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무엇을 위해 (2)
“화합의 도시 루웬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절도 있고 위엄 있는 선창이 성문에 울려 퍼졌다·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이자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쿤델 퀴젤의 귀환·
무심하지만 기백이 느껴지는 눈빛이 주변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총장님·”
그런 총장을 기다리고 있던 부총장 사트웰이 나타나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길을 걸으며 로열 아카데미로 향했다·
“앞서 지시하신 대로 학생들의 모든 수업 및 외부 활동을 금지하고 전부 본인의 기숙사에서 대기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인가?”
“이틀 전 무단 외출을 한 것으로 알려진 세트 샤하르칸 학생을 제외하고선 모두 소재가 확인되었습니다·”
쿤델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담당 기사들에게 물어보니 체험 학습을 갔다 하더군요·”
“체험 학습?”
“예· 듣기론 스파니아 왕국에 있는 어느 유적을 다녀오겠다며 시리카 교관에게 체험 학습을 신청했다던데 시리카 교관이 말하길 자신은 승인을 낸 적이 없다 했습니다· 자세한 건 그 학생의 말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본인 스스로 승인이 났다 판단해 아카데미를 무단으로 이탈했다는 거군·”
평소 행실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학생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 신청했다던 체험 학습 인원에 시안 베르트도 있었다고 합니다·”
“시안 베르트가?”
총장의 눈빛이 급 돌변했다·
사트웰은 시안이 세트와 함께 현장 체험 학습을 신청했으나 무단 외출을 한 세트와 다르게 아카데미 내에서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엘리스의 일로 단기 휴학을 신청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그 일이야 사전에 몇 번이고 언질을 주었으니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에 체험 학습을 신청했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체험 학습을 신청했으리라 총장은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안 베르트의 소재는 누가 파악했지?”
“시리카 교관입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법한 절묘한 우연이었다·
다소 복잡하게 얽혀있긴 해도 이제부터 하나하나 정밀하게 풀어나가면 그만이다·
일단은 사건 현장을 처음 발견한 아린과 레시무스를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아카데미로 향하던 순간
“···!”
쿤델의 시선이 대뜸 어느 한 곳으로 휙 하고 돌아갔다·
평소의 총장답지 않은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기운은?’
태생부터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선 절대 가질 수 없는 기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루웬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살점이 떨리고 뼈를 저리게 하는 매우 이질적인 기운·
‘신기?’
쿤델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즉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총장님!?”
주변인의 부름도 이미 안 들린지 오래·
쿤델의 두 발은 곧 대로변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 없는 골목 한복판에 이르게 되었다·
먼지만 휘날리는 을씨년스러운 공간·
허나 미세하게 남아있는 온기가 이곳에 누군가 있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쿤델이 이윽고 자신의 발아래를 본 순간
“···?”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기묘한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머리카락?”
어디서도 볼 수 있는 인간의 흔한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잘록한 윤기가 흐르는 연분홍의 고운 머리카락·
나름 수십 년을 살며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고 자부한 그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굉장히 낯선 색깔의 머리카락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에 홀린 듯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깨우치고선 다시금 고개를 들어 남아있는 기운을 감지해봤지만
“····”
찾고자 했던 기운은 이미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 * *
“아린님· 들어가도 될까요?”
“응· 들어와·”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과 함께 레시무스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금 수척해진 얼굴의 아린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총장님께서 방금 아카데미에 입성하셨대요· 바로 이쪽으로 오실 것 같아요?”
“그래?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 알았어· 바로 준비할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냥 어제보단 낫고 5분 전보단 나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아린은 거울 속에 담긴 자신을 보며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아직 마음의 성장이 채 이뤄지지 않은 13살 소녀가 토막 난 사체를 목격한 것·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이틀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광경은 아직 아린의 머릿속에서 생생히 그려졌다·
“힘들게 나서실 필요 없어요· 저 혼자 말씀드려도 충분히····”
“그런 무책임한 짓을 할 순 없지· 걱정할 정돈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사실 아린이 더 괜찮은 척을 하는 이유엔 레시무스의 영향이 컸다·
현장을 목격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워낙 어린 시절에 불우하게 살아왔던 탓인지 아린과 다르게 그리 큰 충격을 받진 않은 듯했다·
함께 있던 레시무스도 저리 쉽게 이겨낸 마당에 어찌 자신만 혼자 좌절할 수 있겠는가?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아린은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레시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나나와 시안님에 대해선 어떻게 말씀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린은 별거 아니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쨌든 나나와 시안은 이번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잖아? 그냥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말하지 않을까 싶어·”
그 말은 즉 현재 시안이 아카데미에 있지 않다는 걸 그녀도 숨기겠다는 의미였다·
레시무스는 아린의 생각을 존중해준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장님이 오셨습니다!”
