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1화
별의 그늘(7)
쿤다라로 향하기 위해서는 천체술식을 사용해 장막을 비틀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예하술주는 장막을 직접 ‘베어’ 이면의 시공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냈다·
“이건····”
쩌저적···!!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장막 위로 새겨진 날카로운 자상·
속이 비추는 투명한 커튼을 베었더니 그 안에서 전혀 다른 풍경이 튀어나온 듯하다·
말 그대로 장막의 이면을 베어 그 안에 숨겨진 시공간을 내보이는 것·
본래 이론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수차원을 현실에 강제로 끌어낸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휘오오오!!!
짙은 안개가 펼쳐진 장엄한 산맥· 험준한 산이 굽이지며 펼쳐져 있다·
계곡에서 들려오는 폭포소리· 연못 주변에서 연꽃잎이 부딪히는 속삭임·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겹쳐 울리면서 고요한 산맥을 조용히 두들겼다·
균열 너머로 비춰지는 장막 내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의 정체·
“이쪽입니다 반 님·”
어느새 균열 안으로 들어선 예하술주가 안개의 길 끝에 서서 레녹을 돌아보고 있었다·
“서두르지요· 이면의 시공을 넘어 쿤다라에 도착하려면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장막을 비트는 대신 직접 베어서 이면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군·”
후욱!!
예하술주를 따라 안개가 자욱한 길에 내려선 레녹이 물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쿤다라에 도착할 수 있는 건가?”
레녹이 천체술식을 지녔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먼저 장막의 이면을 열어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맹주 측에서 레녹을 의심하고 있다는 정황 역시 확실한 상황·
예하술주 측에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천체술식에 관해 맹주와는 견해가 다른 것인지·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레녹이 신중을 기하던 찰나·
“약간의 편법을 사용해서 골치 아픈 문제를 회피한 것에 가깝지요·”
예하술주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무슨 편법을 말하는 거지?”
“외겁도시의 장생종은 자신들의 도시를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숨겨두었습니다·”
레녹의 말에 예하술주가 대답했다·
“별의 그늘 뒤에 숨었기에 특정한 공전주기를 맞추지 않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쿤다라에 도달할 수 없지요·”
“····”
“하지만 쿤다라가 위치한 장막의 이면 너머에 진입하는 것 정도라면 제 술식을 사용해 가능하거든요·”
예하술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이번 일에서 반 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나선 이유였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길을 잃은 채로 장막의 이면에 도착한 셈이구나·”
후욱!!
레녹의 뒤를 따라 장엄한 도원향으로 진입한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쿤다라가 아니라 도시가 숨겨진 장막의 이면이라는 ‘공간’에 도착하는 것을 우선한 게냐·”
“과연 이해가 빠르시군요·”
예하술주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면의 시공 어딘가에 쿤다라가 숨겨져 있고 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안내를 맡은 것은 바로 그 부분에 대해서지요·”
“····”
“지금부터 저를 따라오시죠·”
술주가 등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창백한 안색의 시귀술주가 떨어졌다·
장막의 균열이 닫히는 것을 보자 시귀술주 역시 황급히 이면의 시공 안으로 들어온 것일까·
쿵!
“어 어라····”
비틀거리면서 내려선 시귀술주가 멍한 표정으로 레녹을 올려다보았다·
“새 생각해 보니까 그냥 호 혼자 도망치면 됐나····”
“····”
“반쯤 죽어 있는 송장 주제에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레녹이 시귀술주를 무시한 것과는 반대로 올리비에라가 흥미로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베일 너머로 그녀의 마안이 번뜩였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면서 생사의 경계선에서 자신의 목숨을 농락하고 있느냐·”
“네 네···?”
“근원심상은 그렇다 쳐도 고유술식을 그리 다룰 수 있는 술사는 흔치 않지····”
올리비에라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유리정원의 관조자가 재미있는 도구를 손에 넣었군·”
“아 아니··· 저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시귀술주가 겁먹은 표정으로 올리비에라를 지나쳐 예하술주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그런 시귀술주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움직이자꾸나· 이 곳에서 길을 잃었다가는 방향을 잡기 어려울 터이니·”
“····”
개성적이다 못해 멋대로 구는 이들이 여럿 모이니 언제 어디로 튈지 짐작이 가지를 않는다·
한숨을 내쉰 레녹이 안개 속에서 앞서 걷는 올리비에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휘오오오!!
