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0화
520. 베스트 or 워스트 1
[에브리데이 V12.1]
[날짜 : 2020년 12월 30일]
-PM 11:30 <연예올타임즈> [MBS 연기 대상 ‘베스트 or 워스트’] (워스트 드레서 부분 – 정유진)
‘이 드레스가 어째서 최악이지?’
연예 신문사인 ‘연예올타임즈’에는 ‘베스트 or 워스트’란 코너가 있다.
연말 시상식들이나 국제 영화제 같은 굵직한 시상식 때마다 배우들의 스타일을 평가하는 코너였다.
의상부터 액세서리까지 모든 항목을 평가해서 베스트와 워스트로 나누게 된다.
원래 처음에는 그저 ‘연예올타임즈’의 기자들이 만든 코너에 불과했지만 해가 지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의상 관련 학과 교수들과 연예부 기자들 그리고 팬들까지 참여하는 꽤 영향력 있는 코너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코너에서 베스트가 되느냐 혹은 워스트가 되느냐는 상당히 중요했다.
베스트로 선정되면 협찬과 광고가 쏟아지고 워스트가 되면 협찬과 광고가 끊기거나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아니 이게 왜 워스트인 거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록 내가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오랜 연예계 생활을 토대로 어떤 드레스가 대중에게 어필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유진이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베스트를 받아도 부족함 없는 수준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때 유진이가 내 표정을 보며 묻는다.
“오빠. 표정이 왜 그래요? 안 어울려요? 난 괜찮은 거 같은데······”
난 급히 얼굴을 펴며 말했다.
“아 아냐. 전혀! 드레스는 엄청 예뻐. 그냥······ 광고주 한 명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급히 말을 돌리자 그제야 유진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행이다~ 오빠. 저 진짜 이 옷 마음에 들어요.”
“그래. 나도.”
다들 호평이 이어지자 이영아 대표는 만족한 표정으로 MBS <연기 대상> 2부에서 입을 의상도 입자고 말한다.
“유진 씨. 이제 2부 의상 옷도 입어 봐야죠.”
“네~”
유진이가 이영아 대표와 함께 커튼을 치고 탈의실로 들어간다.
‘그래. 아직 2부 의상이 남았어. 거기서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에브리데이는 그저 ‘워스트 드레서’라는 것만을 알려줬으니 아직 한 번 더 확인할 기회가 남아 있다.
잠시 후.
촤라라락.
탈의실의 커튼이 걷히고 유진이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 순간 난 입을 쩍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와~”
유진이가 입고 나온 두 번째 드레스는 푸른색 벨벳 재질의 고급스러운 드레스.
작품명 ‘청명’.
<신의 이름으로>에서 유진이가 맡았던 ‘청명’과 같은 이름으로 영어로는 ‘블루스카이’라고 한단다.
드레스 ‘청명’은 어깨를 드러낸 스타일로 드레스 상단에는 흰색 망사 레이스 블라우스가 연결되어 있는데 발랄한 느낌과 동시에 섹시한 느낌을 주는 옷이었다.
더군다나 세트로 팔꿈치까지 오는 흰색 장갑에 머리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안개꽃 머리띠까지 있어 하나하나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예술품이었다.
덕분에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게 워스트라는 건 더 말이 안 되잖아!’
혹시라도 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싶어 옆을 쳐다봤다.
미소는 입을 쩍 벌린 채 우와 소리만 반복하고 있다.
“우와~ 우와~ 엄마~ 우와~”
미소는 어떤 표현을 골라야 할지 몰라 연신 감탄을 내뱉는다.
그리고 뉴욕에서 패션 편집자 생활을 하며 수없이 많은 드레스를 봤었던 이미리 대리 역시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정말······ 끝내주는데요?”
우리의 열띤 반응에 이영아 대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 있는 표정을 짓는다.
“흠흠. 만족하시니 다행이네요. 일단 이 두 개의 디자인이 대상이고 SBC에서 입을 것도 보셔야죠. 근데 힘드니까 유진 씨는 잠깐 쉬고 이번에는 미소가 MBS에서 입는 옷을 보여 드릴게요.”
“예.”
이영아 대표가 미소를 쳐다본다.
“미소야. 이번엔 우리 미소 옷을 입으러 갈까?”
“네~!!”
미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영아 대표에게 뛰어간다.
이영아 대표의 손을 잡은 미소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묻는다.
“이모. 나도 엄마처럼 이뻐져요?”
“그러~엄~”
“아싸!”
미소는 다른 한 손으로 유진이의 손을 잡고 탈의실로 향했다.
차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닫힌다.
