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3화
333. 사과 2
CK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실.
조재경과 손영임 고문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손형태 대표가 내 소파의 맞은편을 가리킨다.
공식적인 자리라는 걸 각인시키느라 상대의 직함을 부르면서 말이다.
“여기 앉으시죠. 손 고문님. 조 감독.”
손영임 고문과 조재경이 맞은편에 마지못해 앉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말을 꺼낼 기회도 주지 않고 손형태 대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자자! 서로 오해가 좀 있었나 본데 우리 조 감독은 빨리 사과하고 합의서에 도장 찍지. 여기 정 팀장도 바쁜 사람이야!”
손형태 대표가 사과를 종용하자 조재경이 멈칫거린다.
회귀 전에도 누군가에게 사과한 적이 없던 그였다.
조재경이 대체 어떻게 사과를 할까 기대를 하던 순간 손영임 고문이 짜증을 버럭 내며 끼어든다.
“손 대표. 그 전에 우리 조 감독이 먼저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게 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순간 이 자리를 주최한 손형태의 미간에 힘줄이 솟았다.
“저기······ 고문님은 좀 빠져주시죠?”
“손 대표. 우리 조 감독 차기작이 날아가서 얼마나 손해가 막심한 줄이나 알아?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고 돈은 돈대로 날아갔어. 나 이대로는 우리 조 감독 사과 못 시켜.”
“엎은 것도 아니고 잠깐 연기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좀 가만히 있어요!”
손형태가 언성을 높이며 손영임 고문을 째려본다.
그리고 재차 조재경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야. 조 감독! 정 팀장이 사과만 받으면 다 끝내겠다는데 왜 고문님까지 끌고 와서 이 난리를 펴?”
하지만 조재경이 달리 조재경일까.
팔짱을 낀 조재경이 사과할 마음이 없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외삼촌 체면을 생각해서 나오긴 했는데······ 저 인간 면상을 보니까 도저히 사과 못 하겠어요.”
“뭐?”
“나 저 새X 진짜 안 때렸다고요! 그리고 내가 지금 검찰 조사를 몇 번이나 받은 줄 아세요?”
손형태 대표가 버럭 화를 낸다.
“조 감독!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고막 나가겠네.”
손형태 대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손영임 고문이 아들 편을 들고 나섰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조 감독 신세가 이렇게 된 건 다 저 인간 때문이잖아! 사과를 받아도 우리가 먼저 받아야지! 그리고 형태 너 재경이가 카지노에서 스트레스 푼 일을 저 인간이 검사에게 꼰지른 거 몰라?”
손형태 대표가 씩씩거린다.
“증거도 없이 그건 또 뭔 소리야!”
“증거? 척 보면 몰라?”
손영임 고문은 이어서 내게 자기 아들이 카지노를 들락거린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기 시작한다.
조재경을 만나게 되면 이럴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그래서 난 미리 생각했던 대답을 꺼내놓았다.
“제가 그걸 검찰에 꼰질렀다고 누가 그럽니까?”
“뭐?”
“전 고아에 미국 한 번 안 가 본 놈입니다. 그런 제가 지구 반대편에 있던 조 감독님이 도박을 하는지 강도 짓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그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그제야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우들을 데리고 현장을 뛰다 보면 별의별 소문을 다 듣게 됩니다. 저도 지나가다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초면인 조 감독님이 저를 너무 무시하시길래 그냥 한 번 찔러본 것뿐입니다.”
손형태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나도 그게 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
“뭐 어쨌건. 조 감독님을 잘 알고 앙심을 품은 누군가의 짓이 아닐까요? 물론 조 감독님이 카지노에 간 것도 알고 미국에도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겁니다.”
딱 미래의 나지.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다.
뻔뻔하고도 태연한 내 대답에 조재경과 손영임 고문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마 말로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 너 맞잖아!”
말문이 막힌 손영임 고문은 그래도 내가 고자질을 한 거라며 우기기 시작했다.
순간 곁에 있던 조재경도 엄마와 함께 날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형태 대표가 내 편을 들었다.
“내가 듣기에도 정 팀장 말이 더 일리가 있는데? 하여간 두 사람은 도움도 안 되는 그딴 이야기는 됐고! 조 감독. 일단 빨리 사과부터 해.”
“외삼촌은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저 인간이 먼저 사과하면 나도 한다니까요?”
손형태 대표가 큰소리로 외친다.
“야! 조재경! 너 정말 이럴래?”
손형태 대표가 슬슬 빡치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이쯤에서 쇼 한번 해 줘야지.
난 함께 온 곽무혁 팀장에게 말했다.
“곽 팀장님. 아무래도 오늘 합의는 그른 거 같습니다. 제가 왜 여기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곽무혁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나 말이다. 손 대표님이 책임지고 중재하신다고 해서 찾아왔더니······ 이러면 그냥 가야겠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손형태 대표가 급하게 붙잡는다.
