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대륙제일검 (1)
아에르와의 만남이 끝나고 그다음 날이 밝았다·
어느덧 본격적인 아카데미의 개강도 하루를 앞둔 시점·
학생들에겐 수업을 비롯해 아카데미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준비하고 있을 시기였다·
물론 그건 배울 게 많은 진짜 신입생들이나 그런 거고
준비는커녕 난 아직 교과서도 안 사놨다·
그래도 나름 준비는 해야겠다 싶어 거리로 나갈 참이었는데····
“도 도련님 이 상황은 대체····”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브라이언이 나를 보며 물었다·
“미안한데 나도 달리 해줄 말이 없다·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
애초에 이 상황은 결코 내가 의도했던 상황이 아니거든·
[세상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학생의 숙소까지 찾아오는 교관이 어디 있을까? 남들이 보면 딱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겠다? 그지~?]
소파에 요염한 자세로 누워 있던 케이람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그럼요! 학생의 올바른 수업을 위해 학술 교관이 교과서를 가져다주는 지극히 평범한 상황이랍니다!”
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맞받아치는 시리카·
아무리 그래도 교관이 직접 학생에게 교과서를 갖다주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그것도 조교도 아닌 학술 교관인 당신이····
[당주라는 아이가 이리 조심성이 없어야 되겠니? 이건 뭐 학생과 교사의 금단의 관계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자꾸 들락날락하면 우리 주인이 의심받는단 생각은 안 해봤을까~?]
“케이람 님이야말로 참 조심성이 없으시네요· 비록 아에르 님께서 생명력을 주셔 완전실체화가 자유로워졌다곤 하나 이곳은 아카데미입니다· 마나를 비롯해 영적 기운에 민감한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그러다 당신의 존재가 들키기라도 하면 우리 시안 학생이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두 여인의 설전에 좀처럼 끼어들 각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머~! 곤란해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우리 주인이 멀대도 아니고 그냥 나랑 같이 다 휩쓸어 버리면 그만인데~?]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 휩쓸어 버릴 거였으면 여긴 왜 왔겠습니까? 주인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실 생각인가요?”
넓은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살벌한 웃음소리·
브라이언은 급기야 소름이라도 돋은 듯 몸을 감싸 안았다·
보다 못한 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기요 당주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술 교관이 이렇게 학생의 기숙사까지 찾아오는 건····”
순간 마주쳐버린 그녀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시안 학생 말조심해야죠· 당주라니? 누가 들으면 큰일 날라····”
왜 또 갑자기 경어체를 쓰십니까?
급기야 내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오던 그녀는 몸을 낮추며 말했다·
“아카데미 내에선 우린 단지 학생과 교관일 뿐이에요· 앞으론 좀 더 호칭에 신경 써주세요?”
뭐 공과 사는 구분하자 이겁니까?
당주로서 계승자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이건 어째 정도가 좀····
“그렇다고 딱딱하게 지내자는 건 아니에요! 우린 오래 봐야 할 사이잖아요? 많은 걸 배우고 꾸준히 성장해야죠! 그래야····”
밝은 미소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것도 잠시
그녀의 반원을 그리던 눈매가 크게 번뜩였다·
“우리 조직을 훌륭하게 이끌지 않겠어? 계승자 시안 베르트?”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 속에 담긴 나를 향한 집착·
이거 어째 전생보다 더 심해지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그녀가 이중인격은 아닌지 의심되던 순간
-슉
나와 그녀의 얼굴 사이로 시커먼 마나 구체가 날아들었다·
범인은 케이람이었다·
[이게 어디다 손을 얹어?]
그녀의 눈가엔 불쾌함과 더불어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 어째 마수들과 전투를 하고 왔을 때 보다 훨씬 더 피곤한 기분이다·
여기 있어봐야 나만 불편할 것 같군·
영역 싸움 하는 암사자들처럼 살기를 겨루고 있는 두 여인을 놔둔 채 나는 조용히 그 사이를 빠져나왔다·
“마 마실 가십니까 도련님?”
