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332. 사과 1
회귀 전.
난 주영인의 이름으로 앞세워 김치를 판매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주영인은 얼굴만 빌려주고 매출의 0.5%의 로열티를 받았는데 예상외로 꽤 큰 수익을 올렸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사업하는 백종석 대표와 동업이라면 얼마나 큰 돈을 벌 수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하루 네 생각은 어때?”
잠깐 고민하던 하루가 날 쳐다본다.
“형 생각은 어때요?”
“괜찮을 거 같긴 해. 백 대표님이 보통 사업가도 아니고.”
백종석 대표가 흐뭇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친다.
“우리 정 팀장이 절 너무 띄워주시네요. 저 장사꾼입니다.”
“그러니까요.”
“예?”
“하루의 메뉴가 돈을 벌 수 있는 상품이다 싶으니 이런 제안을 해주시는 거 아닙니까?”
백종석 대표가 껄껄대며 웃는다.
“허허.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됩니까?”
흐뭇한 표정을 짓던 백종석 대표가 말한다.
“상세 조건은 차후 논의하더라도 매출 1%를 로열티로 지급할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난 즉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조만간 법무팀장님과 함께 회사에 방문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 결승전이 끝나는 대로 미팅 한번 잡으시죠. 광고비는 따로 한번 논의해야 할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결승 무대 음식은 공정하게 평가할 테니까 아직 안심하지 마세요.”
비즈니스 이야기를 끝낸 백종석 대표가 하루를 쳐다본다.
“제품 개발을 할 때는 하루 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지?”
“예. 대표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돈 벌려고 하는 건데. 하하하.”
백종석 대표가 유쾌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잠시 후.
개인 인터뷰에서 하루는 엄마와 세리의 이야기를 덤덤히 털어놓았다.
어릴 적 자신을 떠난 엄마를 원망하지 않으며 이해하며 그저 보고 싶을 뿐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세리와의 남매 같은 사이에 대한 일화도 흘러나왔다.
미리 조한일 PD에게 협박(?)한 것 때문인지 불편한 질문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 * *
<먹방의 테이블> 4강전 촬영을 마친 후 최소혜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소혜 기자는 하루와 세리의 인터뷰를 하자더니 내 승낙이 떨어지자 곧바로 회사로 찾아왔다.
4층 회의실에서 인터뷰 준비를 마친 순간 세리가 들어왔다.
“어? 최 기자님 하이~ 근데 벌써 오셨어요?”
“세리 하이~ 어 우리 세리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세리는 최소혜 기자와 반갑게 인사를 한 뒤 하루의 곁에 앉았다.
잠시 카메라 세팅을 한 뒤 곧장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한 명은 먹방계의 스타가 된 하루였고 다른 한 명은 곧 컴백을 앞둔 인기 아이돌 세리.
두 사람이 한 앵글에 담기자 최소혜 기자의 입꼬리가 연신 위를 향했다.
최소혜 기자가 먼저 두 사람의 인연을 묻는다.
“언제부터 친구였어요?”
세리가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한다.
“하루랑 전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어요. 하루 부모님이 저희 과수원에서 같이 일하셨거든요. 뭐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제가 하루를 거의 키운 거나 다름없죠. 학교 갈 때도 제가 데리고 다녔으니까!”
세리가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살짝 올리는 순간 부끄러움은 하루와 매니저들의 몫이었다.
최소혜 기자가 웃음을 꾹 참으며 되물었다.
“하루 씨도 한마디 해주셔야죠. 세리 씨 의견에 동의하세요?”
세리가 하루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잘하라는 눈빛을 보낸다.
하루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세리가 저 키운 거.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이상한 나물을 먹이질 않나. 같이 할아버지 사과밭에서 서리하자고 하질 않나. 아 그리고 번데기가 몸에 좋다면서 사과 속에 있는 벌레를 강제로 먹이고······.”
하루의 대답이 이어질수록 세리가 당황해서 손을 휘젓는다.
“아름다운 옛 추억을 왜곡하다니! 너 진짜 이럴 거야?”
“왜곡이 아니라 팩트거든?”
얌전했던 예전과 달리 하루가 말싸움으로도 지지 않자 세리가 장난스레 투덜거린다.
옛날에 착하디착한 하루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소꿉 시절을 이야기할수록 기삿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30분간의 인터뷰가 끝나자 최소혜 기자가 녹음기를 끈다.
“자 그럼. 여기까지 하죠.”
인터뷰를 끝낸 하루와 세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최소혜 기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 보기 좋네요. 기사는 제가 알아서 잘 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난 하루와 세리를 이영진과 도란희에게 맡긴 뒤 지하 주차장까지 최소혜 기자를 따라가며 몇 가지를 당부했다.
