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24)
서울의 중심 중구 남산타워·
최상층은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간단한 보수 작업만 이루어졌을 뿐 곳곳에 전투가 벌어진 흔적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을 신인류라고 자처하며 전국 각지에서 테러를 도모하였던 칠마들의 수장 아마겟돈·
그 마인과 노은하를 중심으로 한 플레이어들이 국가의 명운을 내걸고 전투를 벌인 흔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나라 사람들에게 남산타워 최상층은 기념비적인 장소로 여겨지고 있었다·
“선녀님 이제 시간입니다·”
“네 그럼 시작해 볼까요·”
2대 선녀 하백련·
새하얀 머리칼을 두 갈래로 묶고 티아라처럼 보이는 장신구를 착용한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처음 선녀로 취임했을 때와 달리 국가의 수장에 걸맞은 위엄을 갖춘 그녀가 차분히 눈을 떴다·
“〈별헤는 마녀〉 님이 말한 것처럼 오늘 밤은 유독 예쁘네요·”
머리 위에 달이 떠 있었다·
간간이 별빛이 보였다·
하백련은 그 아래를 걸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바람이 부는 최상층에 퍼져 나갔다·
휘이잉·
초대 선녀 임가을을 상징하는 색이 붉은색이었다면 하백련의 경우에는 푸른색이었다·
그녀가 입은 푸른 드레스 자락이 밤바람에 휘날렸다·
“····”
선녀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어딘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선녀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를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최상층 중심부에 섰다·
“호법은 우리가 서고 있을 테니까 백련이 너는 걱정하지 말고 마법에 집중하도록 해·”
노란 머리 초록 눈·
키가 2m는 되어 보일 법한 남자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판도라 클랜의 서브 로드인 동시에 하백련의 호위사를 겸임하고 있는 〈언브레이커블〉 노 어베니어였다·
“맞아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선녀님을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한편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여성의 머리칼은 보랏빛을 띠었고 눈은 몬스터를 연상케 하듯 붉었다·
이마에는 기다란 뿔이 하나 돋아나 있기도 했다·
마인 헤르미트·
그녀는 판도라 클랜의 행정원으로 비공식적으로 한가락 하는 실력을 지닌 강자로 통하고 있었다·
“어베니어 오빠도 헤르미트 언니도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자신의 목숨을 더 소중히 해 주세요· 저도 이제는 옛날처럼 약하지 않고 제 한 몸 지킬 힘은 있으니까요·”
두 사람을 마주한 하백련은 그동안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 사람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도 그녀의 마음을 알았기에 미소를 지으며 답해 주었다·
“그럼 호법은 부탁드릴게요·”
“그래! 놈들이 올 테면 와 보라지! 은하 형이 오기 전에 내가 놈들을 싹 날려 버릴 테니까·”
“그때는 저도 가세할게요· 둘이서 힘을 합친다면 부담도 덜하겠죠·”
“고마워요· 오빠 언니·”
어베니어와 헤르미트가 몸을 풀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백련은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체내 마나를 발현하는 그들을 본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숨을 내뱉는다·
하백련의 몸속에 잠든 체내 마나가 푸른 기운을 발하며 피어올랐다·
그녀는 그 기운을 멀리 퍼뜨리면서 의식을 집중해 세상에 고했다·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한마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백련이 내뱉은 말이 세상에 퍼져 대기 마나를 진동하게 했다·
20년이 넘도록 선녀로서 쌓아 온 그녀의 신화가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기운이 서울 전역을 감싸며 일종의 코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긍정한다·
빛을 발하는 반구형의 장막·
그 장막 아래 중심에 선 하백련은 자신의 기프트 〈백은〉으로 모든 걸 부정했다·
또한 부정하지 않은 걸 긍정했다·
〈신화 현현: 영광의 낙원〉
하백련의 신화는 그런 것이다·
이 나라에서 특히 서울에서·
그녀는 말 한마디로 존재의 성질을 규정하는 힘을 지닌다·
극단적으로는 말 한마디로 존재를 죽일 수 있고 되살릴 수도 있다·
이 나라에서 이 나라에 뿌리를 둔 존재에게 그녀의 말은 절대적이다·
이는 존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긍정한다·
세상의 섭리에도 간섭할 수 있다·
하백련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신화로 규정하였다면 그 일은 거의 높은 확률로 이루어지게 된다·
