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화
46. 골든로드와 박은빈 2
인력 차출을 요청하는 박한철 실장의 말에 한명호 팀장이 거절 의사를 밝혔다.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너희는 무대 끝났다며?”
“그렇긴 한데 저희 실장님이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를 하셨거든요.”
“그래? 그럼 윤호만 빌리지 뭐.”
한명호 팀장이 인상을 찌푸린다.
“박 실장님. 얘는 배우 2실인 거 아시죠?”
“야.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 안 한다. 곱게 쓰고 돌려줄 테니 얼른 넘겨.”
내가 물건인가?
곱게 쓰고 돌려주다니.
아무리 박한철 실장이 서예종 라인이라도 이런 비상상황에 돕지 않을 순 없다.
골든로드 장은영과 쁘띠모 박은빈.
두 사람만 부딪치지 않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이기도 하고.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가수 1실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녀오겠습니다. 팀장님.”
난 웃옷을 걸치고 곧장 박한철 실장의 뒤를 따랐다.
* * *
가수 1실에 배정된 5인조 걸그룹 골든로드.
쁘띠모의 강력한 경쟁자이자 탑클래스로 평가받는 인기 걸그룹이다.
리더 장은영을 시작으로 박수진 최명은 정이수 윤지희가 거의 한두 살 차이가 난다.
장은영은 올해 24살.
그리고 막내인 윤지희가 19살이다.
박한철 실장이 능력자들만 빼서 골든로드를 만드는 바람에 회사 내의 연습생 팀 네 개가 공중분해 돼버렸다.
그렇게 급조해 만든 팀이다 보니 실력은 있으나 서로 간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친해질 겨를도 없이 무대에 서야 했고 뜨자마자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내야 했으니까.
그 탓인지 지금도 대기실에 앉은 골든로드의 멤버들은 서로를 쳐다도 보지 않고 각자 폰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뭐 해? 무대 올라갈 준비 안 하고!”
박한철 실장의 외침에 리더 장은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12살 때부터 연예기획사들을 돌아다니며 연습생 생활을 했기에 어지간한 일에는 미동도 안 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당연히 성격은 개차반이다.
“아 시끄러! 스태프 오면 출발하면 되잖아요! 안 그래도 눈길에서 사고 때문에 놀라서 저기압인데! 진짜!”
자기 아버지뻘은 될 법한 박한철 실장에게 하는 말버릇부터 터무니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박한철은 일상인 듯 혀만 찰 뿐이다.
“하여간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야 은영아. 지금 상황에서 스태프가 오겠냐? 리허설도 늦었는데 뭐가 이쁘다고? 까불지들 말고 어서들 일어나. 리허설 없이 바로 공연이니까.”
“에잇! 에이스에서 솔로로 나서 볼 생각 없냐고 했을 때 소속사를 옮겼어야 하는 건데!”
“또 그 이야기야? 에이스 엔터 가도 별 볼 일 없었을 거라니까?”
“아 몰라요!”
짜증 가득한 대답과 함께 장은영이 일어나자 다른 멤버들도 따라서 일어났다.
“얘들아 잠깐만. 의상 한번 확인하자.”
그 사이로 헐레벌떡 일어나며 골든로드의 옷에 묻은 실오라기를 떼 내는 사람이 있었다.
마치 큰언니처럼 이 제멋대로인 애들을 돌보는 은지유가 바로 내가 만나고자 싶었던 사람이다.
유진이가 미소를 잃고 나서 죽지 못해 살 때 그녀와 함께 마셨던 알싸한 소주 한 잔이 생각났다.
골든로드 챙기고 자기 삶을 챙기기도 바빴을 텐데.
그 힘들었던 과거에 미소가 죽은 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달래주던 선배 중 하나였다.
결혼하며 영영 이 업계를 떠나버린 그녀에게는 늘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지유 누나. 다시 봐서 진짜 반가워요.’
은지유 대리가 내 눈앞에 있는 걸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리 친하지 않은 대리 3년 차 선배일 뿐이었다.
골든로드의 옷 체크를 다 끝낸 은지유 대리가 미안한 기색으로 부탁했다.
“윤호 씨도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마워요. 미안한데 저기 구두 좀 챙겨 따라올래요?”
“예. 누나······ 아니 대리님.”
은지유 대리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 웃음을 터트렸다.
선한 눈매 탓에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는 얼굴이다.
“풋. 누나라니. 그렇게 부르는 거 나름 괜찮네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나도 모르게 회귀 전처럼 누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골든로드가 무대에서 신을 구두 다섯 켤레를 챙겼다.
