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26)
행정원 샤키라와 헤르미트·
두 사람은 플레이어가 아니었지만 마법을 다루는 것에 능했다·
샤키라는 이태원의 빈민가에 살며 〈용병왕〉 더글라스 김을 비롯해서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외국인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고·
헤르미트는 마인으로 변하고 나서 〈별헤는 마녀〉 송윤서와 여행하며 그녀에게 마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
그래서 두 사람은 집무실과 분리된 한서현의 개인 공간에 펼쳐져 있는 마법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방음 마법인 것 같네요·”
“네 방음 마법이네요·”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거겠죠? 저희에게도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 마법을 펼친 걸 보면····”
“그런가 보네요· 그러니 헤르미트 저희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일이나 하죠·”
“네 그래요·”
한서현이 보좌역으로 발탁한 만큼 두 사람은 그녀가 신용할 수 있고 선을 지킬 줄 알았다·
방음 마법을 펼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들은 무심해지기로 했다·
무심해지기로 했는데····
“····”
두 사람은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나 했다·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는 손가락은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었다·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업무 때문에 그런 거겠죠?”
“그럴 거라고 믿어야죠·”
“하아····”
헤르미트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운을 뗐다·
샤키라는 이번에는 자신의 생각을 살며시 드러냈다·
이내 두 사람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하와 한서현이 방음 마법을 펼쳐 대화를 나눌 때마다 간혹 수상한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이사님과 클랜 로드가 찔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나오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이사님 얼굴이 꽤 붉었던 것 같던데····”
“그때 모르는 척하느라 혼났죠·”
“어쩐지 이사님은 저희 생각을 눈치챈 모양이었지만요·”
“이사님이 눈치가 빠르니까요·”
“그러면서 가끔 실수할 때도 있죠· 그것도 얼마 전이었는데····”
“두 분이 방에서 나온 게 아니라 뜬금없이 집무실 문으로 들어온 걸 말하는 거죠? 그걸로 혹시나 하던 이사님과 클랜 로드 집무실 사이에 비밀의 문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본인들이 입증한 셈이죠·”
“머리 좋은 이사님이 그날 대체 무슨 일을 벌였길래 돌아오는 문을 착각한 걸까요?”
“저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업무를 처리한 거겠죠· 그래서 이사님이 저희한테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면서 한동안 얼굴을 들지 못했었는데···· 그때 이사님이 참 귀엽더라고요·”
“그러게요· 평소에는 똑 부러지고 카리스마도 있어서 잘 몰랐었는데 그런 면모도 있는 줄 몰랐죠· 사실 저희보다 나이도 어리니까 귀엽게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요·”
“저희한테는 상관이라 그런 모습은 보여 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죠· 이사님이랑 10년 동안 같이 일한 저도 그때 처음 봤는걸요·”
“10년이라 어느새 판도라 클랜이 창설된 지 그렇게 됐군요· 시간이 참 빨리 갔네요· 그러면 샤키라는 이사님이랑 그만큼 같이 일하면서 다른 해프닝도 겪어 봤겠군요·”
“남의 일처럼 말할 게 아니에요· 헤르미트도 머지않아 겪게 될지도 모르는걸요?”
“예를 들면요?”
“클랜 로드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 이사님 방에 들어갔더니 방 안이 후덥지근하고 이사님은 덥다면서 손부채를 부치고 있고 다른 손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고 방에서 찜찜한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일을 겪을지도 모르죠· 그때를 대비해서 표정 관리라도 연습해 두세요·”
“···굉장히 구체적이네요·”
“이사님 자리를 정리하는 중에 두 분이 미처 치우지 못한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걸 알아 두고요·”
“다른 클랜에 있었을 때도 어쩌다 몇 번 그런 상황을 겪고는 했었죠· 여기도 다름이 없군요· 하아····”
“여기는 더 심할지도 몰라요·”
“그런가요?”
