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7화
“여기 구슬 아이스크림이 대륙 제일이래.”
지그하르트 검사로 보이는 흑발의 청년이 함께 걸어가는 금발의 여성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데이트를 하는 중인지 두 사람 사이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공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정말?”
금발의 여성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시사철이 추운 지그하르트에서 매일같이 품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두말할 필요가 없지. 너무 잘 팔려서 신제품도 가장 먼저 출시된다잖아.”
흑발의 청년은 휴가 때마다 꼭 먹어봐야 할 디저트라고 말하며 입맛을 다셨다.
“디저트라고 하기에는 우린 아직 아침도 안 먹었는데?”
“그래서 온 거야. 늦으면 원하는 맛을 못 고를 수도 있거든.”
“그 정도라고?”
“광풍전의 임무가 끝나면 조장 중 한 명이 대량으로 아이스크림을 사가거든. 그래서… 헉!”
그가 어깨를 살짝 내리며 아이스크림 매장의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끄으윽….”
흑발의 청년은 곧 기절할 것처럼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자, 자기야?”
“안녕하십니까!”
그는 안쪽 테이블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후 슬쩍슬쩍 뒤로 물러섰다.
“나, 나가자.”
“갑자기 가기는 어딜….”
“여기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야!”
흑발의 청년은 금발 여성의 손목을 잡은 후 그대로 아이스크림 매장을 나가버렸다.
“이유라도 설명을 해주고 가라고!”
“저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야! 악귀들이 살고 있다고!”
그는 아이스크림 매장을 나오자마자, 여자친구조차 팽개친 채 멀리 달아났다.
“아니 저 미친놈이!”
금발의 여성이 화를 내며 발을 구르고 있을 때 그녀의 옆으로 열두어 살 남짓한 아이들이 걸어갔다.
“다음 주에 꿀을 바른 멜론 맛이 온다고 하던데?”
키가 작은 꼬마가 길게 입맛을 다셨다.
“난 과일 맛은 별로야. 초코가 최고라고.”
모자를 쓰고 있는 꼬마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이 제일이라며 손가락을 저었다.
“하여튼 애들은 맛을 모른다니까.”
키가 작은 꼬마는 한심하다며 혀를 찼다.
“그게 얻어먹는 녀석이 할 말이야?”
“지난주에는 내가 사줬잖아.”
아이들은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티격태격하면서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저희 초코랑… 어?”
“헙!”
다만 두 아이도 매장 문을 넘어서자마자, 학교 앞 석상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다, 다음에 올게요.”
“으응….”
키가 작은 꼬마와 모자를 쓴 꼬마는 언제 다퉜냐는 듯 어깨동무를 한 채 벼락처럼 아이스크림 매장을 벗어났다.
“얘들아. 조심해야지!”
크레인은 짐승처럼 달려나가는 아이들을 피하며 눈썹을 내렸다.
“쯧쯧.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니까. 나 때는 안 그랬는데.”
그는 안타깝다는 듯 거칠게 혀를 찼다.
“너 라온 님한테 덤비다가 바로 처맞았잖아.”
도리안이 크레인의 어깨를 툭 치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 그건 어릴 때잖아!”
“그러니까 너도 어릴 때 버릇없었다고.”
그는 꼬마는 다 똑같다며 손을 까딱였다.
“그, 그때는 다 비슷한 나이였으니까. 버릇이 없는 건 아닌데….”
크레인은 처음 라온에게 얻어맞았던 때가 떠오른 듯 콧잔등을 구겼다.
“어쨌든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거야?”
도리안이 아이스크림 매장의 간판을 올려보며 턱을 까딱였다.
“이 집에 무언가 비밀이 있을 거 같거든.”
“비밀?”
“그래. 지그하르트에 돌아오기만 하면 전주님이나, 루난 조장님이 무조건 이 가게에 들린다고. 두 사람이 지닌 강함의 비밀이 이곳의 아이스크림에 있을지도 몰라.”
크레인은 직접 들어가 보자고 말하며 아이스크림 매장의 문을 열었다.
“어? 전주님이다! 봐 내 말대로 항상 이곳에… 헉!”
그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라온에게 손을 흔들다가 턱을 파르르 떨었다.
“꺼흡!”
도리안 역시 깜짝 놀란 듯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앙?”
“음.”
라온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카룬과 발데르가 고개를 돌린 채 눈매를 찌푸렸다.
두 사람은 심기가 좋지 않은 듯 불길할 정도로 거친 기파를 뿜어냈다.
“저,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즐거운 수련 되시길!”
크레인은 이미 뇌리가 굳어버린 듯 아이스크림을 앞에 둔 세 남자에게 즐거운 수련을 하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쳤다.
“보, 보급이 모자라서 저도!”
도리안 역시 이곳에 남기 부담스러운 듯 다급하게 뒷걸음질 쳐서 아이스크림 매장을 벗어났다.