“어허! 가긴 어딜 가! 태풍 씨 차기작도 정해졌다며? 그 문제는 상의하고 가야지! 내가 프로모션 제대로 해줄 참이니까 일단 좀 앉아 봐! 어서!”
이태풍의 차기작으로 정해진 <지리산>을 밀어주겠다고?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난 밖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냉큼 멈췄다.
그때 조재경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아! 엄마! 외삼촌 좀 말려 봐! 진짜 미쳤나 봐! 내 작품이 아니라 저 새X를 밀어준다잖아!”
조재경의 응석에 손영임 고문이 나서려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참고 참았던 손형태 대표가 폭발해 버렸다.
“야! 조재경! 이쯤에서 합의 안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정부에서 널 벼르고 있다고! 알아?”
정부?
어쩐지.
이태풍의 <경계 너머로>가 잘 나가고 하루가 연일 인기를 끌어서 상대하기 만만치 않다고 해도 손형태 대표는 엄청난 힘을 가진 CK 그룹의 다섯째이자 CK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내게 저자세로 중재를 하려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여당 당 대표인 박상곤 의원이 뒷돈을 받은 사건이 터진 까닭에 정부는 대중의 관심을 금수저 논란에 시달리는 조재경에게 돌리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갑은 바로 나였다.
‘이거 재미나게 돌아가는데?’
금수저 논란에 휩싸인 조재경.
그리고 그걸 빨리 덮어야 하는 손형태 대표.
그 상황을 인지한 나는 슬그머니 곁으로 눈길을 돌렸다.
곽무혁 팀장도 어렴풋이 눈치를 챈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여간 손형태 대표가 먼저 나서 준 덕에 위험을 무릅쓰고 알고 있던 CK의 사건을 터트릴 필요가 없어졌다.
‘쉽게 해결되겠군.’
그때였다.
손영임 고문이 다시 한번 끼어들려고 하자 손형태 대표가 선수를 친다.
“누나. 한 번만 더 끼어들면 YM 유통과 계약을 끊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있어.”
YM 유통은 CK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팝콘과 음료수의 납품을 맡은 손영임 고문의 개인 회사인데 손형태 대표는 그 회사 수입의 90%를 차지하는 계약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혀 형태야!”
“이거 아버지한테도 허락받은 거야. 그러니까 더 열 받게 하지 말고 제발 입 좀 다물라고!”
CK 그룹의 명예 회장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말에 손영임 고문이 몸을 부르르 떤다.
누나를 조용히 시킨 손형태 대표는 다음엔 조재경을 노려본다.
“마지막 경고다. 재경이 너! 감옥 갈래? 사과할래?”
그제야 조재경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외 외삼촌! 고작 그 정도로 감옥······이라뇨?”
“이게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네? 맨날 영화나 쳐 만든답시고 여자나 후리고 다니더니?”
“외삼촌······.”
“야 인마. 뉴스 좀 보고 살아! 정부와 여당에서 박 의원한테 쏠리는 관심을 너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고! 이 한심한 놈아!”
손형태 대표의 폭언이 쏟아지자 조재경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평생 남을 아래로 생각하고 돈으로 모든 걸 무마했는데 권력이라는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
손형태 대표가 마치 버러지를 보듯 말한다.
“네 영화를 걸어주는 것도 나고 제작해 주는 것도 나다 조재경! 이 자식이 오냐오냐해줬더니 네가 진짜 갑인 줄 알아?”
평생 받아보지 못한 푸대접에 조재경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대답 안 해? 어쩔 거냐고 인마! 사과할 거야? 아니면 이대로 감옥 갈 거야?”
조재경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합의······ 하면 되잖아요.”
“합의보다 먼저 사과부터!”
조재경이 몸을 부르르 떨며 날 쳐다본다.
죽도록 사과하기 싫은 눈치였지만 마지 못해 고개를 살짝 끄덕거린다.
“이 새X가······ 똑바로 안 해?”
손형태 대표가 조재경의 뒷목을 부여잡고 강제로 눌러버렸다.
쿵.
조재경의 이마가 테이블에 박히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들이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치자 깜짝 놀란 손영임 고문이 소리를 질렀다.
“야! 손형태!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손형태가 이를 빠드득 갈며 누나를 째려본다.
“누나.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좋아. 지금 이 시각 부로 YM 유통 납품 중단될 거니까 그리 알아!”
“아 아니. 형태야 그게······.”
“더 빡치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다음으로는 누나 남편이랑도 거래 끊을 거니까!”
손영임 고문의 남편은 예천건설 대표.
그리고 CK 그룹은 상당한 건설 물량을 예천건설에도 나눠주고 있었다.
그 거래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제야 손영임 고문이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손형태 대표는 다시 조재경을 닦달했다.
