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무엇을 위해 (1)
로열관 2층 왼쪽 복도 끝에 위치한 시안의 방·
소파에 앉아 고개를 축 늘어트린 브라이언은 좀처럼 자괴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쿤델 총장의 긴급 조치가 내려짐에 따라 학생 수호 기사 할 것 없이 모든 외부활동이 금지된 상황·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머리를 부여잡으며 미련하게 한탄하는 일뿐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느낌·
황녀와는 되도록 가까이하지 말라 자신이 없는 동안 나나를 잘 돌봐 달라·
어느 것 하나 지키지 못해 나타난 것이 지금의 현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죽고 싶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주인의 신뢰를 이리 형편없이 깨는 종자도 없을 것이다·
참으로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종자 그게 바로 자신
도저히 시안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 매우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아으! 도저히 못 봐주겠네!”
그 모습을 몇 시간 째 지켜보던 에밀리가 마침내 폭발하듯 소리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그 꼬맹이가 폭주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면 뭐 끝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라도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슬그머니 고개를 든 브라이언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뭘 해야 할까요?”
“그걸 지금이라도 생각하자는···!”
“대체 뭘 해야 할까요? 이미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와 뭘 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요?”
에밀리는 생각했다·
이 남자 지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고·
말 몇 마디 던진다 해서 쉽게 진정시킬 수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일단 마음이라도 진정시켜주고자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그 꼬맹이 아니 나나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시리카님께서 데리고 계십니다· 저희가 계속 데리고 있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하신 거죠····”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자신이 무척이나 안일했다고·
시안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해서 자신까지 마음을 놔버리다니·
정작 나나가 폭주하면 감당할 깜냥도 안 되는 주제에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느슨하게 행동했던 걸까?
앞에 바위가 있다면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나나가 한 것이라는 진위가 밝혀진 건 아니다·
다만 사태 현장을 아린 황녀가 발견해 버린 시점에서 이미 자신이 손댈 수 있는 범주를 한참 넘어섰다·
시리카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에 짱박혀 있으라며 신신당부했고 이를 어길 시엔 본인도 책임질 수 없을 거라며 강하게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 자기보고 대체 뭘 하란 말인가?
이만하면 오래 살지 않았나 싶은데 차라리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어떨까?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다·
그리한다면 적어도 시안에게 피해는····
-짝!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따끔한 소리·
브라이언의 침울했던 눈이 한순간 번뜩 뜨였다·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니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강하게 후려친 에밀리의 얼굴이 보였다·
뺨 위로 얼얼한 통증과 함께 그녀의 열기가 느껴졌다·
“당신 도련님의 기사라며! 도련님을 지키는 기사라는 사람이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얼떨떨한 나머지 브라이언은 눈만 멀뚱멀뚱 깜빡였다·
“일을 저질렀으면 수습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도련님이 올 때까지 이러고만 있을 거예요?”
“수 수습 말입니까?”
간신히 입을 열긴 했으나 그의 눈엔 당황함이 역력했다·
일을 저질렀으면 수습을 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라지만 앞서 말했듯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이미 밖에는 로열관을 주시하기 위한 수십 개의 눈이 자리한 상태·
뭐라도 할까 싶어 섣불리 움직였다간 애먼 의심만 사게 될 것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이 상황이 해결되기라도 한데요?”
“그 그야 시리카님께서····”
“그럼 그 꼬맹이는? 일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우리 곁에 올 수 있는 거예요?”
브라이언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다시 우리 곁에 올 수 있냐는 에밀리의 물음에 차마 긍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시리카는 그 누구보다도 시안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안도 말하길 되도록 그녀에게 밉상인 모습은 보이지 말라 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 즉시 이 세상에서 존재를 지워버릴 만큼 매우 가차 없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의 곁에 지금 나나가 있는 것이다·
사태가 수습되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기숙사로 보내줄 거라 생각하는가?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없죠? 없는 거지?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네! 우리 얼굴 다시 못 보는 거잖아! 그게 우리 도련님이 원하는 일이라 생각해요?”