걸으면 걸을수록 안개가 자욱해져서 한 치 앞도 알아보기 어렵다·
먼저 안개 속으로 사라진 예하술주의 모습은 진작 보이지도 않는 상황·
레녹의 마력감지를 사용해도 주변의 지형지물이 명확하게 잡히지가 않는다·
주변의 환경 자체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재구성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
옆에서 걷고 있는 올리비에라의 모습만이 시선에 들어오는 전부·
시귀술주를 비롯해 다른 모든 것이 희뿌옇게 흐려진 채 사라지고 있다·
레녹의 정신을 침범당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 자체가 실제로 흐려져 무너지고 있는 것·
“안개가 지나치게 자욱해 한 치 앞도 내다보기가 어렵구나·”
옆에서 걷고 있던 올리비에라가 묘한 목소리로 레녹에게 물었다·
“놈이 걸어간 방향을 따라가는 것도 한계가 있군· 그렇지 않느냐?”
“···아니·”
순간 올리비에라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낀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건 단순히 안개가 자욱한 정도가 아니라····”
[견뢰· 대답하지 말고 들어라·]
올리비에라가 마력을 진동시켜서 전성을 흘렸다·
[예하술주가 방금 사라졌다· 앞에서 간간이 보이던 모습마저 완전히 소멸했군·]
“····”
[아마 어딘가에서 우리를 몰래 지켜보고 있겠지·]
마안을 통해 안개 속에서 예하술주를 주시하면서도 입으로는 보지 못한 척 거짓말을 한 것인가·
올리비에라가 그를 통해 예하술주의 행동을 유도했음을 깨달은 레녹이 시선을 깊게 가라앉혔다·
팔짱을 낀 올리비에라가 웃음기 어린 전성으로 말했다·
[이면의 시공에 펼쳐진 안개를 이용하고 있구나· 역시 놈은 처음부터 우리를 외겁도시로 데려갈 생각이 없던 게다·]
“····”
역시 예하술주는 레녹을 안내하는 것보다 천체술식을 확인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다·
장막을 베어 이면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술주 본인에게 편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지·
시귀술주의 기척마저 잡히지 않는 것은 예하술주가 그 기척마저도 같이 끌고 거리를 벌렸기 때문일까·
[이 공간에서 방향을 잡고 길을 찾으려면 천체술식을 사용해 장막을 다시 한번 비틀어야겠지·]
올리비에라가 베일 너머로 레녹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술주 놈이 노리는 것 역시 그것일 가능성이 높다·]
“····”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놈을 직접 잡아 그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지만····]
레녹을 향해 속삭이는 올리비에라의 전성이 한없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번 여정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네놈이 되어야 하니 직접 결정하거라·]
예하술주의 의도를 대번에 눈치챘으면서도 판단 자체는 이쪽에게 맡기겠다는 올리비에라의 설명·
술주가 이면의 시공을 이용해 부린 수작보다 올리비에라의 유능함이 돋보이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하지만 레녹은 그러한 올리비에라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품 안에서 작은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어두운 보석이 박힌 닉스의 휘장이 작동한 찰나 두 사람을 중심으로 무형의 막이 펼쳐지고·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있지·”
레녹이 올리비에라를 향해 시선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다만 우리 둘 모두 어느 정도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거다·”
[···네놈·]
올리비에라가 기가 찬 듯이 닉스의 휘장을 바라보다 말했다·
[착용자의 기척을 감추는 유물이군· 그런 물건을 이제서야 꺼내 드는 것이냐·]
“설명한 대로라면 예하술주는 지금 이 안개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지·”
레녹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자면 지금 우리를 볼 수 있는 것이 꼭 예하술주 하나만은 아니라는 것 아닌가?”