이제는 알아서 마실 가냐고 묻는 브라이언이었다·
“그래· 어디 갔냐고 묻거든 모른다고 해라· 어차피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리느라 신경 쓸 틈도 없을 거야·”
실제로 그녀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분화구마냥 서로 다투느라 정신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 길로 방에서 나와 아예 로열관 자체를 벗어났다·
아침햇살이 내리쬐는 루웬의 거리·
확실히 칙칙했던 다른 도시들보다 활기가 넘치며 밝은 기운이 요동쳤다·
아무래도 삼국의 경계가 인접한 만큼 그 사이에서 왕래도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로 인해 무역과 장사가 발달한 중간 도시로 자연스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교과서를 비롯해 준비나 좀 해볼까 해서 나온 거였는데
당주가 방문을 핑계로 다 줘버렸으니 나온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
평화롭네·
내 인생에서 이렇게 평화로운 순간을 느꼈던 적이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평화란 나하곤 별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정말 그렇다·
시뻘건 핏물이나 뒤집어쓰며 갖은 더러운 일을 해왔던 나다·
이런 푸른 하늘에 정다운 느낌이 다분한 거리를 걷는다는 건····
뭐 아주 불편하진 않네·
그래도 아직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정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내친김에 더 안 어울리는 일을 해보고자 루웬이 자랑하는 자연공원으로 향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한 공원·
은둔자나 다름없던 전생의 나도 몇 번 안 와봤던 곳이다·
적당한 벤치에 앉아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루웬의 랜드 마크라 불릴 만 하네·
가히 신계의 정원을 연상케 할 만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분수 동상 등 살짝 관광지 느낌을 내려한 흔적들도 곳곳에 보였다·
흠····
이 평화로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째 새하얀 꽃들이 피로 물들여지고 푸르른 나무들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연상되었다·
이런 거 보면 나도 참 병이군·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좀 고쳐먹자는 마음에 고개를 저은 순간
“···!”
자랑할 건 아닌데 나는 냄새를 좀 잘 맡는다·
음식 냄새 똥 냄새 이런 거 말고 뭐랄까 사람의 감정으로부터 풍겨져 오는 악의적인 냄새를·
정확히 내 벤치에서 11시 방향 적잖이 녹음진 나무 아래 내 또래(물론 열한 살)로 추정되는 4명의 남자아이들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개구쟁이 꼬마들이 모여 말뚝박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루웬은 사실 보이는 것만큼 그리 화목한 도시가 아니었다·
딱 세 명·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세 명의 꼬맹이들이 지금 나무에 기대고 있는 한 명의 꼬맹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전부 다 나와 같은 아카데미 학생으로 추정되었다·
원래 따돌리기라는 게 딱 저 나이 때쯤 할법한 악독한 행위이긴 하지·
허나 여긴 로열 아카데미고 언제 어디서 관계가 엮일지 모르는 귀족들의 세계다·
서로 친목을 다지면 다졌지 같은 귀족들 간에 따돌리기 같은 미련한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즉 저 상황은 둘 중 하나로 설명된다·
저 괴롭힘 받는 아이가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든지 혹은 귀족이 아니든지·
내 생각엔 후자일 듯싶다·
아마 저 아이도 귀족이 맞긴 맞을 거다·
다만 형식상의 귀족일 뿐·
로열 아카데미에선 간혹 교원들이 재능 있는 평민 아이들을 데려다가 이들을 키우기 위해 아카데미로 특수입학 시키는 사례가 존재했다·
다만 아카데미 규칙상 평민 신분의 아이들은 입학 자체가 불가하기에 교원들이 꼼수를 써서 그들의 신분을 임시적으로 상승시키곤 했다·
이른바 명예 귀족·
신분상 귀족이긴 하나 속으론 알맹이 하나 없는 빈껍데기·
가뜩이나 자존심과 긍지가 하늘을 찌르는 우리 순수 귀족님들께선 저런 무늬만 귀족인 하등민과 함께 아카데미를 다닌다는 것조차 큰 불쾌감을 느낄 테지·
아마 내 기억상 이번에 입학한 동기생 중 다섯 명 정도가 명예 귀족이었던 걸로 추측된다·
도와줄 거냐고? 글쎄?
