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화
145. 영원한 1등은 없다 6
‘박수무당 정 스타’라.
어쩌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나 했더니 김성운 PD가 피식대며 웃고 있었다.
‘범인은 당신이었군.’
하지만 여전히 잔뜩 기대에 부푼 김명학 CP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게 우선이다.
어차피 논리적인 걸 바라는 게 아닐 테니 CP의 기분이라도 좋게 해줘야겠다.
“무조건 대박입니다!”
“얼마나?”
“올해 최고가 될 거 같습니다!”
김명학 CP가 만족한 듯 환하게 웃는다.
“그럼 정 대리 보증도 받았으니 제작사 교체 건은 내가 책임지고 진행해 보겠네.”
“예에? 보증이라뇨?”
‘가족 간에서도 서지 말라는 보증이 여기서 왜 튀어나와?’
갈수록 태산이다.
“왜? 성공한다며?”
“아니. 성공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됐고.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제작사 추천할 곳은 없어?”
“그게 저 딱 떠오르진 않는데 지금 파란 하늘을 만든 블루드래곤이 어떻습니까?”
얼떨결에 제작사 추천까지 하자 김명학 CP가 피식하고 웃는다.
“알았어. 그러면 제작사는 블루드래곤으로.”
김명학 CP는 그렇게 윗선에 보고하겠노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히 김명학 CP를 붙잡았다.
잘하면 독박에 피박까지 쓰게 생겼으니까.
“CP님. 최소한 제작사 선정은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시고 결정을 하시는 게······.”
“몰라. 잘못되면 정대리 탓이니 그리 알아.”
김명학 CP가 낄낄대며 사라졌다.
소파에 앉은 김성운 PD가 얄밉게 웃는다.
“아니. 김 PD님.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김성운 PD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곁에 있는 김찬성 변호사에게 말했다.
“변호사님.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자리 좀 비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 전 커피나 한잔하고 오지요.”
김찬성 변호사가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간다.
단둘만 남자 김성운 PD가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실은 김 변호사님이 전해 준 붉은달 재무 상황을 이미 확인했습니다. 우리 CP님도 그걸 보고 제작사를 교체하기로 마음먹은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휴우. 난 또······.”
“우리 정 대리님 별명이 박수무당 정스타라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셨겠죠. 솔직히 정 대리님이 손댄 일마다 다 성공한 게 어디 보통입니까? 유진 씨에 체리블라썸에 이태풍 씨까지. 심지어 최근엔 김종훈 씨까지 손을 뻗쳤다면서요?”
SJ 엔터의 김종훈이 굴렁쇠 엔터에 드나든다는 소문도 들었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전 이제 PD 달고 첫 입봉작도 실패로 돌아갔는데 정 대리는 1년 차부터 엄청난 결과를 냈으니까요.”
“에이 그게 어떻게 실패입니까? 성공하다가 교체당하신 거죠. 그리고 저 이제 2년 차입니다.”
“그거나 그거나요.”
김성운 PD가 피식 웃더니 이지연 작가의 말을 옮겼다.
“아참 이 작가님이 묘한 말씀을 하시던데요.”
“무슨 말씀요?”
“유진 씨의 만신 월아 연기를 기대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김성운 PD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럽니까?”
바로 답해주려다 아까 놀림 받은 걸 되돌려주자 싶었다.
“나중에 직접 보시면 압니다.”
김성운 PD가 애가 달아 발을 동동대다 결국엔 포기하고서 피식 웃는다.
“짓궂은 데가 있으시네 우리 정 대리. 하여간 알겠습니다. 그런데 유진 씨가 1인 2역을 맡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누가 있죠?”
방송국 내에서는 유진이의 1인 2역을 아는 사람은 김성운 PD뿐이었다.
“이지연 작가님이랑 멘토로 오신 김수희 선생님. 그리고 저희 소속사에서는 구성철 실장님이랑 특수효과 메이크업 담당의 양소리 대리가 전부입니다.”
김성운 PD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보안 유지 잘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그렇게 김성운 PD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성운 PD의 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잠깐만요. 대표님 전화네요.”
그런데 전화를 받는 김성운 PD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예. 대표님. 올라오라고요? 지금요? 정 대리도 같이요?”
MBS 대표가 왜 지금 날 보자는 거지?
전화를 끊은 김성운 PD가 내게 함께 가자 말한다.
“대표님이 왜 절 부르시죠?”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가보죠.”
