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1화
331. 먹방의 테이블 3
모두의 시선이 세 사람의 평가원들에게 모였다.
기본적인 촬영 대본은 정해져 있지만 맛에 대한 평가와 판정만은 백종석 대표와 이순자 요리연구가와 여원희 종가음식 보존회장에게 일임한 상황.
PD가 답답하다는 듯 손짓으로 감상평을 말해달라는 신호를 준다.
하지만 백종석 대표는 평가는커녕 밥 한술을 큼직하게 뜨더니 백김치찜을 다시 한번 베어 물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똑같이 따라 밥과 함께 머금고는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때 백종석 대표가 하루를 쳐다보며 말한다.
“하루 씨. 이 음식을 만드는 법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하루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어 엄마가 친구네 집에서 배워 온 거예요.”
일반적인 붉은 김치찜은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음식이지만 묵은지 백김치와 보쌈은 과거에도 있던 음식.
세리네 집안에서는 오래전부터 묵은지 백김치로 보쌈을 싸서 백김치찜을 해 먹었었고 하루의 엄마는 그 요리법을 배워 하루에게 해줬다고 한다.
하루는 엄마에게 배운 요리를 내놓은 것이었고.
백종석 대표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이런 맛이 났군요. 전통 방식으로 담근 묵은지 백김치가 보쌈을 감싸고 있어서 좀 놀랐습니다. 마치 종갓집 며느리가 만들어낸 음식처럼 깊은 맛이 있어 놀랐고요. 잘 먹었습니다.”
곁에 있던 여원희 종가음식 보존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놀랐어요. 우리 하루 군 나이가 16살인데 이런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을 내놓은 줄 꿈에도 몰랐거든요.”
이순자 요리연구가도 그 말에 동의를 표했다.
“고기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시간을 정확하게 잡아낸 점이 대단하더군요. 짧은 시간에 만들기 힘들었을 텐데 과연 4강전까지 올라올 실력이다 싶네요. 잘 먹었어요.”
백종석 대표에 이어 두 심사위원까지 연이은 호평이다.
백종석 대표는 다음으로 처음 먹은 연탄불고기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 연탄불고기를 재우는 데 쓴 불고기 간장양념은 직접 개발하셨습니까?”
하루가 주춤거리며 말한다.
“아뇨. 이것도 엄마가 하시던 방식을 따라 해봤습니다.”
백종석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왜 연탄불고기에서 러시아에서나 먹는 샤슬릭이 생각나지? 그래서 제가······.”
그때였다.
하루의 큰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하루 씨?”
백종석 대표가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하루가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아 죄송합니다.”
이수찬에게 하루의 엄마를 찾아달라 부탁하고도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하루의 엄마 나탈리아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하루의 얼굴이 방송을 통해 알려졌는데도 회사에 연락 한 번 없었고.
그래서인지 하루는 엄마의 고국인 러시아가 거론된 순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려버렸다.
깜짝 놀란 이순자 요리연구가가 붉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예쁜 얼굴 다 망가지네. 우리 하루 군이 갑자기 왜 울고 그럴까?”
여원희 보존회장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루를 달랜다.
PD와 스태프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프로답게 카메라 포커스를 하루에게 집중시켰다.
하루는 눈물을 닦고서 연신 주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러시아 출신인 엄마 생각이 나서요. 실은······ 엄마가 지금 어디 계신지 알지를 못하거든요.”
“아이고 저런~ 내가 그런 사연이 있는 걸 모르고 괜한 소리를 했네······”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백종석 대표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먹던 샤슬릭 맛이 났군요. 그런데 신기한 건 밥을 먹으면 또 완전한 한식이더라고요. 그래서 신기해서 물어봤습니다.”
이순자와 여원희도 같은 말을 꺼낸다.
“그래요. 소스를 각각 찍을 때마다 다른 맛이 나는 것도 신기하네요. 혹시 양념에 뭔가를 더했나요?”
하루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엄마가 쓰던 향신료를 조금씩 섞었어요. 한식 그대로도 좋지만 섞으니까 맛이 더 다채롭더라고요.”
두 문화권이 한데 섞인 요리가 연탄불고기로 탄생한 비화가 설명되고 있었다.
모든 의문을 푼 백종석 대표가 감사와 축복을 기원한다.
“따뜻한 한 상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루 씨가 빨리 어머니를 만나기 빌겠습니다.”
하루의 엄마에 관한 사실이 밝혀지자 조한일 PD의 얼굴이 더욱 밝아진다.
방송인은 누구나 밋밋한 이야기보다 자극적인 소재가 들어가는 걸 반기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고편 때 써먹겠군.’