성공 확률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계획의 첫 단추로서 신화를 전개한 것이다·
“그럼 나머지는 맡길게요· 잘해요 유빈이 아빠·”
자신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났다·
하백련은 저 멀리 세상을 내다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이 나라에서 기인한 신화는 그녀의 신화 속에서 어떤 대가 없이 현현될 수 있다·
그녀의 신화가 현현을 긍정하고 대가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녀가 신화를 현현한 후로 한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 강대국 중 하나로 거듭난 이유였다·
* * *
하백련이 신화를 현현했다·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하얀 장막이 서울 전역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 말은 이 나라 어딘가에 있을 혹은 다른 나라에 있을 재앙들 또한 눈치챘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놈들은 하백련의 신화 속으로 섣불리 발을 들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대비는 해야 했다·
놈들은 예측 불허의 존재였으니까·
“우리도 신화를 현현한다·”
판도라 클랜원들과 플레이어들은 마법의 매개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서울 각지로 흩어져 있었다·
〈신창〉 류연화는 각지에 흩어진 판도라 클랜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신화를 현현했다·
〈신화 현현: 동빙한설〉
하백련의 신화 아래에서·
이 땅에서 기인하는 모든 신화는 보다 높은 실현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힘을 보태 줘야 해·”
한편 그녀의 신화는 강력한 만큼 상당한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그녀가 부담하는 대가를 분담해 줄 필요가 있었다·
주변 일대를 눈 세상으로 만들고 푸르른 머리칼을 휘날리는 류연화·
하얀 도복을 입은 그녀는 신화를 하백련의 신화에 연결했다·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너랑 같이 싸우겠네·”
“놈들이 방해하러 온다면 말이지· 아마도 높을 확률로 방해하러 오겠다만· 준비는 됐냐?”
“그러는 너는?”
북부 개척에서 제일선에 서 있는 판도라 클랜 의정부 회관의 서브 로드 〈검선〉 최은혁·
그리고 판도라 클랜 동작구 회관의 서브 로드 〈절검〉 목민호·
두 사람이 신화를 현현했다·
“민호도 참···· 오랜만에 은혁이랑 같이 싸우게 됐다고 아닌 척하면서 좋아하고 있네·”
차은우는 그런 그들의 등을 보며 가볍게 키득거렸다·
이내 그녀도 신화를 현현함으로써 하백련의 신화에 보탰다·
“메리한테서 지금 텔레파시 왔다! 작전 개시!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해!”
“그러는 오빠만 잘 잡으면 되거든? 메리는 대체 저 오빠가 뭐가 좋아서 결혼하고 애까지 낳았는지 몰라···· 그냥 솔로로 살면 될 것을····”
다른 곳에서는 진파랑이 촐랑댔다·
십이좌에 걸맞은 위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은하신교 이단심문관을 대표하며 한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녀 〈론리 퀸〉 배수빈은 칠칠찮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어머 그것도 다 매력이지· 메리가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닐까?”
“아니야 나도 수빈이 말에 찬성· 그건 메리가 워낙 착해서 그렇고 파랑 오빠밖에 사귀어 보지 않아서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는 민지 너는 사귀어 봤어?”
“시형아 그 입 좀 닥쳐 줄래?”
“들리는 소문으로는 네가 비밀리에 이단심문관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응 그냥 오늘 나한테 죽자· 이게 나이만 먹고 깐죽거림만 늘었어!”
한쪽에서는 강시형 김민지가 연신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강시형은 서울 전역을 비행하고 있는 드론을 운영하는 데 흐트러짐이 없었다·
20년이 지나고서도 그의 체구는 가디언으로 활동하기 부적합했지만 온갖 장비와 특히 드론이 더해지며 부족한 능력을 만회하고도 남았다·
“자기들 그래도 이제 조용하자·”
“흥!”
그때 봉구래가 두 사람을 말렸다·
두 사람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더는 싸우지 않았다·
이내 진파랑 배수빈의 뒤를 이어 봉구래 강시형도 신화를 현현했다·
김민지는····
“아무튼 너희만 믿고 있을게· 나는 뒤에서 밥이나 짓고 있지 뭐·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편히 말해 줘· 웬만한 건 다 만들 수 있거든·”
“····”
판도라 클랜원들은 너무나 착해서 20년이 넘도록 그녀의 이 자부심을 지켜 주고 있었다·
판도라 클랜에 입단하는 신입들은 암암리에 그녀의 요리 실력에 대한 평가는 피하란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리에 있는 클랜원들은 그녀의 말에 답하는 것을 피하며 하는 일에 열중하는 척했다·
“···그냥 시켜 먹으면 안 될까?”