자신의 딸이 만들어 낸 작품에 만족한 문영미 대표가 날 쳐다본다.
“정 팀장. 어땠어? 만족해?”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유진이가 워스트 드레서가 된다면 L.M.L의 블랙라벨 브랜드 런칭에도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모회사인 LM 의류에도 여파가 미치기 때문이다.
“예. 드레스는 최고로 마음에 듭니다만······”
문영미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듭니다만?”
“연예올타임즈의 ‘베스트 or 워스트’ 코너의 평가가 마음에 걸리네요.”
“왜? 우리 의상 수준이면 작년 베스트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거 같은데?”
나 역시 공감한다.
그러다 보니 차마 입에서 유진이가 워스트 드레서가 될 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조차 이유를 모르는데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문영미 대표가 넌지시 말을 꺼낸다.
“정 팀장. 우리가 속내를 다 털어놓을 사이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걱정을 나눌 사이 정도는 되지 않아? 사정을 알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가까스로 유진이가 워스트 드레서가 될지 모른다는 걸 전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실은 제가 적이 너무 많아서요.”
“적?”
“드레스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베스트도 아까울 정도로 잘 나왔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평가단에서 절 노려서 워스트를 주거나 기자들이 악의적인 기사를 쓸까 봐서 걱정되어 그랬습니다.”
문영미 대표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긴 정 팀장이 요새 참 바쁘다는 이야기 들었어.”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일하다 보면 친구도 생기고 적도 생기고 하는 거지 뭐.”
문영미 대표 역시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올라왔다.
그래서인지 대번에 내 상황을 이해한다.
“실은 우리도 새 브랜드를 런칭하는 데 손 놓고 있을 순 없어서 정 팀장이 걱정하는 걸 대비해 뒀어.”
문영미 대표가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을 꺼내 든다.
액정 화면에는 올해 <연예올타임즈>의 평가단 이름들과 성향들이 나온다.
“평가단들은 다들 정 팀장이랑 특별한 충돌을 일으킨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 기자랑 대중들 평가라면 걱정 안 해도 돼. 그날 우리가 홍보비용을 어마어마하게 쓸 거거든.”
유진이가 MBS 연기대상에서 가장 빛날 수 있게 손을 쓸 거라고 말한다.
레드 카펫 위 유진이가 입은 L.M.L 블랙라벨 드레스의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이미지 각인을 위해서라며.
문영미 대표는 자회사인 L.M.L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들었는데도 일정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내 오른쪽에 앉아 있던 이미리 대리가 조심스레 말한다.
“문 대표님. 혹시 드레스는 준비된 게 이게 다인가요?”
“아니. SBC에 ‘파란 하늘’ 때문에 가니까 추가로 2벌이 있고 예비로 혹시 몰라 2벌 더 마련해뒀어. 영아 성격에 아마 이따가 다 입어 보자고 할 거야.”
문영미 대표는 예비 드레스까지 태블릿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 드레스들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순간 문제는 드레스가 아니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것을.
그때였다.
촤르르륵.
커튼이 걷히고 미소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머리에는 벚꽃 모양의 비즈 장식이 된 머리띠를 하고 있다.
L.M.L의 블랙라벨은 아동용 옷이 없지만 미소를 위해 특별히 맞춤복으로 만들어 준 드레스였다.
덕분에 만족한 미소는 두 손으로 턱받침을 하며 외쳤다.
“짠!”
어떠냐며 눈을 방긋방긋 뜨는 미소를 보자 피팅룸의 모두는 웃음을 터트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난 행복해하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뭔지는 몰라도 지금부터 해결하면 되는 거지.’
늘 그러했듯 난 해답을 찾을 거다.
그리고 눈앞에 웃고 있는 유진이와 미소의 얼굴에 항상 웃음이 가득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 * *
유진이와 미소가 예비 옷들까지 입어 보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난 회귀 전 있던 일 중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급히 다이어리를 펼치자 내 생각대로 일정이 하나 남아 있었다.
[에브리데이 V12.1]
[날짜 : 2022년 10월 25일]
-PM 11:00 <연예가 빅뉴스> “부산 국제 영화제 행사 의상 논란. 여배우들의 똑같은 드레스.” (회의 내용 : 영화제 참석자들 의상 디자인 전면적으로 재점검해볼 것. LZ 패션의 이예서 실장 – 이수연 옷 담당 HK 의류 최인혜 실장 – 박연수 옷 담당. 두 실장한테 받은 옷들은 반드시 체크) -PM 11:30 <연예올타임즈> [부산 국제영화제 ‘베스트 or 워스트’] (워스트 드레서 부분 – 이수연 박연수)
회귀 전.