솔직히 저런 건 어쩌다 한 번 볼법한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일상적인 일이라
언제 봐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거든·
그렇다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냐? 그것도 아니다·
저 가녀린 평민 친구를 도와줄 사람이 많았다면 애초에 저런 괴롭힘 자체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 봐라·
지금 이 공원에 나 말고도 수십 명이 있는데 죄다 지나치잖아?
엮여봐야 별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는 거다·
저 괴롭히는 놈들이 이름 좀 있는 집안이라면 더욱더 그러겠지·
원래 애매한 도움은 방관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내가 나서서 저 상황을 해결해줘도 잠깐일 뿐·
결국 저 평민 친구는 나중에 더 집요한 괴롭힘을 받을 것이다·
뭐 보는 눈이 적은 것도 아닌데 적당히 알아서들 하다 가겠····
-짝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하는 청량한 파열음·
멱살을 붙잡고 있던 금발의 덩치 큰 꼬맹이가 뺨을 갈긴 것이다·
내가 청각이 좋은 것도 있다만 오죽 세게 때렸으면 여기까지 들렸을까?
-퍽 퍽 퍽
연이어 들려오는 묵직한 타격음·
얼굴 배 다리 할 것 없이 아주 신나게 패고 있다·
이건 뭐 싸움꾼들의 격투 훈련 저리 가라군·
그래도 저 맞는 친구도 맷집이 꽤 있는지 쓰러지진 않고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
적당히 때리고 끝낼 줄 알았건만 어째 상황이 좀 심각해져 간다·
금발 꼬맹이 손에 들려있는 붉은색의 마나 구체·
녀석은 그걸 다른 곳도 아닌 저 평민 친구의 입안으로 넣으려 하고 있었다·
열한 살의 신체는 이제 막 마나가 본격적으로 요동치는 때인 만큼 그걸 전반적으로 적응시켜 나가야 할 시기였다·
그런 중요한 때에 맞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마나를 강제로 넣었다간 충돌이 일어나 잘못하면 마나의 흐름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
그럼 마법은 고사하고 무구에 마나를 집어넣는 기본적인 것도 못하게 되겠지·
저건 거의 부모를 죽인 원수한테나 할 법한 짓인데?
그들은 평민 친구의 팔을 꺾고 얼굴은 위로 젖힌 채 저항하지 못하도록 구속했다·
그저 겁만 주려는 게 아닌 진짜로 저지르려는 것이다·
악마도 울고 갈 비열한 미소를 짓는 금발 꼬맹이·
이윽고 손에 쥔 마나 구체를 평민 친구의 입안으로 넣으려는 그 순간
“지금 뭐 하는 짓들이에요!?”
“···!?”
정의감 넘치는 당찬 외침에 꼬맹이들의 시선이 올빼미마냥 돌아갔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난 아직 저기에 가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직 세상이 박하진 않다고
불의를 참지 못한 정의의 사도께서 저 평민 친구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근데 그 정의의 사도가··· 어째 낯이 좀 익다?
“어떻게 같은 학생끼리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죠? 귀족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나요?”
1년 사이 길이가 꽤 자라난 은발과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제복이 제법 어울렸다·
“····”
우리 꼬맹이들도 범상치 않은 귀인이 나타났다는 걸 느꼈는지 그녀로부터 한 발짝 물러났다·
아린 세벨러스·
우시프 제국의 5황녀·
1년 만에 보는 그녀의 눈빛엔 이전엔 보이지 않던 독기가 서려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