이미 메인 작가가 타이핑을 치기 시작하는 걸 보면 잠시 후 있을 인터뷰에서 집중적으로 물어볼 게 틀림없었다.
난 즉각 이영진을 향해 준비를 시켰다.
“영진아. 인터뷰 준비해야겠다.”
“예. 팀장님.”
그때였다.
작가가 폰을 잠깐 본 뒤 놀란 표정으로 PD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순간 조한일 PD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무선 인터콤으로 지시를 내렸다.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듣고 있던 김진태 MC가 뭔가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종석 대표의 평가가 끝이 난 순간 김진태 MC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이렇게 해서 모든 음식에 대한 평가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루 씨. 체리블라썸의 김세리 양과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하루에게는 인연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했었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을 못 하고 멈칫거린다.
하루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백종석 대표가 슬그머니 운을 띄운다.
“괜찮아요. 어릴 때 소꿉친구가 있는 게 뭐가 어때서유. 남자랑 여자는 친구 하면 안 되나유~?”
친밀한 사투리로 말하는 백종석 대표의 격려에 하루가 걱정을 조금 내려놓았다.
“사실은······ 세리랑은 고향 친구예요. 저희 엄마랑 세리 엄마도 친하셨었고요. 조금 전 묵은지 백김치찜 요리는 세리네 집에서 먹던 거예요.”
백종석 대표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음식을 나누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했습니다.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감사합니다.”
하루를 데려올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 생겼기에 이영진에게 이 또한 준비하라고 일렀다.
평가가 끝난 순간 PD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 여기서 잠시 쉬어 갑시다. 일단 심사위원분들이 결론 내시는 동안 10분간 휴식하겠습니다. 스크립터랑 작가들은 가서 빨리 음식 먹어봐요.”
차후 편집 대본을 위해 작가진들은 의무적으로 음식을 맛봐야 했다.
음식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알아야 자막을 달고 BGM을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스태프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 사이 경연을 끝낸 하루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눈물이 살짝 번진 하루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다가오고 있다.
난 하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걱정하지 말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잘했어. 그리고 세리 문제도 걱정하지 마. 이미 보도 자료 뿌릴 준비도 다 해뒀으니까.”
“그래도요.”
“엄마랑 소꿉친구 이야기를 한 게 어때서? 하루 넌 다 잘하고 있으니까 지금 하는 대로만 해.”
그제야 하루의 얼굴에 걱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경연 진짜 끝내주더라? 우승각 나온 것 같던데?”
하루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진택 형이 너무 잘해서 결과는 두고 봐야 알아요.”
아무튼 하루가 한결 밝아진 모습을 보이자 이영진도 장난을 걸었다.
“진택이는 무슨. 우리 하루가 최고지!”
“형. 목소리 좀 낮추시지······.”
“내 목소리가 왜?”
하루는 다른 매니저들이 듣겠다며 소리를 낮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영진은 매니저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하루를 위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하루의 기분이 조금 올라간 터라 곧 있을 인터뷰에 관해 말을 꺼냈다.
“이따가 개인 인터뷰 때 분명 엄마에 관해 물을 건데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루가 날 빤히 쳐다본다.
“진짜요?”
“그래. 하루 네가 싫다면 어떻게든 막아줄게. 하지만 이왕이면 조금은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 말도 안 하면 방송국 놈들은 멋대로 내용을 짜깁기할 거거든.”
잠깐 고민하던 하루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그러면 조금 이야기할게요.”
“그래. 너무 심한 질문은 안 하게 미리 조율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마음 같아서는 방송에다가 하루의 엄마를 찾는다고 대대적인 광고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의 엄마가 어떤 상황인지 하루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현장의 막내 최상영 AD가 쭈뼛대며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저기······ PD님이 좀 보자고 하시는데요?”
내가 하루와 이야기 중이라 이영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 보고 오겠습니다.”
“아. 이 대리님 말고 정 팀장님만 보자고 하시던데······.”
최상영 AD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 조한일 PD가 하루를 떨어뜨리려고 했던 일을 이야기하려나 보다.
난 이영진에게 남아서 하루를 케어하라고 한 뒤 조한일 PD에게 향했다.
“어 정 팀장. 요즘 현장에 잘 안 오시더니 오셨네요.”
조한일 PD는 하루를 떨어뜨리려고 한 일에 관해서 시치미를 뚝 뗀 체 안부 인사를 건넨다.
매번 느끼지만 방송국 인간들의 뻔뻔한 점에는 매번 놀라울 뿐이었다.