[그건····]
“이쪽에서 이목을 끈다면 장생종 중 몇몇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겠지·”
[예하술주가 아니라 쿤다라의 장생종을 직접 불러낼 심산이더냐·]
레녹의 말을 이해한 올리비에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말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구나· 저쪽에서 우리를 침입자로 규정하고 척살하려 들 수도 있거늘·]
“우리는 지금 예하술주뿐만 아니라 주문연맹주와 직접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싸늘한 시선으로 안개 저편을 응시하며 레녹이 말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중요한 건 예하술주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겠지·”
[····]
“만에 하나 예하술주의 앞에서 천체술식을 사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건 반드시 이쪽에서 주도한 상황 아래서 이뤄져야 한다·”
예하술주는 레녹을 쿤다라로 안내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레녹의 천체술식을 직접 확인하려 한다·
레녹이 해야 할 일은 맹주의 의심이 피하면서 술주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쿤다라에 진입하는 것·
시작부터 수작을 걸어올 줄은 몰랐지만 외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천체술식을 꺼내들 수는 없다·
[네놈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구나·]
혀를 찬 올리비에라가 물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쿤다라의 장생종을 어떤 방식으로 부를 심산이더냐?]
“생각나는 방법은 대략 다섯 가지 정도가 있기는 한데····”
[···다섯 가지?]
“일단 그중에서 가장 행운에 기대야 하는 방법부터 실험해 볼 생각이다·”
기겁하는 올리비에라를 두고 레녹이 품 안에 손을 뻗었다·
“예하술주가 가장 예상할 수 없으면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법한 수단이 하나 있거든·”
이번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소지하고 있던 아티팩트를 모두 점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생종들의 도시로 향하는 여정에서 레녹 역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을 정립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리고 지금처럼 방해가 없는 상황이라면 한 번쯤 운에 기대 시도해 볼 법한 수단이 있었다·
찰칵!!
레녹의 손에 들린 주먹만 한 크기의 새카만 큐브·
다방면으로 구성된 입방체가 큐브 안쪽에서 꽃이 피어나듯 계속해서 솟아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3차원의 시공간에서 홀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듯한 기묘한 형상·
[환술의 일종인가 했더니 애초에 형상과 구조가 고정되지 않는 물질이구나·]
물끄러미 큐브를 바라보던 올리비에라가 물었다·
[그게 무엇이지?]
“펜터렉트라고 한다·”
큐브를 움켜쥔 레녹이 대답했다·
“5차원의 도형을 현실에 구현한 유물인데 마력을 주입하면 무작위로 다른 공간축의 결과물을 재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오래전에 명이 레녹에게 선물해 준 적이 있던 구세계의 유물 펜터렉트(Penteract)·
마력을 주입한 순간 무작위로 변형되어 다른 공간축의 물질을 재현한다·
[지금 이 시공간과 무관한 물질을 무작위로 투영해 재현하는 유물인가· 재미있군·]
레녹의 적당한 설명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올리비에라가 흥미로운 기색으로 눈을 빛냈다·
[경험에 의하면 이런 능력을 지닌 유물들은 보통 정말로 ‘무작위’로 작동하지는 않았었지· 네놈 역시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게냐·]
올리비에라의 말이 틀리지 않다·
레녹이 펜터렉트를 몇번 사용해 본 결과 정말로 지금 상황과 완전히 무관한 물건이 튀어나오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
귀도교단 극동지부에서 펜터렉트를 사용했을 당시 레녹은 교단의 사도로 위장하는 데 필요한 알리바이를 손에 넣은 적이 있었다·
덕분에 사도 선정 의식을 마주하기 전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극동지부에 잠입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으니·
운이 좋다면 펜터렉트의 존재가 예하술주의 예상을 벗어난 변수가 되어주지 않을까·
[흥미롭긴 하지만 네놈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로구나·]
올리비에라 역시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도포를 흩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은 변수를 만드는 것에는 능해도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굳이 먼저 끌어들이는 편은 아니었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군·”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펜터렉트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 유물을 내게 준 사람은 그런 불확실성조차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니까·”
[····]
펜터렉트를 강하게 움켜쥔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몇 번이라도 직접 확인해 볼 용의가 있다·”
[네놈····]
레녹이 이렇게 신뢰를 보내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라도 한 것일까·
올리비에라가 묘한 음색으로 레녹을 부른 찰나 레녹은 손에 쥐고 있던 펜터렉트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카르르르륵!!!
순간 손에 들린 입방체가 격렬하게 회전하면서 전혀 다른 형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저울과 명찰 펜과 깃대· 큐브와는 무관한 형상을 휙휙 오가며 손 밖으로 튀어나갈 듯이 요동쳤다·
레녹이 그 움직임을 거부하지 않고 펜터렉트를 발아래 내던진 그 순간·
퍼어어엉!!!