“하아아….”
라온이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나가네.’
아이스크림 매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카룬과 발데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전부 도망쳐 버렸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언행과 소문이 있으니, 그저 무섭기만 한 것 같았다.
“도, 도와드릴 게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도, 도와드릴 게 있다면 말씀을….”
이 매장의 점주도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삐걱거리고 있었다.
“전부 다 맛있어!”
-이게 행복이지! 마계에 돌아가면 꼭 구슬 아이스크림 공장을 만들 것이니라! 네놈의 집보다 크게!
지금 이 안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시아와 라스뿐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한데.’
라스와 시아의 재촉 때문에 카룬과 발데르에게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가자는 제안을 할 때부터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했다.
대마법사가 결계를 친 것처럼 매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전부 다 죄송하다고 외치며 도망칠 줄은 몰랐다.
‘아니, 그게 당연한 건가?’
지그하르트에 존재하는 네 명의 전주 중 세 명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니까.’
카룬과 발데르는 이곳에 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내며 사나운 기파를 뿜어냈다.
가뜩이나 덩치가 큰 사람들이 인상까지 구기고 있으니, 일반인들이 거북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딸랑.
라온이 고개를 젓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들어왔다.
‘또 나가겠지?’
바로 매장 밖으로 나갈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입구 앞에 있는 사람은 이쪽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루난?”
이번에 아이스크림 매장에 들어온 사람은 루난이었다. 언제나처럼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온 것 같았다.
“안녕.”
루난은 자신과 카룬, 발데르를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만 꾸벅이고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러 갔다. 언제나 느끼지만, 주관이 참 뚜렷한 녀석이었다.
“뭐 고를 거야? 이거 맛있던데?”
시아는 루난에게 다가가서 본인이 먹고 맛있었던 아이스크림들을 추천해주었다.
“이게 제일 맛있어.”
루난은 본인의 생각이 확고한 아이답게 바로 민트초코를 골랐다.
-역시 아이스크림 소녀! 본왕의 수석다운 선택이니라!
라스는 부하를 잘 골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또 루난이 수석이 된 건데.’
라온이 신나 하는 라스를 내리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안주로 먹어도 되겠어.”
발데르는 진무전에 구슬 아이스크림을 대량으로 사둬야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맛은 나쁘지 않다만, 너무 달아서 자주 먹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카룬은 무인으로서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가늘게 눈을 내리감았다.
“두 분.”
라온이 카룬과 발데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시작하시죠.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아침부터 별관에 오신 겁니까?”
남아 있는 민트초코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으읍!”
발데르가 대접에 담겨 있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삼켜버리고서 큼지막하게 발을 굴렀다.
쿠우웅!
오러가 깃들지 않았음에도 그의 몸집이 워낙에 컸기에 아이스크림 매장 전체가 흔들렸다.
“그래! 이렇게 쪼그라들어 있는 건 진무전주가 보일 모습이 아니지!”
발데르는 결정했다는 듯 곰 같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조카! 네게 부탁이 있다.”
“네. 말씀하십시오.”
부탁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맞는 무학을 만들어다오!”
발데르는 부탁한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만들어만 준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전부 다 들어주마!”
“음….”
라온은 절실한 듯 손을 떠는 발데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운 무학의 창조는 가주님께 말씀드리는 게 더 나을 텐데요?”
자신도 무학을 만들 수는 있지만, 글렌을 따라갈 정도는 아니다. 왜 이쪽에 부탁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무학은 너무 고차원적이라서 나랑 맞지 않아. 반면에 네가 만든 무학들은 조금 더 단순하면서도 명료하더군. 나는 네가 만든 검술을 쓰고 싶다!”
발데르는 라온의 무학이 더 본인의 취향이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타아악!
카룬이 손에 쥐고 있던 스푼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조카에게 무학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한다고? 네가 미쳤구나.”
그는 한심하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너는 창피라는 것도 모르는 것이냐!”
“조카가 나보다 강한데 창피는 무슨 창피! 잘난 조카면 부탁할 수도 있지!”
발데르는 조금도 창피하지 않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형님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건데! 말도 못 하면서!”
그는 주절거리지만 말고, 본론을 꺼내라며 턱을 치켜들었다.
“음….”
카룬이 슬쩍 시선을 돌린 채 라온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대련을 하고 싶다.”
“…대련이요?”
라온이 카룬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대련이라니.’
발데르의 부탁은 예상했지만, 카룬이 대련을 하자고 할 줄은 아예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헛숨이 튀어나왔다.
“지난 전쟁에서 너를 보며 느낀 게 많았다. 그걸 깨달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꼭 대련을 해보고 싶다.”
카룬은 그게 부탁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헹!”
발데르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나보고 조카를 이용해 먹는 놈이라고 하더니, 형님도 똑같구만!”