그나마 강시형은 눈치를 보면서도 조심스럽게 할 말은 했다·
한편 다른 곳에서도 클랜원들이 신화를 현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신화를 현현하지 못하지만 뒤에서 착실히 보조해 줄게! 유남훈! 죽으면 나한테 죽어!”
“···우비야 이미 죽는 그 시점에서 끝나는 거 아닐까?”
“그러니 죽지 말란 소리지 바보야! 나 과부로 만들기만 해 봐 아주····”
〈만독불침〉 유남훈·
그는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여우비의 시선을 느끼며 양어깨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무엇보다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는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과연 그놈들이 우리한테 올까요?”
“나는 놈들이 오지 않고 무사히 마법이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아마 오겠지· 우리가 무슨 짓을 벌이려 하는지 마법의 술식을 읽고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사일런트〉 유수진의 뒤를 잇는 십이좌 〈실버 불릿〉 손가연·
그녀가 목에 건 마스크를 착용하며 스나이퍼로서의 의식을 일깨웠다·
지휘봉을 꼭 쥔 〈녹턴〉 조아라는 결전에 임하듯 심호흡을 했다·
〈신궁〉 호시미야 카에데는 노련한 시선으로 앞으로 전장이 될 수 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화 현현〉
이윽고 세 사람도 신화를 꺼냈다·
* * *
계획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하백련이 노유성을 과거로 보내는 마법이 발동할 기반을 만들어 주고 판도라 클랜원들이 그녀가 져야 할 부담을 덜어 주고 최악을 고려해서 재앙들의 습격에 대비한다면····
“이제 저희 차례겠네요·”
중구 판도라 클랜회관·
회관 앞에 모인 사람들의 역할은 마법을 발동하는 것이었다·
〈신화 현현: 리라이프〉
한국에서 하백련의 신화와 동등한 어쩌면 그보다도 격이 높은 신화가 세상을 장악했다·
〈시간의 마녀〉 프리시스 메모리는 노은하의 신화가 하백련의 신화와 어우러지는 것을 관찰하며 말했다·
“다들 준비는 됐나요?”
“····”
그녀의 주위에는 신서영 노은아 이리야 이유정의 딸 노유린 노유은 외 클랜원 몇몇이 모여 있었다·
모두 〈기적〉의 기프트를 보유한 사람들이었다·
“영광의 낙원과 리라이프· 두 개의 신화의 비호를 받는 한 〈기적〉은 저희에게서 많은 대가를 받아 가지 못할 거예요· 치러야 하는 대가도 저희끼리 분담하면 더 줄어들겠죠· 그러니 다들 마법에 집중하세요·”
윤곽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고깔모자를 쓴 프리시스 메모리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이 세상의 시간선을 멈추는 일은 제가 담당할게요· 그러니 여러분은 이 세상과 과거의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 주세요·”
몇백 년의 시간을 산 어떻게 보면 시간의 섭리에서 거의 벗어난 마녀·
그렇기에 세상의 시간에 간섭하는 역할은 그녀에게만 가능했다·
클랜원들은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이론은 완벽해· 그러니 우리들은 마법이 성공할 거라고 믿도록 하자· 괜히 세계 의지가 소원을 곡해해서 이루어 주는 일이 없도록·”
판도라 클랜의 마법 고문 〈여제〉 신서영이 클랜원들을 독려했다·
현세대의 살아 있는 신화로 통하는 그녀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미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백련이랑 은하의 신화가 있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마법은 마음가짐이 중요한 법이니까요· 자! 그러니 지금부터 좋은 생각만 하자! 잘될 거라고 믿는 거야!”
새로이 십이좌가 개편된 이후로는 십이좌 자리에서 물러난 노은아가 분위기를 띄웠다·
그녀의 명랑함 덕분에 이번 일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던 노유린의 얼굴이 풀어졌다·
“네 좋은 생각만 할게요 큰고모·”
“유린이 많이 긴장되는구나? 내가 마법의 주문이라도 알려 줄까?”
“어떤 주문인데요?”
