 시작한다.
신인 배우들부터 탑 배우들까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에서 내리며 팬들과 기자들의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의상을 뽐내고 있었다.
현재 시각은 7시 40분.
이수찬에게 듣기로는 신예 조연 여배우 박연수가 조진희와 HK 의류와 손을 잡았다는 정보를 들었다.
박연수는 회귀 전 이예서 실장이 유출한 디자인 옷을 입고 문제를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녀는 기회만 되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레드카펫에 서는 시각은 오후 8시.
그리고 유진이는 그 뒤로 8시 20분에 레드카펫에 설 예정이다.
그래서 현재 유진이는 어떤 의상을 입었는지 들키지 않기 위해 현재 레드카펫에 줄을 선 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난 이미리에게서 유진이가 드레스를 다 갈아입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듣고선 그제야 MBS의 본관 후문으로 향했다.
후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가자 수많은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한마디씩 덕담을 건넨다.
유진이는 오늘 MBS <연기대상>에서 <아침이 간다>로 신인상 <신의 이름으로>로 최우수상 후보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정 팀장. 오늘 파이팅이다!”
“유진 씨. 수상하길 빈다 정 팀장.”
“유진 씨한테 안부 좀 전해줘.”
난 스태프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복도를 돌고 돌아 대기실이 늘어선 공간에 도착했다.
유진이에게 배정된 3번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LM 의류의 문영미 대표와 L.M.L의 이영아 대표가 우리 매니저들과 함께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정 팀장. 이제 왔어요?”
“예. 문 대표님. 이 대표님.”
두 사람에게 각각 인사를 한 뒤 대기실에 있는 대형 LCD TV로 시선을 돌렸다.
대형 TV에는 2020년 MBC <연기대상> 레드카켓 행사를 실시간 스트리밍해주고 있는 방송이 나오고 있다.
문영미 대표가 조금은 불안한 듯 묻는다.
“정 팀장. 가짜 옷을 입고 나올 애가 몇 시에 나온다고 했죠?”
“8시에 나올 겁니다.”
“하······ 제대로 입었으려나?”
난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조금 전 일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에브리데이 V12.1]
[날짜 : 2020년 12월 30일]
-PM 11:3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연예올타임즈> [MBS 연기대상 ‘베스트 or 워스트’] (워스트 드레서 부분 – 정유진))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잠시 후.
오후 8시가 되었다.
박연수의 커다란 흰색 스프린터 차량이 레드카펫 앞에 멈춰 선다.
“저 찹니다.”
모두의 시선이 대기실 LCD 화면에 집중된다.
스르륵.
거대한 벤X 스프린터의 사이드도어가 열린다.
박연수가 천천히 레드카펫에 발을 딛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나온 건 우리가 가짜로 건넨 디자인과 거의 흡사한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됐다.’
조진희와 HK 의류에게 엿을 먹이는 건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대표님. 이제 시작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