뭉클한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니까.
“은 대리. 난 스태프랑 약속 있어서 만나러 가니까 애들 무대 올리고 체크 잘해?”
“예. 박 실장님.”
말은 저렇게 하고 실제로는 담배나 피우러 가겠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따라온 건 은지유 대리 혼자로는 커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얘들아 가자.”
은지유가 앞서고 골든로드가 그 뒤를 따랐다.
대기실 밖에는 여전히 스태프들이 우왕좌왕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6시 35분.
무대로 향하며 살펴도 여전히 6시 40분에 있는 다이어리의 일정은 그대로였다.
앞으로 5분 뒤.
백스테이지로 향하던 골든로드의 장은영과 쁘띠모의 박은빈이 싸움을 일으킨다.
무대로 향하며 어깨가 충돌했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하지만 마주치지 않게만 하면 충돌은 없을 거다.
그러니 가는 길을 달리해야겠다.
“은 대리님. 저기 더 빠른 길이 있습니다.”
앞서가는 은지유 대리를 붙잡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 그래요? 윤호 씨?”
“네. 저기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금방 도착······.”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든로드의 리더 장은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유 언니 잠깐만. 나 화장실 좀.”
골든로드의 리더 장은영이 인상을 찌푸린 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과민성 대장이 또 탈을 일으켰나 보다.
말릴 틈도 없이 화장실로 들어간 탓에 졸지에 우리 일행은 화장실 앞에 멈춰서 버렸다.
“짜증! 저 언니 또 저러네. 맨날 장 트러블이야.”
장은영보다 한 살 어린 박수진이 투덜거리더니 은지유 매니저에게 말했다.
“매니저 언니. 그냥 우리 먼저 가면 안 돼요?”
“아 그러니까 그게······ 은영이가 혹시나 제대로 못 따라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녀의 걱정은 우려가 아니었다.
KBC 방송국이 아니라 임시 무대이기에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라고요?”
막내 윤지희까지 짜증을 부리자 은지유 대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은 대리님. 먼저 가세요. 제가 장은영 씨 나오면 바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어? 그래 줄래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여기 길 잘 압니다.”
체리블라썸을 데리고 무대에 섰었기에 이곳은 이제 훤하다.
은지유 대리가 날 믿는다며 내가 알려준 길로 네 명의 골든로드를 데려갔다.
그리고 난 화장실 앞에서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월 12일]
-PM 06:40 (보고 사항) KBC 생방송 뮤직스테이지 중 골든로드와 쁘띠모 충돌.
“여전하네. 이거.”
장은영이 화장실에서 나오면 다른 길로 이끌어 박은빈과 만나는 일을 막아야겠다.
이왕이면 충돌이 안 일어나는 게 좋으니까.
“장은영. 너 오늘 나 때문에 산 줄 알아.”
그런데 장은영이 화장실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얘가 왜 이리 안 나와?”
현재 시각은 6시 39분.
사건이 발생하기 1분 전.
이대로 화장실에 있으면 40분에 있을 충돌이 사라지진 않을까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녹음 어플을 켰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장은영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박은빈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현재 시각 : 6시 40분]
폰 전자시계가 40분을 가리켰다.
그런데 다이어리의 일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뭐지? 설마 일이 안 일어나는 건가?”
그때였다.
장은영의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여자 화장실 안에서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너 뭐야?”
“뭐? 너 선배한테 뭐라고 했어?”
장소가 바뀌었다.
백스테이지가 아니라 이 화장실에서 싸움이 일어날 줄이야.
“야! 미쳤어? 어디 선배한테!”
“선배? 나이도 어린 게! 놔! 이거 안 놔? 꺄아악!”
“너나 놔. 이 썅X아!”
아주 쌩 라이브로 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진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아니 일정이 바뀐 적이 없냐.”
단 하나 변한 게 있다면 회귀 전에는 무대 뒤에서 있었던 충돌이 여자 화장실로 변한 거다.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싸우는 것 같은데 여자 화장실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윤호야. 뭐 해?”
스태프들이 웅성대는 사이를 뚫고 체리블라썸의 이주영 매니저가 나타났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에서 장은영이랑 박은빈이랑 싸웁니다. 선배님이 좀 말려주세요! 어서요!”
“아 알겠어!”
유도를 배운 이주영이 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이주영의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다 그만하고 놔요. 밖에 사람들 많다니까?”
“얘가 먼저 놔야 놓지!”