“아니요· 아니겠죠····”
장담하건대 지금의 상황을 시안이 안다면
분명 엄청나게 대노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분명 브라이언은 물론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정녕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무기력했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브라이언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시리카님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 * *
사건이 발생하고 긴급 조치가 내려진 지 하루·
총장의 도착을 늦추기 위해 대원들이 방해 공작을 하고 있긴 하나 아무리 늦어도 내일 저녁 중으론 도착할 것이다·
그가 다른 곳도 아닌 로열관을 주시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이번 사건의 관계자로 시안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시안은 총장과 주기적으로 딜을 주고받으며 단순 학생과 총장의 관계만이 아닌 상부상조하는 동업적인 관계로서 꽤 원활한 사이를 유지해 왔다·
문제는 그 관계가 신뢰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
시안은 기본적으로 쿤델 총장을 믿지 않았으며 총장 또한 시안의 진면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진행해왔다·
즉 지금의 관계는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다·
아마 예상하건대 총장은 지금 매우 화가 났을 것이다·
감히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다니·
귀족이고 왕족이고 상관없이 루웬에 있는 사람들 전부를 조사하더라도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색출할 것이라 시리카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시안이 없다·
하물며 이 사태의 장본인인 나나는 현재 매우 불안정한 상태·
시안을 대체하기는 불가능하며 한다 해도 총장이 본다면 바로 알아챌 것이다·
해서 시안이 간 곳으로 추정되는 노델리에 급히 대원들을 파견해 복귀령을 내리긴 했으나 절대 제시간에 오진 못 할 터·
결국 지금의 사태는 온전히 자신이 처리해야만 했다·
“···?”
그러던 와중 창문 쪽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운만으로도 대충 누군지 파악한 시리카는 황급히 창문으로 달려갔다·
“이게 무슨 짓이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시안의 종자 브라이언이었다·
혹여 다른 사람 눈에 들킬까 브라이언 황급히 창문을 넘어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죠? 조용히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죄 죄송합니다! 무례인 줄 알고 미련한 짓인 줄 압니다만! 한 가지 시리카님께 여쭐 게 있어서 왔습니다!”
긴장을 한 것인지 목소리에서 심한 떨림이 느껴졌지만 그 속에서도 무언가 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었다·
시리카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나나는 어디 있습니까?”
“아카데미가 아닌 안전한 곳에 잘 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저희에게 보내주실 겁니까?”
“아니요·”
질문을 이어나가려던 브라이언의 말문이 그대로 막혀버렸다·
그녀는 뭐가 문제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 지금 뭐라고?”
“보내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시안을 위해서도 그리고 시안을 모시는 당신들을 위해서도 그 아이는 이제 그만 없어지는 게 나아요·”
예상은 했지만 아니 예상하지 못했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는 무심한 말투·
돌려서 해석할 것도 없었다·
시리카는 이번 사태가 끝나면 아니 어쩌면 해결되기도 전에 나나를 죽일 것이다·
브라이언은 마른침을 꿀꺽 쌈키며 불안했던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다·
이 자리에 왔고 그녀의 의중까지 알아버린 이상·
자신이 할 일은 더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나나를 데려가겠습니다!”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시리카는 작은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시안 도련님께선···!”
차마 볼 수도 없었고 인지조차 할 수 없었던 순간·
어느새 눈빛마저 변한 시리카는 브라이언의 멱살을 강하케 움켜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이게 애들 장난인 줄 알아? 그 반쪽짜리 꼬마를 데려가서 어쩌겠다는 건데? 그게 진짜 네 도련님을 위한 일인 것 같아?”
브라이언은 말문이 막힌 나머지 입술만 벌벌 떨고 있었다·
“너희를 탓할 생각 없어· 내가 아둔했고 어리석었어· 그런 위험한 존재를 시안의 곁에 둔 내 잘못이라고! 지금 그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면 상황이 해결될 것 같니? 당장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또 벌어질 거야! 그럼 그때마다 너희는 또 똑같은 상황을 마주할 거라고! 넌 시안의 기사 아니었니? 네 주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 아니야?”
브라이언은 간신히 입을 움직여 자신의 굳은 의지를 전했다·
“도 도련님께 도움이 되는 것보다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
시리카는 아무런 말 없이 브라이언의 불안한 눈빛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온 사신과 눈을 마주한 듯한 기분·
온몸의 피가 서서히 곤두서고 심장이 미칠 듯이 울리며 눈앞이 점차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브라이언은 시리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대로 꼬리를 내리고 물러난다면 그때는 시안이 아닌 거울 속의 자신마저 차마 똑바로 마주하지 못할 것 같기에·
브라이언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정신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당주님!”
순간 브라이언이 들어온 창문 쪽으로 한 남성이 나타났다·
시리카가 짐짝 치우듯 브라이언을 옆으로 밀어내니 남성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쿤델 총장이 방금 루웬에 입성했습니다!”
“···!”
소스라치게 놀란 브라이언과 다르게 시리카는 무념한 얼굴로 물었다·
“진입 경로는?”
“아카데미입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도착·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아카데미로 오고 있단 말에 시리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들었죠? 엄한 짓거리 하지 말고 지금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세요· 시안이 돌아올 때 까지····”
차마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던 브라이언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당주님 큰일 났습니다!”
그 때 또 한 명의 대원이 급히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 대원과 다르게 표정이 굉장히 심각해 보였다·
뭔가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시리카의 눈빛도 미묘하게 흔들렸다·
“아공간에 있던 용인이 사라졌습니다!”
“···!”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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