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피의 연회 (3)
시안의 방에 도착한 에밀리와 브라이언·
에밀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기 그러니까 기사님?”
“예· 시녀님!”
둘은 2년 전 시안이 아카데미로 떠날 당시 시녀와 마부로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물론 당사자들은 전혀 기억을 못 하고 있지만·
“제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이 꼬맹이 뭔가요?”
초롱초롱 눈동자와 반원을 그리는 귀여운 입술의 소녀·
반면 무겁게 내려앉은 눈과 멋쩍게 입꼬리가 올라간 에밀리의 모습이 참 대조되고 있었다·
에밀리는 일단 생각했다·
어리다·
나이는 열 살 내지 열한 살·
시안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정도·
근데 자신과 비슷한 시녀 옷을 입고 있다·
그 옷을 입은 상태로 시안의 방에 있다·
그 말은 즉····
“처음 뵙겠습니다! 시안 베르트님을 모시고 있는 시녀 나나라고 합니다!”
나나의 목소리는 앙증맞으면서도 우렁찼다·
“시녀~?”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도 안 나온다고 에밀리는 애먼 헛웃음을 반복하였다·
“날 두고 이런 어린애를 데려다가 시녀로 삼아? 도련님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브라이언의 몸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쩜 자신은 상상조차 못 할 말들을 저리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는 걸까?
대체 시안과 얼마나 두터웠으면 저럴 수 있는 건지 새삼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봐요 기사님! 우리 도련님이 여태 방학에도 안 돌아왔던 이유가 설마 얘 때문이었어요?”
순진무구한 브라이언은 곧이곧대로 답했다·
“어 그게 아마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나나가 어리다 보니 케어를 많이 해줘야 한다 하셔서· 일 때문에 잠깐 아카데미를 비웠던 적은 있지만 장기적으로 놔두신 적은····”
“뭐야 그럼 이 꼬맹이 때문에 안 돌아온 거 맞네! 와 진짜 어이없다! 누구는 제안도 거절하고 의리 있게 남아줬더니만 자기는 그새 다른 시녀를 들여? 진짜 돌아오기만 하면···!”
“언니도 우리 주인님의 시녀였어요?”
참지 못한 울분이 터지려는 것도 잠시 당돌한 꼬마 시녀가 말을 걸었다·
“그럼 당연하지! 난 우리 도련님의 유일한 전속 시녀였다고!”“우와! 그럼 언제부터 같이 있었어요?”
“기저귀 벗었을 때부터 봤으니까 연수로 따지면 5년이 훨씬 넘었지! 나만큼 오랜 본 사람도 없다니까?”
마치 인생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
토라지듯 얘기하다가도 자기 혼자 신나서 떠들고 있으니·
그 모습을 쭉 지켜본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참 단순한 여자인 것 같다고·
“아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 이거 전해드리는 걸 깜빡했네?”
“···!”
나나의 밝았던 얼굴이 급 굳어졌다·
에밀리가 꺼낸 것은 붉은색의 나비넥타이였다·
“넥타이인가요?”
“네 에쉘 도련님께서 막내가 하면 어울릴 것 같다고 저보고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나비넥타이 중앙엔 붉은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갖다 드릴까?”
“꺄아아아악!”
복도에서부터 전해져온 아찔한 비명소리·
순간 숨겨져 있던 나나의 귀가 쑥하고 빠져나왔지만 다행히 소리에 놀란 에밀리는 보지 못했다·
-킁킁
비명으로부터 퍼져오는 미세한 피 냄새·
그걸 감지한 나나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버려졌다·
“마수의 냄새!”
* * *
형형색색 다채로운 꽃들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연회장·
허나 그 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은 따로 있었다·
“허····”
남녀 할 것 없이 눈빛은 넋이 나가고 얼굴은 붉어졌으며 심장이 급박하게 요동쳤다·
어떤 감탄사를 갖다 붙여도 모자랄 완벽한 아름다움·
신의 아이라 불렸던 베르트 공작가의 장녀 엘리스 베르트가 마침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신이 인계로 내려왔구나···!”
차마 함부로 다가서지 못할 것 같은 고귀한 아우라·
일부는 바라보다 못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정작 엘리스는 그런 시선들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홀 안을 누빌 뿐이었다·
“요조숙녀가 다 됐구나· 엘리스?”
귓가에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엘리스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시리카 선생님!”
활짝 웃는 엘리스를 시리카는 눈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선생님! 그동안 어떻게 감추고 사신 거예요?”
“분명 칭찬인 것 같은데 어째 기분이 묘하다? 넌 어쩜 갈수록 더 예뻐지는 거니?”
품행이 단정하고 학력도 뛰어난 학생을 싫어하는 선생은 없다·
마찬가지로 실력 있고 평판 좋은 선생을 거부하는 학생도 없다·
아카데미의 교관들 대부분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간 엘리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두터웠던 건 단연 시리카였다·
선생과 제자의 반가운 재회·
두 여인은 끊일 줄 모르는 웃음과 함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설마하니 선생님께서도 연회에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원래 이런 시끄러운 장소는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한 고집대로만 살 수 있겠니? 가끔은 이렇게 분위기 전환도 해줘야 생기가 돋는 법이란다·”
“에이 그럴 거면 결혼을 하셔야죠! 지금이라도 선생님께 고백할 남자들이 수십 명을 몰려들 것 같은데요? 언제까지 연구만 하고 사실 순 없잖아요!”