혹여나 스캔들로 번지지 않게 말이다.
“나 못 믿어?”
“기자님은 믿죠. 믿지만 혹시나 다른 기자들이 베껴 쓰면서 사고가 터질까 봐 그러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내가 특별히 관리할게.”
최소혜 기자가 손을 들며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잉.
창문이 내려오더니 최소혜 기자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근데 오늘 현장에서 하루 날아갈 뻔했다며?”
“벌써 소문 들으셨습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CK 윗선에서 하루를 날리려고 한 건 누군데? 소스 좀 줘. 내가 잘 마사지해서 자근자근 밟아줄게.”
조재경이 CK 그룹의 전무를 움직여 손을 쓴 내막은 CK 엔터 대표와 말해 이미 덮기로 한 상황이다.
“말 못 하는 거 아시면서 이러십니다.”
“말할 수 있는 거 다 아는데 또 비싸게 군다.”
최소혜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날 가리킨다.
하여튼 날 너무 잘 알고 있다니까.
“봐서요. 내일 상황이 잘 안 풀리면 바로 전화 드릴게요.”
“약속한 거다?”
“예. 기자님.”
“오케이. 그럼 갈게. 바이~”
최소혜 기자가 신이 난다는 표정으로 차를 몰고 나섰다.
그리고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최소혜 기자가 쓴 인터뷰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체리블라썸’의 세리. 최근 핫한 먹방 스타 하루와 소꿉친구!]
[<먹방의 테이블> 잃어버린 엄마의 요리를 준비한 하루. 객석은 눈물바다.]
(댓글)
-하루랑 세리랑 소꿉친구였어? 와~ 대박.
-둘 다 사투리를 안 쓰던데?
-같이 찍은 옛날 사진 보니까 참 잘 어울린다. 나도 저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네.
-완전 남매네.
-얘들 둘 말하는 게 디게 귀엽다.
-초등학생 둘 앉혀 놓은 것 같네. ㅋㅋㅋ.
-찐 소꿉친구 맞네.
최소혜 기자가 기사를 잘 써준 덕에 스캔들 대신 두 사람이 소꿉친구라는 사실이 네티즌의 머릿속에 각인 되었다.
그제야 안도한 난 회의실에 모인 팀원들에게 말했다.
“자자. 일단 큰일은 하나 넘겼네. 이제 하루 다음 주 경연 문제나 이야기해봅시다.”
다음 주 <먹방의 테이블> 결승 무대 주제는 ‘소중한 사람에게 대접하고 싶은 하루 세끼 밥상’.
하루가 어떤 음식을 만들까 걱정이 된 이영진이 물었다.
“팀장님. 제가 아는 조리과 교수님들이 몇 분 계신 데 한번 연락을 넣어 볼까요?”
“연락해서 뭐 하게?”
“뭐 하긴요? 메뉴 선정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지.”
“기각.”
“예? 왜요?”
“나쁜 의견은 아닌데 하루 본인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나 보더라고.”
이영진이 재차 묻는다.
“하루한테 다 맡겨 두시게요?”
“그래. 알아서 잘하잖아. 4강전 메뉴도 전부 하루가 생각한 거고. 그러니까 어설프게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두자.”
하루가 꼭 혼자서 해 보고 싶다는 말에 난 홍보전에만 신경을 쓰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하루 스타그램에 광고 좀 하고 유진이랑 다른 정 팀 배우들한테도 응원 부탁하세요 김 대리님.”
홍보 담당인 김미혜 대리가 힘차게 외친다.
“예! 팀장님!”
그 이후 정 팀의 회의는 순조로웠다.
이태풍의 <경계 너머로>의 성공적인 관객몰이에 강하나의 음악방송 1등에.
김동수가 정직을 당해 회사에 나오지 않은 이후부터 모든 일이 쉽게 풀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배우 3실이 집중 감사를 당해 하나둘 비리가 조금씩 터져 나오는데도 김동수는 회사에 얼굴 한번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김동수. 이 자식은 뭐 하고 있지?’
탑 엔터테인먼트의 설립 일정이 여전히 그대로였기에 이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김동수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니까 말이다.
* * *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곽무혁 법무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 뒤에 CK 엔터테인먼트 입구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은 뒤 기지개를 켰다.
“후우. 일어나야지. 합!”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일으킨 난 스트레칭을 하며 거실로 나갔다.
창문을 통해 비추는 햇볕이 오늘따라 따뜻했다.
조재경 감독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에 입꼬리도 살살 올라가고 있었고.
기쁜 마음에 두 손을 위로 뻗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자마자 격하게(?) 움직인 탓일까.
찌릿한 통증이 종아리부터 타고 올라왔다.
‘쥐다!’