“조카님. 잘 안 들리는데 다시 한번 크게 말해 뭐.라.고?”
조재경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기 시작한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정 팀장님. 잘못했습니다.”
조재경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묘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정 팀장도 분명히 들었지?”
화가 잔뜩 난 손형태 대표의 눈빛을 본 순간 지금이 조심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내가 여기서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면 저 분노가 내게도 쏟아질 테니까.
그래서 난 차분히 심호흡한 뒤 대답했다.
“예. 대표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린 대로 합의금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제야 손형태 대표의 얼굴에 분노가 잦아든다.
“합의금이 필요 없다고? 진짜 그래도 되겠어?”
“예.”
손형태 대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위아래로 쳐다본다.
“돈 안 받겠다는 거 그냥 한번 해 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나 보네.”
“예 대표님. 그보다 조 감독님을 좀 놓아 주시는 게······.”
손형태 대표가 그제야 조재경의 목에서 손을 뗀다.
“컥컥!”
조재경이 숨을 몰아쉬며 자기 목을 붙잡았다.
손영임 고문은 걱정이 되는지 아들의 목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손형태 대표가 그 모습이 진저리난다는 표정으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합의도 됐으니 정 팀장만 빼고 다들 좀 나가 있지?”
갑작스럽게 독대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 * *
조재경이 날 쏘아보며 손영임 고문과 함께 대표이사실을 나섰다.
곽무혁 팀장마저 자리를 비웠기에 CK 엔터의 대표이사실에는 손형태 대표와 나만이 남았다.
손형태 대표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못난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대표님.”
“저놈이 내 조카라지만 오냐오냐 자라서 개망나니야. 우리 정 팀장이 이해해.”
동의를 바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동의하는 순간 내 입으로 조재경이 개망나니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었으니까.
비록 조재경과 자신의 누나를 혹독하게 대했지만 내 기억 속에 손형태 대표는 누나와 아주 각별한 사이.
함부로 끼면 안 된다.
난 그의 대화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렸다.
“그보다 왜 절 혼자 남으라고 하셨습니까?”
“흠. 일단은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비밀로 해줬으면 해서.”
정부가 조재경을 희생양으로 삼고 CK 엔터에 포화를 돌리려고 한다는 걸 입을 다물어 달란 이야기였다.
난 뚝 하고 시치미를 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만.”
“이거. 우리 정 팀장이 센스가 있네.”
난 씨익 웃음을 지으며 무언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말인데······”
이젠 두 번째 부탁.
사실은 이제부터가 진짜일 거다.
손형태 대표가 슬쩍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한다.
“정 팀장은 LT 엔터 신 대표랑 친한 모양이던데 앞으로는 나와도 좀 친하게 지내지?”
“예?”
“쉽게 말하자면 신 대표는 버리고 이제는 나랑 손잡고 일을 하자는 거지. 어때?”
조카를 대할 때와는 달리 부드럽기 그지없는 태도다.
“저랑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 정 팀장이 작품을 좀 골라서 나한테 추천을 해주면 내 일이 한결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경계 너머로>의 영화 성공에 내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안다고 한다.
더군다나
CK 엔터테인먼트에서 보관 중인 <지리산>의 시나리오 초고도 확인했단다.
“지리산 그 작품. 초고라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훌륭하더군. 그것만 하더라도 정 팀장이 작품 고르는 눈이랑 배우 고르는 눈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겠더라고. 그래서 정 팀장이랑 같이 일을 하고 싶더라~ 이 말이지.”
‘날 필요로 한다고? 설마······.’
그 순간 어젯밤 정리했었던 CK 그룹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앞으로 1년 뒤.
CK 그룹의 현 회장인 손명우가 검찰 조사를 받고 구속되자 남은 형제들끼리 패권 다툼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CK 그룹의 전대 회장인 손대인 명예 회장이 자신이 보유한 지분을 모든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다 보니 생긴 사건이다.
결론은 구속에서 풀려난 현 회장 손명우가 반란을 일으킨 동생들을 진압하는 것으로 끝났고 손명우 회장은 동생들의 지분을 인수해 CK의 회장으로 확실한 입지를 다진다.
어쨌건 그건 나만이 아는 미래.
그걸 모르는 손형태 대표는 언젠가 있을 CK 그룹의 후계 다툼을 위한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자신에게 황금 꿀단지를 가져다줄 사람.
즉 성공하는 작품을 골라 확실한 실적을 안겨다 줄 사람이었다.
‘어마어마하네.’
대천그룹의 차기 주인도 내 손으로 바꿔버렸는데 이번에는 CK 그룹의 후계 구도에도 끼어들게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 여당 당 대표의 명줄을 흔든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대천그룹 때처럼 적극적으로 분쟁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조 감독님이랑 손 고문님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때였다.
손형태 대표가 씨익 웃으며 예상치 못한 대답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