“음····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나도 좀 창피하니까···· 그냥 마음속으로 은하 얼굴을 떠올려 봐·”
“아버지 얼굴을요?”
“응 혹시나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은하가 알아서 다 해결해 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
“네 아버지라면 그럴 것 같아요·”
“그렇지?”
노은아의 조언에·
노유린은 키득 웃음을 흘렸다·
한쪽에서는 이리야 노유은 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은 알겠어요? 만에 하나라도 세계 의지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도 다른 말은 하지 말도록 해요·”
“네 네 알고 있어요· 아주 작은 꼬투리에도 세계 의지가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당신이 그러지는 않겠지만 절대로 겁을 먹지 마세요· 당신이 세계 의지에 겁을 먹는 순간····”
“은하신교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는 제가 세계 의지에 겁을 먹는다면 아버지의 신화의 격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인 거죠? 알고 있어요·”
뾰족한 귀와 녹색 눈이 인상적인 이리야가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다·
꼭 훈계하는 어조 같기도 했다·
노유은은 자신감에 찬 얼굴을 하고 제 가슴을 부풀렸다·
“그럼 다들 위치로 이동할게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시스 메모리의 지시를 받아 그들은 지정된 자리로 이동했다·
그들이 기프트를 발동했다·
〈기프트: 기적〉
빛의 기둥이 곳곳에서 솟구쳤다·
빛은 널리 퍼져 하나로 합쳐지고 주변 일대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힘을 원하는가·
세계 의지가 그들에게 접촉했다·
그들이 하나의 소원을 빌었다·
“은아야 무사해야 해·”
참고로 한창진은 호법을 섰다·
* * *
사람들의 계획은 성공했다·
지금 그 결실이 노유성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
형형색색으로 빛을 내뿜고 있는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문·
노유성은 본능적으로 과거로 가는 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문을 지나게 되면····’
자신은 과거로 가게 된다·
노유성은 두려운 마음을 떨쳐 내며 마음을 추슬렀다·
“유성아·”
그때 한서현이 그를 불렀다·
이제는 노유성보다 키가 작은 그녀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그대로 품에 안기며 나직이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그래 몸조심하렴· 과거의 나한테 꼭 의지하도록 하고· 과거의 나라면 네 말을 믿어 줄 거야·”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혹시 과거의 어머니한테 전할 말이라도 있으면 말해 주세요· 제가 잘 전달할게요·”
노유성이 포옹을 마치고 물러나며 한서현에게 말했다·
이에 그녀가 시니컬하게 답했다·
“그러면 과거의 나한테 전해 주렴· 남편 아랫도리 간수 좀 잘하라고·”
“····”
그 말에·
노유성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의 시선을 통해서 감정을 읽은 한서현은 피식 웃었다·
농담이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그건 지금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인생을 부정하는 꼴인데 그럴 수는 없지· 그러니 대신 이렇게 전해 주렴·”
“뭐라고요?”
“둘이서 즐길 수 있을 때 원 없이 즐기라고 말이야· 그렇게만 말해도 과거의 나는 그 말을 대충 이해하고 은하를 잡아먹으려고 들겠지·”
“아하하····”
“그리고 유성아·”
“네 어머니·”
“과거로 돌아가서 해야만 할 일을 자료로 넘겨주기도 했지만 동생들 잘 태어나게 해야 해·”
“····”
“너랑 네 동생들의 존재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고 있으니까· 혹시나 한 명이라도 태어나지 않으면····”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이 파생되고 이 세상이 떨어져 나갈 거란 거죠? 저는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고요·”
“그래 그러니 명심하렴·”
“네 어머니·”
노유성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내 그는 한서현의 뒤편에 서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노은하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나? 음····”
판도라 클랜 로드 〈군주〉 노은하·
노유성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장난기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과거의 나한테 전해 줘·”
“뭐라고요?”
“이제 그만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미친놈아· 네 생각보다 이 삶도 썩 나쁘지 않으니까·”
“얼씨구· 지금 그게 내 앞에서 할 소리니? 좋니? 좋아?”
“서현이 너 만나서 당연히 좋지· 그리고 다른 애들도·”
“혼날래?”
노은하가 쓴웃음을 짓고 한서현이 흘겨본다·
노유성은 이후에 그녀에게 바가지를 긁힐 그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며 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그럼 다녀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