때마침 쿤델 총장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린은 방의 주인으로서 손수 현관으로 나아가 문을 열었다·
“로열 아카데미 3학년 아린 세벨러스· 쿤델 총장님을 뵙습니다·”
아린은 한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쿤델의 뒤엔 부총장 사트웰과 시리카 교관을 비롯해 아카데미 주요 인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해해주기 바란다·”
“물론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총장님·”
이곳은 엄연한 아카데미의 소재의 기숙사·
그들은 황녀와 총장으로서가 아닌 학생과 총장으로서의 상하적인 관계로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부 나가 있거라·”
“잠시 나가 있어 주세요·”
셋만의 온전한 대화를 위해 아린과 쿤델은 각자의 관계자들을 전부 문밖으로 내보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가 본 모든 것을 얘기해다오·”
쿤델은 돌릴 것 없이 이전 날 아린과 레시무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경위로 현장을 목격했는지에 관해 설명을 요구했다·
아린은 시안과 밤에 산책하러 나갔던 일을 시작으로 로열관으로 복귀하던 도중 숲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들어가 보니 끔찍하게 토막 난 사체의 일부를 발견하게 된 일까지 총장에게 전부 설명했다·
“···해서 그 즉시 아카데미에 알려 현장을 신고했고 이후엔 아카데미에서 내려진 조치를 따르며 지금까지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조금의 떨림이나 머뭇거림조차 없는 완벽한 전달이었다·
쿤델은 날카롭게 세웠던 눈빛을 다소 누그러뜨린 뒤 인자한 어투로 물었다·
“현장을 보고 놀라진 않았느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잘 극복하는 중입니다·”
아린은 거짓 없는 솔직한 심정을 전달하였다·
이에 쿤델은 아린의 진정어린 눈빛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아직 옅은 불안함이 남아있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
참으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는 당찬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살짝 눈동자를 굴려 그녀들의 머리카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왜 그러시나요?”
이전 같지 않은 낯선 눈빛에 아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 현장에서 다른 기운은 못 느꼈느냐?”
“다른 기운이라 하시면···?”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기운 같은 거 말이다· 이를테면··· 드래곤이라던지·”
“···!”
두 여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쿤델은 자신이 말하고서도 말도 안 된다 생각했는지 바로 손을 저었다·
“됐다· 방금 말은 신경 쓰지 말거라·”
무슨 연유로 그런 것을 물었는진 모르겠으나 일단 아린과 레시무스는 마음을 재빨리 진정시켰다·
“생각해보니 의외구나· 그 자신밖에 모르는 놈이 너와 산책을 나가주다니· 그녀석이 나가자고 한 거냐?”
“아! 그 그게· 제가 나가자고 부탁했어요!”
엄연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었었다·
“이번 사건과 외람된 얘기긴 하다만 이번 황제 폐하와의 독대에서 한 가지 들은 사실이 있었다·”
“무엇을 말인가요?”
“황제 폐하께 황제가 되고 싶다 했다지?”
아린의 얼굴이 급 붉게 달아올랐다·
“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저 목표를 크게 잡고 달리려 했던 거지 진짜로 황제가 되겠단 의미는 아니었어요!”
손사래를 치며 극구 부정하는 모습에 쿤델은 작게 실소했다·
“너무 너 자신을 낮출 필요 없다· 네가 황제 자리에 뜻을 품고 있다 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지·”
“예?”
“너와 시안의 약혼이 주선된 것 또한 너를 보호하기 위한 황제 폐하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니 너도 주저하지 말고 그 녀석을 잘 이용해 보거라·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잘 채워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지· 분명 의미 있는 성장이 있을 거라 본다·”
현시점에 황제 자리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1황자의 외조부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아린으로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럼 이제부턴 당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를 네 약혼자를 만나러 가야겠구나·”
값진 격려의 말을 건넨 쿤델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교적 긍정적으로 끝났긴 하나 문제는 이다음에 있었다·
지금 시안의 방엔 진짜 시안이 아닌 시안으로 변신한 나나가 자리하고 있을 터·
미숙한 자신이야 감쪽같이 속였다지만 총장은 다르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다져진 연륜의 시선이라면 나나의 본모습을 꿰뚫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라도 옆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문제가 안 된다면 저도 같이····”
“···!”
그 순간 총장의 눈이 번뜩 뜨이며 황급히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듯 전신엔 미세한 떨림마저 일고 있었다·
“시리카!”
그러곤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리카 교관을 불렀다·
“부 부르셨습니까? 총장님?”
이에 당황한 얼굴의 시리카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안 베르트의 소재를 네가 파악했다고 들었다· 맞느냐?”
“예· 맞습니다·”
“지금 녀석의 방엔 몇 명이 있는 것이냐?”
“시안 베르트 본인과 개인 수호 기사 두 명을 포함해 총 세 명이 있습니다·”
“그게 끝이냐?”
“예· 적어도 제가 파악했을 땐 그랬습니다·”
심장을 짓누를 것 같은 분위기에도 시리카는 침착하게 대답을 이어나갔다·
허나 쿤델의 눈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 말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녀를 향한 의미심장한 경고와 함께 총장은 아린의 방에서 나갔다·
‘틀림없다· 이 기운은 분명 조금 전의 그것이야·’
불과 몇십 분전 대로변에서 느꼈던 기운과 똑같은 기운·
인간의 기운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신묘하면서도 이질적이면서도 기운이 지금 로열관 2층 왼쪽 복도 끝 방에서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윽고 총장의 거친 발걸음이 방 앞에 도착하니
-끼익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문이 열렸다·
문을 연 남성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를 슥 하고 쳐다보던 것도 잠시
쿤델은 아무런 말 없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이윽고 도착한 거실·
가장 먼저 보인 이는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얼굴의 갈색 머리 여성이었다·
그녀 또한 쿤델을 보고선 바로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수호 기사로 위장 출입한 시녀임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얼빠진 수호 기사와 시녀 따위를 보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살며시 아래로 내려가며 등진 소파 쪽으로 향했다·
“····”
그러자 소파에 앉아있던 한 소년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하였다·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덤덤한 표정으로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는 소년·
총장의 굳은 얼굴을 보고선 의아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누구 죽이기라도 하러 오셨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