“4강전이라서 현장에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이따가 개인 인터뷰 때 하루 엄마 이야기랑 세리 이야기를 같이 내보내서 인터뷰할 건데 괜찮죠? 내가 그림 잘 뽑아 드릴게요.”
시청률에 큰 도움이 될 거란 말에 난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아까 전 하루를 떨어뜨리려고 한 일이 괘씸하기도 했을뿐더러 따로 얻어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PD님은 어린 애 가슴을 그렇게 후벼 파고 싶으십니까?”
일부러 삐딱하게 말하자 조한일 PD가 헛기침한다.
“크흠. 거 내가 꼭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그리고 세리 문제도 그렇습니다. 여자 아이돌에게 남자 문제는 치명적인 거 모르십니까?”
조한일 PD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 왜 이렇게 까칠합니까?”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가 경연에서 떨어질 거라고 들어서 기분이 별로네요.”
이미 끝난 일이지만 난 일부러 뒤끝 있게 굴었다.
“크흠. 지나간 일을 가지고······”
연신 헛기침을 하던 조한일 PD가 말을 잇는다.
“그동안 하루가 시청률 견인한 일등 공신인 건 내가 제일 잘 알아요. 하지만 위에서 찍어 누르는데 별수 있나? 이번엔 정 팀장이 내 사정 좀 봐줘요.”
조한일 PD의 조급한 표정을 보니 하루가 잘리는 일은 없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럼 이제는 바라는 걸 말할 차례였다.
“그러면 이번 화는 어떤 그림으로 뽑아주실 겁니까??”
그제야 조한일 PD가 내 의도를 알아채고 대꾸한다.
“내가 이번 화는 하루 스페셜로 만들어 줄게요. 콜?”
“그래도 부모님 문제는 좀 민감한데······”
“내가 안 아프게 살살 마사지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난 마지못해 알겠다고 허락했다.
“대신 하루가 힘들다고 하면 인터뷰는 중지하겠습니다.”
“아 아니. 중지라뇨?”
“그럼 그냥 관둘까요?”
가만히 날 쳐다보던 조한일 PD의 입에서 결국에는 항복선언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내가 먼저 실수한 게 있으니 이번 한 번은 정 팀장이 하자는 대로 하죠.”
PD와의 아슬아슬한 거래가 완벽한 내 승리로 끝이 나고 있었다.
* * *
10분의 시간이 지나고 평가의 시간이 돌아왔다.
백종석 대표가 먼저 떨어질 사람을 언급했다.
“우선 돼지갈비찜을 만드신 박준서 씨. 참 좋았습니다만 토마토를 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네요. 준서 씨는 여기까지인 거 같습니다.”
TNT 엔터의 박준서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귀각을 노리던 중 요리 오디션 4강까지 올라오며 뉴스도 여러 번 탔기에 기분도 좋아 보였다.
이어서 에이스 엔터의 정진수가 탈락의 고배를 맛봤다.
백종석 대표는 그에게 덕담을 남기며 PD와 방송국의 체면을 살려줬다.
“이 프로가 시작할 때 모든 출연진 중에서 요리에 가장 서툰 분이 바로 정진수 씨였죠. 저도 우리 진수 씨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먹방의 테이블’에서 가장 많이 발전한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진수가 웃으며 탈락을 받아들었다.
남은 건 이진택과 하루 둘뿐.
“여기 두 사람이 결승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백종석 대표의 칭찬에 하루와 이진택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인다.
<먹방의 대가>에 이어 이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하루야. 백김치찜 너무 맛있던데?”
“저도 형 같은 실력자와 경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어요.”
“나야말로. 네 덕에 요즘 나까지 연관 검색어 되는 거 알아?”
이진택은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상당히 겸손해져 있었다.
날카롭게 각이 서 있던 모습도 사라지고 갈수록 털털해지는 모습에 시청자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고.
이진택과 인사를 마친 하루는 신이 나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형! 저 결승가요!”
“축하해.”
하루는 잔뜩 기쁜 얼굴로 매니저들과 인사를 나눴다.
“자자 하루야. 그쯤하고 5분 뒤에 개인 인터뷰해야 하니까 화장부터 고치자. 어서 준비해.”
방송에서는 경연이 끝나면 바로 종료지만 녹화 현장에서는 개인 인터뷰 때문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예 형.”
그때 심사위원들과 담소를 나누던 백종석 대표가 급히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백 대표님.”
“아 예. 하루가 아까 만든 음식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백종석 대표는 씨익 웃더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꺼낸다.
“실은 아까 하루의 레시피로 제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루의 연탄불고기를요?”
백종석 대표는 한국 최고의 프랜차이즈 전문가.
그런 그가 하루의 음식으로 상품 개발을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