잠깐 나갔던 김찬성 변호사도 본인 역시 호출을 받았다면서 다 같이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 *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김명학 CP가 올라갔고 제작사 변경에 관한 이야기가 이뤄졌을 터.
‘그런데 난 왜 부르는 거지?’
김성운 PD야 연출자고 김찬성 변호사는 이지연 작가의 대리인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난 주연도 아닌 조연 여배우의 매니저일 뿐인데.
고민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는지 곁에 있던 김성운 PD가 날 다독였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이참에 워낙 화제가 되는 유진 씨 매니저 얼굴이나 보자는 거겠죠. 이야기는 제가 다 할 테니까 그냥 있으시면 됩니다.”
“예. PD님.”
MBS의 대표이사실 앞으로 가자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들이 서 있다.
유심히 보니 정장 왼쪽 깃에 붙어 있는 화연 그룹의 배지가 보였다.
그렇다면 대표이사실 안에는 장웨이 회장이 있다는 소리였다.
‘미친. 이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우린 험악한 표정의 경호원들을 지나 MBS의 대표이사실로 들어갔다.
똑똑.
“들어들 와.”
문을 열자 MBS의 최상병 대표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장웨이 회장 그리고 붉은달의 이상식 대표가 앉아 있었다.
반대편에는 김명학 CP가 앉아 있었고.
김명학 CP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당혹감.
반면 이상식 대표와 장웨이 회장이 의외로 당당했다.
“다들. 거기 앉지.”
“예. 대표님.”
최상병 대표는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쪽이 요즘 유명한 정 대리겠군.”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님. 굴렁쇠 엔터 정윤호라고 합니다.”
“허허허. 그래그래. 이거 참. 이번 드라마 시작할 때만 해도 좋았는데 후반부에는 유진 씨 때문에 우리가 아주 죽을 쒔어. 좀 살살하지 그랬나?”
최상병 대표도 <파란 하늘> 때문에 자사 드라마의 시청률이 엉망이 되었다며 투정을 부렸다.
지난번 <아침이 간다> 때만 해도 영웅 취급이었는데 요즘 들어 MBS만 오면 왠지 역적이 된 거 같은 분위기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날 부른 이유가 나왔다.
“딴 이유는 아니고 여기 계신 장웨이 회장님께서 유진 씨 드라마에 거액을 투자하려는데 좀 문제가 있다고 들어서 불렀네.”
김명학 CP가 곤란해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중국 판권료를 대가로 제작비가 들어온다면 붉은달을 재무 상황 때문에 배제한다는 게 불가능해지니까.
장웨이 회장이 날 쳐다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최 대표님. 말씀에서 한 가지 빠트리신 게 있는 것 같은데요?”
최상병 대표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라. 그리고 이참에 유진 씨가 주연을 맡는 한 또 한 작품에도 투자를 해주신다는군. 거기도 금액은 200억. 어떤가? 이런 제안은 결코 쉽게 오는 게 아닐세.”
최상병 대표의 들뜬 표정을 이해할 거 같다.
두 편의 드라마 제작 비용으로 무려 400억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진이를 잘 봐주신 건 좋지만 이지연 작가님과의 약속이 더 중요합니다.”
내 말을 예상하지 못했던지 최상병 대표가 열을 낸다.
“아니. 정 대리.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건가?”
최상병 대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어색한 분위기가 방 안을 감쌌다.
그 순간 말없이 있던 김성운 PD가 내 편을 들기 시작했다.
“대표님.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고 하더라도 작가님과 배우가 찬성해야 가능한 거 아닙니까? 이지연 작가님이 배역 변경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김 PD. 이 작가야 내가 설득하면 돼!”
최상병 대표가 언성을 높이자 김성운 PD가 김찬성 변호사를 힐끗 쳐다본다.
김찬성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 제가 여기 오기 전 작가님이 분명히 요구하신 게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면 전 계약 해지를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님.”
김찬성 변호사가 딱딱한 말투로 계약 해지까지 걸고 나섰다.
“아니 이 사람이. 말을 해도······.”
최상병 대표가 당황한 모습을 보인 순간 드라마국을 이끄는 김명학 CP도 나섰다.
“대표님. 이미 한 번 문제가 생겼던 작품입니다. 특히 이 작가님은 지난번에도 저희 쪽에서 사고 친 걸 넘어가 주셨는데 이번에도 또 이랬다가는 진짜 척집니다.”
<아침이 간다> 때도 PD 교체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지난번에는 최준우 교체 사건에 이번에는 배역 교체까지.
