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44. 체리블라썸에게도 봄날이 2
용평 H 리조트의 임시 대기실에 뒤늦게 들어오는 가수들은 하나같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다들 폭설로 인한 지각 때문에 마음도 급한데 생소한 장소인 탓에 자신들의 대기실이 어딘지도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가장 먼저 온 우리는 동선을 다 파악한 후라 편안히 리허설 무대를 진행 중이었다.
체리블라썸을 무대로 올려놓고서 한명호 팀장과 함께 객석을 살폈다.
“아직 반도 안 찼네.”
폭설 때문인지 야외 객석 의자는 고작 20%만 찬 상태다.
하지만 부족한 관객들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팀장님. 무대가 미끄럽겠는데 애들이 넘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눈 가림막이 없다 보니 무대 위로는 함박눈이 쌓이고 있다.
스태프들이 틈틈이 쌓인 눈을 치우고 있지만 눈이 녹아 고인 물이 무대 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단단한 아크릴로 덮여 있는 무대에서 넘어지면 최소 타박상에 심하면 골절이다.
“이걸 어쩐다?”
하지만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었다.
“혹시나 해서 운동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구두보다는 안전할 거 같은데 애들 운동화 신기면 안 될까요?”
고민하던 한명호 팀장은 결국 안전을 우선한 결정을 내렸다.
“힐 벗으면 좀 그런데······. 아니다. 일단은 안 다치는 게 최고니까. 그래 네 말대로 하자.”
“그럼 리허설 끝나는 대로 틈을 봐서 운동화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지금 다녀와라. 얘들은 내가 케어할 테니까 대기실에서 보자고.”
한명호 팀장이 내 의견을 들어줘서 다행이다.
회귀 전.
눈이 녹아내려 미끄러워진 무대에서 넘어지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거든.
난 꾸벅 인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승합차 트렁크를 열고 새하얀 어글리슈즈 네 켤레를 꺼내고 돌아가려는데 내 곁으로 지나가는 여고생들이 보였다.
전원 ‘CHERRY BLASSOM’이라는 문구가 쓰인 모자를 쓰고 있다.
팬이다.
“저기요.”
폰을 보며 꺅꺅대던 여학생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 말을 거니 경계하는 기색이다.
“혹시 우리 체리블라썸 팬이신가요? 아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체리블라썸 매니저예요.”
하지만 여전히 날 빤히 노려보며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
“진짜요?”
“예. 여기 비표 직접 좀 보세요. 출연진 관계자용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현장 스태프의 노란색이 아니라 출연진 관계자용 푸른 비표를 보여주자. 그제야 꺅꺅대기 시작했다.
“대박! 체리블라썸 어디 있어요?”
“오늘 체리블라썸 온 거 맞죠? 지금 연예인들 현장에 없다고 애들 실망 끝내주는데. 아! 그리고 ZIZAK 오빠들은 도착했어요?”
그제야 오른손에 들고 있는 ZIZAK 굿즈 응원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괜찮다.
여러 그룹을 응원하는 팬도 있을 수 있는 거고 안티만 아니면 감사하지.
“글쎄요. ZIZAK은 저희 회사 소속이 아니라서요. 곧 오시겠죠. 그분들도 팬들을 엄청 아낀다면서요?”
자신들이 좋아하는 그룹을 칭찬해주자 여학생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런데 매니저님. 저희 혹시 체리블라썸이랑 사진 한 번만 찍을 수 있나요?”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말이었다.
그래도 한명호 팀장에게 허락은 받아야 하니까 사진은 잠시 보류.
“지금 리허설 중이라 시간을 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시간 빼볼게요. 따라오실래요?”
네 명의 팬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회사는 신경도 안 써주던데.”
“거 봐. 체리블라썸은 다를 거라고 했잖아.”
“야. 저번에 골든로드 매니저가 나 밀친 거 기억 안 나? 나 그때 옷도 찢어졌는데.”
뒤를 따르던 애들이 재잘재잘 댄다.
나는 팬들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고선 신발을 들고 대기실로 뛰었다.
이주영 매니저는 무대의상을 옷걸이에 걸어두곤 휴대용 다리미로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그거 뭔데?”
“아. 미끄럼방지용 운동화요.”
무대 사정을 설명하자 다행히 금방 납득했다.
“신발 이쁘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 정도 어글리슈즈면 의상이랑도 잘 어울리겠다.”
오늘 입을 두 가지 의상에 최대한 맞춰 골라 가지고 온 신발이니 당연하지.