“클랜 로드 아내분이 몇인데요·”
“···아예 부정할 수는 없네요· 일단 저희는 클랜 로드와 이사님 관계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의 관계는 잘 모르니까요·”
“그쪽 관계는 그쪽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만 알고 있는 비밀인 거겠죠· 아 그리고····”
“또 있나요?”
“이건 저도 아직 겪은 적이 없는데 만약 이사님 얼굴이나 몸에 남은 흔적을 발견할 경우에 대비해····”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것까지 모르는 척을 하라니····”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저희 업무가 고되기는 하네요·”
한번 말문이 터지자 두 사람은 한서현의 행정원으로 일하고 있는 고충을 주고받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었으니 그들끼리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 위로 시선을 마주한 그들은 한숨을 쉬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업무를 보고 있자니 자꾸 신경이 쓰이기만 하니 밖에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할까요?”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기분 전환이 필요할 것 같다·
두 사람은 밖에서 커피라도 마시며 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행정원 전부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한서현은 자신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허락해 줄 것이다·
오히려 반길지도 모를 일이다·
샤키라는 대표로 자리를 비운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집무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노은아 서브 로드?”
“아 샤키라 언니 헤르미트 언니· 은하가 여기 있다고 들어서 왔는데 은하 여기 있어?”
“라라라~·”
존재를 되찾은 이후로 사람들에게 한창 시달리다 최근에야 숨이 트인 노은아가 들어왔다·
라라는 그녀와 같이 있었던 건지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 * *
서로 가볍게 장난을 치고 난 뒤·
한서현은 노은하의 무릎 위에 앉아 그에게 등을 기댔다·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내 남편 의자가 최고구나· 해수 아주버님에게 하나 만들어 달라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내 무릎 위가 그렇게 좋아?”
“사랑하는 사람이랑 이렇게 붙어서 같이 있을 수 있는데 안 좋겠니?”
“분신이라도 불러내서 하루 종일 네 의자나 하라고 할까?”
“차라리 네 분신에게 일을 맡기고 너는 이대로 내 의자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진짜로 그럴까? 나 일하지 말고 이렇게 너만 안고 있을까?”
“농담으로 꺼낸 소리를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 그랬다가는 다른 애들이나 국민들이 나를 아주 대역죄인으로 몰아가려 하겠지·”
은하가 한서현을 처음 만난 지도 어느덧 2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고 그녀와 약혼을 하게 된 지는 10년 결혼한 지는 9년 노유성을 낳은 지 3년이나 흘렀다·
그만큼 두 사람이 교감한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고 깊었다·
한때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었던 그녀가 자연스럽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 시간으로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면 이러고 있을 수 있을 때 만끽하고 있어야겠네·”
그것은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하는 그녀가 답답해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체취와 향수가 심신을 안정시키는 듯했다·
이내 그가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유성이가 어렸을 때부터 클랜원들하고 가깝게 지낸 탓일까? 오늘도 그렇고 요즘 들어서 부쩍 클랜원들 훈련에 관심을 보이네····”
“네 아들이 아니랄까 봐 널 닮아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지· 좋은 일 아니니? 그러지 않더라도 우리 아이들은 평범한 삶을 살기는 힘들 테니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지·”
“···그렇기는 해·”
은하는 안쓰럽다는 어조로 호응했다·
한서현의 말대로 자신의 아이들은 평범한 삶을 구가할 수 없으리라·
판도라 클랜은 국내에서 제일가는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있는 클랜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 클랜의 수장을 맡고 있는 그는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그는 제4기 십이좌 필두이자 언젠가 선녀의 자리에 오를 하백련의 검이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아내들도 지지 않을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서현은 어찌 보면 판도라 클랜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임원이었고 그녀는 시리우스그룹의 직계였다·
정하양은 앨리스그룹의 직계였고 이유정은 루미너스그룹의 직계였다·
마지막으로 류연화는 은하 다음으로 국내에서 최강으로 통하고 있는 〈신창〉이자 제4기 십이좌였다·
그러니 그와 그녀들에게서 태어날 아이들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애들한테는 미안한 일이지····’