여배우 2명이 똑같은 디자인의 등이 파인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당시 여배우 중 한 명은 S급으로 평가받던 이수연이었고 다른 한 명은 조연급인 박연수였다.
여배우들이 공개적인 행사에 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온 것부터가 엄청난 문제였다.
하지만 그날 밤 더 큰 문제가 터진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수연이 멋대로 박연수의 드레스를 가로챘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검은 드레스는 박연수가 고른 디자인이었으나 이수연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후 조연인 박연수에게 포기를 하라고 했다면서.
그리고 억울하고 분했던 박연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욕먹을 각오를 하고 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고 말이다.
이수연은 평소 기가 세고 자기 멋대로 하는 이미지였기에 어처구니없게도 그 유언비어가 먹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수연과 그녀의 소속사는 인터넷으로 해명했지만 네티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연수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수연은 기자단 앞에서 펑펑 울며 적극적인 해명과 동시에 부주의함을 사과했고 박연수는 그제야 떠도는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니라며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이수연은 유언비어의 여파로 1년간 활동을 멈췄고 반면 바닥이던 인지도를 높인 박연수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매니저들은 실제로는 박연수 쪽에서 이수연의 드레스 디자인을 알아낸 뒤에 자작극으로 꾸민 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었다.
‘혹시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일이 생기는 거 아냐?’
드레스 디자인이 어떤 경로로든 유출된다면 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난 디자인이 유출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문영미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혹시 디자인이 샐 가능성은 없을까요?”
문영미 대표가 안심하라고 한다.
“아까 들어오면서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봤잖아. 그리고 디자이너 전원이 비밀유지 각서까지 쓰면서 작업한 결과물인데 설마 누출되려고?”
한국은 비밀유지 각서를 어기거나 디자인을 유출하고 도용해도 처벌이 낮은 편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감옥에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또한 보안 철저해 보인다고 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허점이 많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디자이너들을 감시하자고 해보고 싶지만 증거도 없이 남의 회사에서 의문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현재 유진이가 ‘워스트 드레서’가 된다는 건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디자인이 유출된다는 증거부터 찾고 다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몇 시간 동안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유진이에게 준비된 예비 옷 이외에도 십여 개의 샘플 옷을 모조리 입어 보게 했다.
이영아 대표가 보여준 L.M.L 블랙라벨의 의상들은 하나같이 만족스러웠다.
“여기까지예요.”
난 고생한 이영아 대표에게 감사를 표했다.
“옷들이 너무 멋지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정 팀장님이 이렇게 알아주니 고마운데요?”
이영아 L.M.L 대표가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난 그 틈에 디자이너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우선 디자인을 빼돌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과 안면부터 익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옷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들도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디자인 1실에 모여 있는데······ 인사 한번 하고 가시겠어요?”
“예.”
유진이 또한 좋은 디자인을 해준 디자이너를 보고 싶어 했다.
이영아 대표가 웃으며 앞장을 섰다.
“그럼 다 같이 가시죠.”
유진이와 미소의 의상은 피팅룸 한쪽에 마련된 전용 금고에 넣어 둔 채 다 같이 피팅룸을 나왔다.
이영아 대표가 지문 인식 키패드에 엄지를 대자 피팅룸 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힌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피팅룸에 출입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몇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저랑 본사 대표님들까지 총 세 명만 가능해요. 총괄 실장님이신 이예서 실장님도 저 없이는 여기 못 들어와요.”
‘잠깐 이예서라고?’
순간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조금 전에 확인했던 다이어리의 일정에서 이수연의 의상을 맡았던 담당자의 이름이 바로 이예서다.
당시에는 LZ 패션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 L.M.L에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예서 실장의 뒷조사부터 해봐야 할 것 같다.
다만 확실한 건 없었기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지웠다.
2층으로 올라간 난 이영아 대표의 소개로 디자이너들과 인사를 한 뒤 유진이와 미소를 데리고 L.M.L을 나왔다.
그리고 그 즉시 이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디자이너들의 명단을 알려준 뒤 모두에게 사람을 붙이라고.
그리고 특히 이예서 실장은 24시간 밀착 감시를 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12월 28일 밤 10시.
이수찬으로부터 다급히 연락이 걸려온다.
-형님! 까톡으로 사진 한 장 보냈습니다.
이수찬은 이예서 실장을 전담한 관찰 팀이 찍었다며 까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이예서 실장과 함께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유진이가 워스트 드레서가 되는 일의 전모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이예서 실장이 범인은 맞았지만 진짜 이 일을 기획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당신이······ 진짜 범인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