달칵.
리허설을 마친 체리블라썸이 들뜬 표정으로 대기실로 돌아왔다.
꺅꺅대던 세리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V자를 그렸다.
“매니저 오빠. 나 오늘 실수 하나도 안 했어요!”
세리가 자신감을 뿜뿜 뿜어내며 자랑을 해댔다.
“장하다. 김세리! 아주 훌륭해!”
“하이파이브!”
짝!
“이~예!”
세리와 하이파이브를 하자 양은비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세리야. 너 혹시 무슨 배터리라도 따로 달고 다녀? 안 힘들어?”
“응. 안 힘들어. 오늘 나 완전히 잘할 거 같아! 세리 기분 MAX임. 힘도 MAX!”
세리가 방방 뛰자 대기실 분위기가 환해졌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난 한명호 팀장에게 팬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팬들?”
체리블라썸도 팬들이 있긴 하다.
2집 활동을 했으니까.
하지만 현장까지 나타나는 열성 팬들은 없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랬었다.
“진짜요? 우리 팬들이 현장에 왔다고요?”
우연희가 놀라 토끼 눈이 됐다.
“어. 지금 대기실 밖에 기다리고 있어.”
난 고개를 끄덕이고 한명호 팀장에게 부탁했다.
“저기 한 팀장님. 팬들이랑 사진 한 번만 찍어주면 안 될까요?”
한명호 팀장이 씨익 웃는다.
“안 되긴 왜 안 돼? 우리 윤호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거 같은 말이지만 뭐 어때.
한명호 팀장과 난 체리블라썸을 데리고 서둘러 대기실 밖으로 향했다.
* * *
대박이었다.
횡성여고 사인방은 마치 익룡이라도 소환한 듯 꺅꺅거렸다.
어찌나 사진을 찍으면서도 환호를 지르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모을 정도였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일반인들도 함께 사진을 찍자고 다가왔었다.
아이돌 팬으로는 최고라도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열성 팬들을 만나고 오자 아이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사진을 찍고선 제대로 된 응원을 받으니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보였다.
“매니저 오빠가 오는 날이면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요.”
상기 된 표정의 우연희가 배시시 웃으면서 농담을 한다.
“그래서 싫어?”
“아뇨. 오빠가 계속 왔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그래?”
말을 하는 우연희가 가벼운 미소를 띤다.
눈이 반달로 휘어지며 눈웃음을 짓는데 처음 봤을 때보다 묘하게 섹시해 보였다.
‘신기하단 말이지.’
처음엔 예쁘다는 느낌만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모습이 보인다.
엄마 같은 푸근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데다 가끔 개구쟁이 같은 모습도 보이고.
역할이 ‘엄마’다 보니 꽃피지 못했을 뿐이지 코디네이터를 붙여 이미지를 만들어 주면 아직 보여주지 못한 다양한 매력을 보일 수 있을 거 같다.
물론 다른 세 명도 마찬가지였고.
‘신곡 작업할 때는 전담 코디네이터도 붙여 보자고 제안을 해야겠다.’
그때였다.
곁에 있던 세리도 둥기둥기 춤을 추며 말했다.
“나도 나도! 유노 오빠 오는 거 진짜 찬성! 유노 오빠 오면 우리 그날은 꽃피는 날이잖아~.”
체리블라썸이 꽃피는 걸 표현한 춤이라는데 어깨가 삐거덕대는 게 어째 춤이 좀 아크로바틱하다.
역시 우리 세리는 몸꽝이구나.
땀을 닦고 있던 양은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매니저 오빠. 다음번엔 또 언제 와요? 우리 한 팀장님한테 그날 스케줄 왕창 잡아 달라고 하게요!”
양은비는 혀를 쏙 내밀며 솔직한 욕심을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
마지막으로는 은아가 주춤거리다 살포시 내 옷깃을 잡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왜?”
“아뇨. 오늘 고마워서요.”
은아 딴에는 최고의 의사 표현이다.
고맙다는 이 말이 뭐라고 괜스레 가슴이 설렌다.
괜히 머쓱해 머리를 긁적였다.
“별말을 다 한다. 오늘 이대로 잘 해보자고.”
“네~!”
이 착한 애들을 위로 올려주겠단 욕심이 다시금 들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오는 봄날엔 진짜 니들 꽃 피게 해준다.’
잠시 후.