결혼이라는 말에 시리카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이거 금빛 평원에 펼쳐진 두 송이의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 같군요!”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느끼한 목소리·
두 여인의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깜짝 놀란 엘리스와 달리 시리카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버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리스 양· 네펠리스 후작가의 차남 드레니안 네펠리스라고 합니다·”
구부러진 콧수염과 음흉한 눈빛이 여자로선 거부감을 느끼게 할 외모였다·
엘리스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이거 본의 아니게 두 분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습니다· 엘리스님의 말이 맞아요· 지금 시리카 양께 필요한 건 멋진 반려자입니다· 그래서 그 역할을 제가 해드릴 생각입니다·”
엘리스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 모르고 계셨군요?”
-스윽
드레니안의 손이 자연스레 시리카에게 향했다·
“저희 곧 있으면 약혼할 사이입니다·”
그의 가증스러운 손이 고운 시리카에 어깨에 얹힌 순간 진심으로 당황을 금치 못한 엘리스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 그러셨군요· 추 축하드려요!”
그 말을 하는 동안 엘리스는 차마 시리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드레니안의 추악한 성취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 연회의 분위기가 좀 루즈해지는 것 같군요· 아름다운 두 분께 어울릴 음악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실례하죠·”
혼자 멋대로 지껄이던 것도 잠시 드레니안은 느끼한 윙크를 내리고선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선생님? 다른 사람도 아닌 어떻게 드레니안 공이랑····”
“알잖니 엘리스? 내 의사랑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거· 그냥 집안에서 멋대로 성사시켰을 뿐이야·”
집안에서 멋대로라는 건 곧 선택지 없는 강요를 의미했다·
가문의 장녀지만 시리카의 나이는 30을 넘겼다·
사실상 이미 결혼 적령기는 지나간 상태·
비록 40세를 바라보는 홀아비이긴 해도 황후라는 뒷배경이 있는 이상 드레니안은 시리카의 집안에 있어 놓칠 수 없는 신랑감이었다·
물론 시리카 자체는 결혼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데 다른 방법은 없으신 거예요?”
“내가 무슨 힘이 있겠니? 막말로 저 남자를 누가 죽여주지 않는 이상 물리긴 힘들어·”
“무서운 말을 하시네요·”
진심이 반쯤 섞인 섬뜩한 농담이었다·
그녀들의 우울한 대화가 잠시 멈춘 순간
홀 복도에서 까만 턱시도를 입은 다수의 남녀들이 나타나 홀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악기들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주자로 추정되었다·
그들은 모두 얼굴에 알 수 없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세팅이 완료될 때쯤 다시금 나타난 드레니안이 중앙 단상에 올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곤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연주자들이 나타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충 시리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
엘리스는 실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스승이 인간 같지도 않은 남자와 약혼을 해야 한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걱!
“···?”
검을 잡아본 사람이라면 저 소리를 듣고서 반응을 안 할 수 가 없었다·
날카로운 도신이 신체 일부를 베어 가르는 소리·
머지않아 무심한 낙하소리와 함께 끊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퍼졌다·
“꺄아아아악!”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드레니안의 목·
그 위론 새빨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날카로운 검첨이 자리하고 있었다·
악기가 아닌 괴이한 흉기를 지니고 있는 가면의 인간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향해 잔혹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괴한들의 습격이라니!”
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디오네 황제는 격분하며 소리쳤다·
“고 고정하십시오· 황제 폐하! 어서 속히 대피하심이···!”
적들을 놔두고 대피하는 것은 황제의 성정과는 맞지 않았다·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 감히 내가 있는 신성한 황궁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크윽!
당장이라도 홀에 달려갈 것 같던 황제는 돌연 쓰러지고 말았다·
흥분한 나머지 지병인 심장병이 도진 것이다·
“뭣들 하느냐? 아바마마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지 않고!”
내실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1황자였다·
“루 루이넬···!”
“본 사태는 제가 책임지고 수습하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선 몸을 추스르옵소서!”
뭐라 말을 하고 싶지만 심장에서 차오르는 고통이 그의 모든 의사수단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혼란스러운 상황에 내실로 카산드라 황후가 달려왔다·
“드 드레니안이 죽었다! 내 동생이 죽었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루이넬은 황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시옵소서· 황후마마· 모든 게 잘 끝날 것입니다· 일단 아바마마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해주시지요·”
곧 황후의 곁으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에쉘· 자네가 황후마마를 좀 모셔주게나·”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지는 금발의 남성·
황후는 급박했던 마음이 돌연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다 당신이 에쉘 공?”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무례는 나중에 사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저와 함께 가주시지요!”
황후의 얼굴엔 어떤 거부 의사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꽃에 현혹되듯 깊이 심취한 눈빛·
가려는 곳이 지옥의 불구덩이라 해도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
불현듯 눈이 마주친 황자와 에쉘은 서로 간의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