아이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은 온갖 기대를 받을 것이며 자신하고 아내들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와 아내들은 아이들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호신술을 가르치기로 했다·
그들이 자라서 나이가 차게 되면 아카데미에 보낼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어 자격증은 따되 플레이어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려는 생각일랑 없었다·
“유성이나 유란이 유린이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은 가능하면 플레이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걸? 어느 부모가 아이들이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것을 기쁘게 반길 수 있겠니·”
플레이어의 세상을 살고 있기에·
은하와 한서현을 비롯한 아내들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위험한 직업인지 알 수 있었다·
명예 권력 높은 소득이 보장되나 그만큼 목숨을 걸어야 했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지만 누구보다 죽음을 가까이에 두는 게 바로 플레이어였다·
부모의 마음으로서는 플레이어보다 더 안전한 직업을 찾기를 바랐다·
더군다나·
“너랑 판도라 클랜의 위상이 높아 아이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도 문제지·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네 의지를 계승하면서 클랜을 물려받겠다는 거니까·”
“맞아 애들한테는 버거울 거야·”
왕관에는 무게가 있는 법이다·
〈심연의 던전〉을 공략한 이후로 이제 이 나라에서 은하는 선녀조차 함부로 대하기 힘든 인물이 되었다·
판도라 클랜의 명성도 드높았다·
만약 아이들이 플레이어가 된다면 그 무게를 감당해야만 할 것이며 평생 은하와 비교당하게 될 터였다·
아이들에게 좋은 미래는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은하의 아내들은 모두 자신의 자식이 〈군주〉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자리를 잇지 않더라도 저마다 물려줄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현명해서 욕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내 앞으로 된 자산도 많이 있고 클랜 지분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여차하면 시리우스그룹의 자회사를 하나 물려받을 수도 있는 거니까· 유성이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어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는데 뭐 하러 네 자리에 욕심을 내겠니?
―나도 그래· 유란이한테 물려줄 재산은 충분히 있는걸? 유정이 너도 그렇지 않아?
―응 아버지랑 오빠가 예전부터 내 이름으로 모아 둔 것들이 있어서 유린이한테 물려주면 될 것 같아·
―알았니? 그러니 아이들 미래는 우리가 잘 챙겨 줄 테니 은하 너는 가장으로서 가만히 군림이나 하렴· 그것만으로 충분해·
역사를 통틀어·
권력자의 아내들은 자신의 자식이 권력자의 모든 것을 이어받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는 일이 많았다·
그들끼리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해도 아이가 생기면 아이의 미래를 위해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은하의 아내들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가장으로서는 자존심이 서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녀들이 은하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 그의 자리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서현이 그녀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신경을 쓰며 조율하고 있기도 했다·
사람의 감정의 색을 읽을 수 있는 그녀의 기프트는 그런 면에서 무척 유용했다고 할 수 있다·
―알겠니? 우리는 운명 공동체야· 그러니 너희가 낳은 애가 아니라고 차별하려 하지 말고 은하의 아이는 모두 자신의 아이라고 여기도록 해· 서로 욕심을 부리지 말도록 하고 서로에게 서운한 일이 생기면 바로 털어놓기로 하자·
한서현의 그런 조율이 있었기에·
그녀와 정하양 이유정 류연화는 서로 사이가 좋았다·
한편으로 그녀는 그들이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여길 수가 있도록 아이들이 그녀들을 부르는 호칭도 정리했다·
둘째 셋째 넷째 엄마처럼 숫자는 아이들과 그녀들에게 서열 의식을 심어 줄 수 있기에 호칭을 친근하게 ‘이름+엄마’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노유성은 별 거부감 없이 한서현 외의 다른 사람들도 편하게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또한 그녀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여하튼·
“애들이 되고 싶은 거라면 모를까 플레이어가 되라고 강제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야·”
“우리 마음도 그래·”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듯 은하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살게 응원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한서현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은하야 서현아 나 은아인데 지금 들어가도 될까?”
“누나?”