본방에 올라가기 위해 체리블라썸은 무대의상으로 갈아입고 내가 가지고 온 새하얀 어글리슈즈를 신었다.
“다들 모아서 파이팅이나 하고 가자.”
한명호 팀장의 외침에 둥글게 둘러 모인 체리블라썸이 한곳에 손을 모았다.
“자. 오늘 구호는 은아가 해볼까?”
은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큰맘을 먹었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구호를 선창했다.
순간 체리블라썸이 그 말을 이어받아 구호를 외쳤다.
“체리~ 체리~ 블라썸! 이번에는 제~발 피게 해주세요!”
무슨 구호가 이래?
그런데 이 황당한 구호를 외치는 멤버들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얼마나 간절하면 구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다.
맞잡은 손이 하늘로 올라간 순간 똑똑이는 소리와 함께 스태프가 들어왔다.
“이제 가실 시간이에요. 본방 오프닝 5분 전입니다.”
차태희 AD가 직접 우릴 마중 나올 정도로 신경을 써 주고 있었다.
* * *
체리블라썸과 사진을 찍은 네 명의 횡성여고생들이 폰에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대박. 나 완전 오징어야. 은아랑 찍지 말걸.”
“킥킥. 난 넙치네. 얼굴 어쩔? 미치겠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여 줘야지.”
“난 30cm 뒤로 물러났는데도 왤케 머리가 크게 보이지? 야 이거 카메라 굴절 맞지?”
“정신승리 하지 말고 은비 사진이나 봐. 빼빼 말랐는데 한 부위만 부었음. 다이어트를 하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으려나?”
“아냐. 내가 물어봤는데 집안이 다 저렇대. 유전자빨임.”
폭설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지만 사진에 푹 빠져 시간 가는 걸 잊은 듯했다.
“야! 시작할 시간 됐다!”
“어서 가자! 눈 때문에 자리 많대.”
무대 위로 아나운서가 올라오더니 마이크를 잡고 뮤직스테이지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KBC 뮤직스테이지는 용평 H 리조트에서 진행합니다. 공개 방송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빠바밤~ 바밤!
대형 스피커에서 요란한 BGM이 시작됨과 동시에 체리블라썸이 빠르게 튀어나와 세트 포지션을 잡았다.
폭설이 쏟아지는 현장에서도 플레어 치마를 입고 무대를 준비하는 모습에 여학생들은 대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박. 저러다 얼어 죽겠다.”
“근데 세리 신발 어디서 산 걸까? 엄청 이쁜데.”
“서울에서 파는 거겠지 뭐.”
“야. 요즘 인터넷으로 못 사는 게 어딨냐? 우리가 산골에서 사는 것도 아닌데. 너희 집도 아파트잖아.”
“그래도 우리 횡성에는 백화점 없잖아.”
“왜 없어! 한우백화점도 백화점인데!”
“미친. 야. 그 백화점이랑 그 백화점이랑 같아?”
“아 몰랑. 있다가 쿠빵에서 검색해 봐야겠다. 저 모델로 주문해야지~.”
한 소녀의 발언에 다른 횡성여고의 소녀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무대가 시작되자 그런 다툼도 잦아들었다.
“시작하나 보다. 다들 조용.”
왜 싸웠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들 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BGM이 쿵쿵대며 칼군무가 시작됐지만 체리블라썸을 연호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프리티 프리티!>라는 곡이나 <샤이니 선샤인>이란 노래 둘 다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래방에서 따라부를 만한 신나는 곡도 아니고 가창력을 자랑할 만한 파트도 미묘하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무대는 볼만 하지만 그렇다고 안무가 제대로 뽑힌 것도 아니고.
하지만 소녀들은 사진을 찍어준 체리블라썸을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우리라도 응원해 주자.”
“그래. 우리도 사진값은 해야지!”
횡성여고 사인방은 하나둘셋을 외치곤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체리블라썸!”
첫 무대와 두 번째 무대가 이어지는 동안 소녀들의 응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소녀들의 외침은 일당백이었고 그 분위기에 휘말린 주위 사람들도 점차 체리블라썸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널리 알려진 응원구호가 없었기에 일부는 박수를 치며 응원을 대신했다.
또 일부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렇게 제멋대로의 응원이 이어졌지만 체리블라썸은 더욱 열심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덕에 체리블라썸을 폰으로 찍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동시에 SNS에 올라갈 사진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순간 실시간 댓글이 늘어나더니 연예 기자들도 체리블라썸에 관한 뉴스를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