종아리 근육이 뒤틀리는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자세를 바로 하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며 유진이와 미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밥 먹어요.”
“삼촌. 밥밥밥!! 할머니가 된장찌개랑 고등어구이 해뒀어요!”
절묘한 타이밍으로 두 사람이 날 부른 탓일까 쥐를 풀 시기를 놓쳐버렸다.
게다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반대쪽 종아리에서도 쥐가 올라온다.
“아아악! 쥐! 쥐!”
내 비명에 유진이와 미소가 깜짝 놀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어디요? 어디?”
“양쪽 종아리. 종아리!”
난 이를 꽉 깨물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체를 앞으로 굽힌 뒤 발끝을 잡아당겼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근육이 제멋대로 날뛰느라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자 유진이가 체중을 실어 양손으로 내 발끝을 밀었다.
“끄으응! 오빠. 이렇게 하면 돼요?”
“어. 그 그래. 그렇게······ 거 거기.”
유진이가 힘을 써준 덕에 꼬인 근육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소는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외치고 있었고.
“야옹! 야옹!”
“그 그건 뭐니?”
“고양이예요.”
쥐가 나왔을 땐 고양이가 쫓아준다나?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듣다 보니 왠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에게 외쳤다.
“미 미소야. 조금만 더 크게 해줄래?”
그 순간 미소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미~아~아아~~오오오~~옹~~”
* * *
CK 엔터테인먼트 본사.
주차장에다 차를 대고 잠시 기사를 보고 있자 곧 곽무혁 팀장의 차가 도착했다.
“일찍 왔네?”
“길이 안 막히더라고요.”
“그래. 어서 올라가자.”
대표이사실이 있는 22층에 도착해 내리자 비서들이 방긋 웃으며 우릴 맞이했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경계 너머로>가 흥행하는 까닭에 손형태 대표는 우리 체면을 상당히 챙겨주고 있었다.
대표이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형태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정 팀장. 왔습니까?”
“예. 대표님.”
손형태 대표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날 반긴다.
자리에 앉자 손형태 대표가 곤란한 표정으로 날 달래기 시작했다.
“철없는 조카 놈이 정 팀장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길래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도 내 얼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합시다.”
“대표님이 직접 용서를 구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일도 잘 막아주셨고요. 아 그리고 말씀 편히 하십시오.”
손형태 대표의 얼굴이 환해진다.
“하하하. 그럴까? 역시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네. 알았어.”
손형태 대표의 힘을 빌려 조재경을 혼낼 생각이었기에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췄다.
그때였다.
삐이이.
-대표님. 조 감독님 로비에 도착하셨습니다.
“그 새X 올라올 때 고개 확실히 박고 바로 올라오라고 전해.”
그때였다.
비서가 어색한 말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저기······.
“왜?”
-혼자 오신 게 아니라 손영임 고문도 함께 오셨습니다만.
“뭐?”
손영임이라는 이름을 들은 손형태 대표가 미간을 찌푸린다.
손영임 고문은 CK 그룹의 다섯째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총괄하는 손형태 대표보다 3살이 많은 친누나.
하나뿐인 외동아들 조재경을 애지중지하는 아들 바보로도 유명했다.
“고문님께는 밖에서 좀 기다려 달라고 전해.”
-그게 저······ 같이 들어갈 거 아니면 조재경 감독님과 함께 돌아가시겠다는데요?
손형태 대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내 앞에선 점잖은 척 굴고 있지만 손형태 대표의 성격도 실은 손영임 고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만약 그까지 화를 터트리면 상황이 심각하게 꼬일 수가 있기에 내가 먼저 말리고 나섰다.
“대표님. 괜찮습니다. 함께 뵙죠.”
손형태 대표가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는 날 쳐다본다.
“괜찮겠어?”
“예. 화해하려고 온 건데 누가 온들 어떻습니까? 그리고 전 사과만 받으면 바로 가겠습니다. 손 대표님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일부러 그가 듣기 좋은 말만 언급했다.
손형태 대표는 앞으로도 10년간은 거뜬히 CK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직을 수행하니까.
손형태 대표가 짧게 한숨을 쉬고 민망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진짜 정 팀장을 볼 면목이 없어. 조카 놈만 아니었으면 저 자식을 그냥!”
손형태 대표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손형태 대표는 숨을 고르고는 인터폰을 눌렀다.
“두 사람 모두 올려 보내.”
-예. 대표님.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실의 문이 열렸다.
손영임 고문이 먼저 들어왔다.
날카로운 인상의 손영임 고문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조재경이 같은 표정을 한 채 따라 들어왔다.
마치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건 자신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너 답지.’
난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CK 엔터테인먼트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조리 머릿속에 담고 왔다.
만약 조재경이 내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터트릴 셈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