방음 마법을 비집고 문밖에서 노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는 그녀의 방문에 의아해하며 시선으로 한서현의 의향을 물었다·
품에 안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대신해서 답했다·
“괜찮아· 들어와 언니·”
한서현의 말을 끝으로·
문이 열리고 노은아가 들어왔다·
그녀를 따라 라라도 날아왔다·
“라라라~·”
“내가 혹시 방해한 것은 아니··· 방해했나 보네· 둘이서 일 안 하고 꽁냥거리고 있었구나?”
“아·”
노은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제야 은하는 한서현을 무릎 위에 앉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누나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니 괜스레 겸연쩍어졌다·
반면 한서현은 태연하게 반응했다·
“매일 잠도 같이 못 자는 남편이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라도 꽁냥꽁냥 해야지· 그리고 의외로 은하 무릎 위가 편해·”
“서현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엔 많이 능글맞아진 것 같아? 이제는 나보다 은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고·”
“은하랑 결혼 생활 한 지도 이제는 10년이나 됐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내 남편은 언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치? 내가 얼마나 좋았으면 설마 흑색던전까지 공략하려고 했겠어·”
“언니도 여기 앉아 볼래? 얘 위가 은근히 편해·”
“오 그럴까? 어렸을 때는 은하가 내 무릎에 앉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은하 무릎 위에 앉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네?”
“그래 그럼 누나도 이리 와·”
은연중 노은아를 띄워 주는 한서현·
은아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책상을 지나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한서현이 자리를 비켜 주려 했다·
은하는 그녀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꼭 붙들어 맸다·
“응?”
“내가 두 사람 때문에 힘들겠어? 그냥 거기 있어·”
“····”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한서현·
그녀는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인지 눈웃음을 보냈다·
한편 은하는 은아에게 보이도록 왼쪽 무릎을 두드렸다·
“자 누나도 앉아·”
“그럼 실례할게! 아! 동생 다리라 뭔가 다르기는 하네! 흔들림도 없고 적당히 푹신푹신해서 좋은데?”
“라라라♪”
라라가 은하의 머리에 자리 잡고 은아가 풀썩 왼쪽 무릎에 앉는다·
그대로 은하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그녀는 쾌활한 어조로 떠들었다·
은하는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팔로 그녀들의 허리를 감쌌다·
자연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러고 있으니 좋네· 누나가 정말 살아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돼·’
은아가 〈기적〉의 기프트의 대가로 존재를 잃고서 세상에서 사라진 지 몇 개월이었다·
그동안 은하와 판도라 클랜원들이 느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노은아가 존재를 되찾은 지 다소 시간이 흘렀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은하의 마음속에는 노은아를 잃은 상실감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눈앞에 그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게 안심이 됐다·
다시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네 명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어도 여전히 누나 여동생 바보인 은하는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누나 무슨 일로 서현이를 찾아온 거야?”
“나? 서현이를 찾아온 것도 맞지만 은하 널 찾으러 온 거기도 해·”
노은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은하의 눈을 올려다보는 노은아의 갈색 눈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엄마 아빠도 있지만 제일 먼저 은하 너한테 건네주고 싶었거든·”
“뭘?”
“뭐냐면···· 자 받아·”
“이게 뭔데 그래?”
“자 서현이도 받아·”
“아 나온 거구나· 축하해 언니·”
마치 깜짝 놀라게 하려는 것처럼·
노은아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넸다·
하얀 배경에 금색 테두리가 있는 편지 봉투였다·
봉투의 질감이 무척 고급스러웠다·
은하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
“뜯어 봐 은하야·”
명랑한 얼굴을 한 노은아를 두고 은하는 편지 봉투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건 혹시····’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간절히 아니기만을 소원했다·
마음 같아서는 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봉투를 뜯길 바라는 노은아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투둑·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은하는 편지 봉투를 뜯고 안에 든 편지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 저희 두 사람은 행복이라는 하나의 길을 걸어가고자 언약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진실로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모쪼록 저희의 결실을 축복하러 귀한 걸음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신랑 한창진
신부 노은아
결혼식 청첩장이었다·
보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은하는 한창진을 죽이고 싶었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