“손 안 치워? 얼굴 긁으면 너 고소할 거야!”
최근 골든로드의 상승세가 가파르게 올라가다 보니 두 그룹의 기 싸움이 치열했다.
그 앙금이 이런 식으로 폭발한 셈이다.
“놔!”
“너부터 놔!”
이주영 매니저가 간신히 두 사람을 데리고 나왔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있었다.
그때 마동팔 본부장 밑에서 쁘띠모를 케어하는 성지혁 팀장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곤 날 지나쳐 이주영 매니저의 손목을 잡았다.
“야! 너 뭐야? 우리 은빈이한테 손 안 떼?”
“아니 뭔가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전 두 사람 말리는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성지혁 팀장은 두 사람을 말리는 게 아니라 장은영을 밀치려 했다.
이 와중에도 자기 스타는 지킨다는 건가?
덥석!
나는 번개같이 움직여 성지혁 팀장의 손목을 잡았다.
“뭐야? 이 이거 안 놔?”
“이건 아니죠. 우리 소속사 가수 건들 생각하지 마시고 당신은 박은빈 씨나 말리세요.”
장은영이 하는 짓이 이쁜 건 아니다.
그래도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이 남에게 맞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순간 박은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 뭐야? 또 너야?”
넌 보자마자 반말이냐? 박은빈?
“박은빈 씨. 내가 그쪽 친구도 아닌데 말조심하세요. 그리고 장은영 씨도 어서 선배님 머리에서 손 떼세요.”
“쟤가 손 떼기 전엔 저도 손 안 떼요!”
아 진짜 장은영 이 싸가지.
말을 진짜 안 듣는다.
하지만 화를 내선 안 된다.
현재 이 모든 상황이 녹음 중이었으니까.
“두 사람. 좋은 말로 합시다. 여기 임시로 꾸며졌다고 해도 방송국이에요. PD님 아시면 노발대발하실 겁니다.”
차분.
침착.
공손한 말투로 달래는 데 주력했다.
장은영이 개차반이라도 최소한 굴렁쇠 엔터의 매니저만큼은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는 걸 어필하며.
순간 이주영 매니저는 뭔가 이상했는지 날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일단 두 사람 다 손부터 놓고 이야기하자. 장은영! 제발 말 좀 듣자 응?”
“아 진짜. 얘가 먼저 잡았다고요! 세면대 쓰는데 꺼지라고 욕했단 말이에요!”
억울한 듯 장은영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딴 건 관심 밖이다.
난 스태프에게 우리 굴렁쇠가 이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니까.
“장은영 씨 억울한 건 알겠어요. 그래도 일단 놓고 이야기합시다.”
일부러 녹음이 잘되라고 입을 아래로 하고 크게 외쳤다.
하지만 성지혁 팀장은 내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했다.
“XX. 하여간 못 배워먹은 티를 내요. 어디서 선배 머리카락을 잡아. 장은영. 너 양아치니?”
우리 가수에게 쌍욕을?
하지만 난 여전히 화를 내지 않은 채 태연하게 답했다.
“남의 가수에게 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장은영 씨. 손 내리세요. 먼저요. 어서!”
“아 진짜.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씩씩대던 장은영이 드디어 먼저 박은빈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박은빈도 그제야 씩씩대며 손을 내렸다.
“XX. 싸가지. 너 내가 가만 안 둬!”
박은빈의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져 나온다.
아 살벌하다.
그런데 사정을 들어보니 먼저 손을 쓴 건 박은빈이다.
세면대 하나가 고장 나 하나뿐인 세면대를 장은영이 사용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뒤늦게 화장실에서 나온 박은빈이 욕설을 지껄이며 자리를 빼앗으려 했단다.
장은영은 당연히 거절했고 그 순간 머리채를 휘어 잡혔다고 항변했다.
“선배가 쓰자고 하는데 비켜야지. 어디 따박따박 말대꾸야?”
박은빈은 여전히 자기 잘못은 없다는 태도다.
뭐가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녹음은 다 끝났다.
이제 스태프에게만 이 녹음 파일을 넘겨주면 된다.
“사정 알겠으니까 이쯤 합시다. 그리고 은영 씨. 다들 기다리니 어서 가죠.”
장은영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자꾸 말리기만 해요? 그쪽은 내 편 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내가 왜?
회귀 전 내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양반이다.
그나마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넘어가는 거지.
더군다나 골든로드의 싸가지 덕에 피해를 입은 매니저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기가 막혀서. 진짜 오늘 가지가지들 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