더는 이지연 작가를 자극할 수 없다는 김명학 CP의 말에 최상병 대표가 결국엔 두 손을 들었다.
“후우. 알았네. 알았다고!”
최상병 대표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 회장님.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크흠. 그렇습니까? 제가 방송국 사정을 몰라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장웨이 회장이 슬그머니 발을 빼자 꿍하게 있던 최상병 대표가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면 유진 씨한테 맡은 배역이나 열심히 준비해달라고 전해주게나.”
“예. 대표님. 최선을 다해 역할에 임하겠습니다.”
“나가 봐.”
최상병 대표가 실망을 감추지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문을 닫고 나오자 함께 나온 김성운 PD가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른다.
“후아. 무슨 호랑이 간을 씹어 드셨습니까? 난 아직도 우리 대표님 앞에만 서면 다리 후들대는데 진짜 깡 한번 끝내주십니다.”
김성운 PD가 대단하다며 손뼉을 쳐댄다.
“저야 제 배우를 위해서 싫은 말 하고 싫은 소리 듣는 게 직업이잖습니까? 그러니 겁나도 해야죠. 그런데 김 PD님이야말로 괜찮습니까? 김 PD님도 대표님을 들이받으셨잖아요.”
김성운 PD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 그랬나? 그러고 보니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아 망했다······.”
난 김명학 CP님도 우리와 의견을 같이했으니 설마 불똥이 튀겠냐며 농을 걸었다.
둘이서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20분 정도 했을 때 김성운 PD에게 호출이 들어왔다.
“저 찾네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인사를 마친 나는 별관 스튜디오에 녹화 중인 체리블라썸에게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웨이 회장이 경호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다가왔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아직 안 갔나?”
“아. 예. 김성운 PD와 작품에 대한 상의를 좀 하느라고요.”
“후후. 그나저나 자네 참 재미난 친구군.”
장웨이 회장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지연 작가와의 약속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그 많은 돈을 포기할 만큼?”
“물론입니다. 회장님.”
“자네를 개인적으로 챙겨주지 않아 섭섭해서 그런다면 오핼세. 일만 성사되면 팔자를 고쳐줄 수도 있는데도?”
장웨이 회장이 날 향해 씨익 웃는다.
아무리 호색한이라고 하지만 장웨이 회장은 밑바닥에서 화연 미디어 그룹이라는 제국을 일군 자.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데는 도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까 전 내가 한 말이 핑계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 탓에 난 말을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만 유진이는 저희 에이스입니다.”
장웨이 회장이 껄껄대며 웃는다.
“접대 자리에 내보낼 그저 그런 여배우가 아니라 이건가?”
역시나 장웨이 회장이 내 말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탑 여배우가 될 후보들은 회사에서 애지중지 관리한다.
수억 혹은 수십억의 제안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잘 키운 배우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밥 한 끼도 못 하게 한 거로군.”
“논란이 될 여지는 절대 만들지 말자는 주의라서요.”
장웨이 회장이 피식 웃는다.
“자네 회사의 이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던데. 반면 자네는 배우 정유진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군.”
“예.”
“내가 큰 실수를 했군. 이번 일은 잊어 주게나.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젊은 매니저 친구.”
장웨이 회장은 껄껄대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음에 보긴 뭘 또 봐?”
난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주먹 감자를 먹였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상대였으니까.
반질반질한 엘리베이터 문에 화난 내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다.
* * *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 장웨이 회장은 곁에 있던 비서실장인 류신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친구에 대해서 알아봐.”
“정 대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리 봐도 고작 2년 정도 이 업계에 있었다는 놈 같지가 않아. 이번 투자가 파투난 건 다 저 친구 때문이지 않나?”
류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파 볼까요?”
“모조리 다. 이 업계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까지.”
“예. 한국 쪽에 사람을 풀어서 뒤를 캐라고 해보겠습니다.”
장웨이 회장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어렸다.
정유진이란 배우에게 호기심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상대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윤호라는 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MBS의 대표도 자신의 앞에서 설설 기는데 고작 20대의 나이에 자신과 맞먹을 패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의 눈에서 보이던 깊은 눈빛은 도저히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질적인 존재.
상대가 아무리 젊다고 해도 장웨이 회장은 그런 자를 그냥 모른 척 둘 수는 없었다.
언젠가 한국 연예 시장을 다 잡아먹으려고 생각하는 장웨이 회장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