안개보다 더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레녹의 눈앞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서 크기를 키워가면서 레녹의 앞에 솟아오르는 큼지막한 제단의 형상·
“이건···?”
[····]
극도로 정교한 칠망성(七芒星)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넓은 제단의 모습·
칠망성 안에는 새카만 기운이 실핏줄처럼 얽힌 채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제단의 형상에 레녹이 얼굴을 굳혔다·
“이게 뭐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불길하다 못해 섬뜩한 사기가 느껴지는 징그러운 제단의 형상·
펜터렉트를 사용할 때부터 운에 기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괴작을 기대한 건 아니다·
올리비에라가 실소를 흘리면서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는 아니로구나· 네놈 역시 원체 홍복을 타고난 마법사는 아니었을 터·]
“····”
[필요할 때만 운에 기대려는 마법사에게 찾아온 업보라고 생각하면 응당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군·”
올리비에라의 신랄한 말에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운이 없는 수준을 넘어 극도로 운이 나쁘면 이런 저주받은 물건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지금 상황과 관련 있는 물건이 튀어나온다던 가정 자체가 틀린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일단 치우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살짝 풀이 죽은 레녹이 손을 들어서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제단을 부수려던 그 순간·
=이런·
거대한 칠망성 안쪽에서 기름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모습이 본의 아니게 그대에게 실망을 안겨준 모양이군요·
“···!!”
퍼억!!
칠망성 안에서 검붉은 손이 튀어나와 레녹의 눈앞에 솟구쳤다·
제단 위에서 튀어나온 손이 허공을 느릿하게 휘젓다 레녹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해 부탁드립니다· 지켜보는 도중에 저도 참을 수가 없어져서 그만·
쩌적 쩌적···!!!
전신이 검붉은 피부로 뒤덮인 손이 제단 위에서 느릿하게 흔들린다·
일곱 개의 손가락을 가진 그것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작은 불가사리처럼 보였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죠?
“···누구지?”
레녹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물었다·
“펜터렉트가 변화한 존재인 건가? 아니 유물이 지성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반응하지 않았을 리가-”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유물은 단지 저를 부르기 위한 제단으로 잠시 화한 것뿐이죠·
능숙하게 손을 비빈 ‘무언가’가 씩 웃었다·
=굉장히 재밌는 물건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덕분에 저도 이렇게 그대와 대화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
검붉은 손 한 짝만을 내놓은 채 그에 달린 눈과 입으로 대화를 걸어오는 괴물·
펜터렉트를 통해 튀어나온 것부터 황당하지만 그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묘한 기운을 품은 존재·
기운 자체는 어딘가 낯이 익지만 레녹조차 그 계통이나 근원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생소한 무언가다·
=거래를 하죠·
불가사리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근처에 제가 아는 장생종이 하나 있습니다· 그자라면 그대를 외겁도시에 들여보낼 수 있겠죠·
“····”
=제가 그대를 그 자에게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갑자기 나타나 수상하기 그지없는 말만 지껄이는군·”
레녹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원하는 거지?”
=이해합니다· 그대는 저를 처음 보겠지만 저는 그대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니까요·
괴물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제 계약자들이 이렇게 단기간에 많이 죽어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어떻게든 알 수밖에 없더군요·
“···계약이라고?”
단기간에 대량으로 사망한 계약자들· 그것도 레녹과 깊게 얽혀 있는 누군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레녹은 상대가 무엇인지 깨닫고 입매를 굳혔다·
제단 위에서 느껴지던 추악하다 못해 징그럽게 느껴지는 기시감이 강한 기척·
서부전선에서 상대한 마물들을 수만 배 압축해 놓은 듯한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했기 때문·
[설마····]
올리비에라 역시 그 말 한마디로 정체를 직감한 듯 마안을 찌푸리고·
레녹이 황당한 기색으로 제단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헤드로 군벌을 타락시킨 장본인이 지금 여기 직접 와 있는 거였나?”
헤드로 군벌 전체를 마물로 변질시킨 금지된 의식의 주인
상대가 헤드로 군벌 전체를 타락시킨 흑막이자 머리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검붉은 괴물이 우아하게 레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그 경이로울 정도로 뛰어난 살인 솜씨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사업 하나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