그가 혀를 길게 차며 손가락을 저었다.
“조카를 대놓고 패려고 하다니! 라온이 흑탑주의 목을 벤 게 그리도 고까웠소?”
발데르는 남자의 질투는 너무 추하다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정당한 대련을 원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싸우면 누가 이길지 알 수도 없어!”
카룬은 전혀 다르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마찬가지요! 나는 정당히 무학을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을 뿐이라고!”
발데르는 똑같은 거라며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게 어떻게 같아!”
“끝에 가서는 다 똑같다니까!”
카룬과 발데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형제는 형제인지. 저러고 있으니 옆모습이 꼭 닮아 있었다.
“싸우지 마세요.”
라온이 두 사람의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먼저 진무전주님의 부탁은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떤 무학을 원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발데르의 첫인상이 최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저 단순한 사람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도움받은 것도 있고, 부탁한 것도 있기에 원하는 무학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네가 잘하는 것 있잖냐! 일검에 다 때려 부수는 검술! 그걸 연검으로 쓸 수 있게 만들어다오!”
발데르는 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길쭉하면서도 부드러운 연검을 사용한다.
연검으로 염룡결이나, 중천포 같은 화력을 낼 수 있는 무학을 만들어 주면 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다음 주에 자아의 방에 들어가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걱정 마라! 기다리는 건 잘할 수 있으니까!”
발데르는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하자마자, 다리를 달달 떨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것 같았다.
“자아의 방?”
카룬이 의외라는 듯 눈매를 좁혔다.
“그곳을 지금 들어가겠다고? 좋은 선택이 아닐 텐데?”
그는 글렌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지금 들어가는 별로라며 눈썹을 내렸다.
“어차피 제가 초월을 넘어서는 건 기약 없는 일입니다.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 여유가 있을 때 들어가고 싶습니다.”
“확실히 너는 지금까지 벽을 스스로 넘었으니….”
카룬은 그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련을 하기는 힘들겠군.”
“아뇨. 그러니 해보죠.”
라온이 빛이 연해지는 카룬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대신 두 번으로.”
“두 번?”
카룬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자아의 방에 들어가기 전과 들어갔다 나온 후, 두 번의 대련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나를 통해 파악하겠다는 건가?”
그는 이제야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듯 헛웃음을 흘렸다.
“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라온은 구멍이 난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카룬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다.”
카룬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을 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지.”
그는 오히려 기대가 된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고오오오오오!
라온과 카룬의 눈빛이 격하게 부딪치고 있을 때 두 사람 사이로 거대한 아이스크림이 솟아올랐다.
“루난이랑 함께 골랐어! 다 같이 먹자!”
시아가 같이 먹어야 더 맛있다며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크흠….”
“아….”
라온과 카룬은 이곳이 밝은 조명과 산뜻한 벽지로 가득 찬 아이스크림 매장이라는 것을 떠올린 듯 안색을 붉혔다.
“이, 일단 먹죠.”
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스푼을 들었다.
“…그러지.”
카룬도 눈동자를 살짝 내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흐윽….”
점장은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꾹 삼켰다.
‘저 인간들 대체 언제 가는 거야….’
장사는 잘되고 있지만,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여긴 애들 노는 아이스크림 가게라고! 왜 여기서 난리인데!’
***
카룬은 아이스크림 매장을 떠난 후 알현실로 들어갔다.
“광풍전주에게 대련을 신청했습니다.”
옥좌에 앉아 무료한 눈빛을 그리는 글렌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럴 줄 알았다.”
글렌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빛에 갈증이 어려 있었으니까.”
“다만 가주님도 모르시는 게 있을 겁니다.”
카룬이 두 손가락을 세운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이 두 번의 대련을 하자고 하더군요.”
“두 번?”
글렌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예. 자아의 방에 들어가기 전과 들어간 후. 저를 시험 대상으로 삼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카룬은 부탁을 하러 갔다가 오히려 당했다며 가느다란 미소를 그렸다.
“라온답구나.”
글렌은 라온의 행동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옥좌에 등을 기댄 채 웃음을 터트렸다.
“가주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그 자리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 강합니다.”
카룬이 글렌이 앉아 있는 금빛의 옥좌를 가리켰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주가 된다면 가문을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그가 천천히 어두워지는 창가를 바라보며 턱을 살짝 내렸다.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가주가 된다면 그 아래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룬….”
글렌은 카룬의 말에 담겨 있는 뜻을 알아차리고 눈을 부릅떴다.
“물론 절대 스스로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피와 살을 쏟아내고, 영혼을 갈아서라도 그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카룬이 입술을 깨문 채 금빛 옥좌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냉랭했던 그의 눈빛 위로 뜨거운 열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럼 내일 대련장에서 뵙겠습니다.”
카룬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등을 돌려서 가주전을 나섰다.
“누구에게 넘겨줘도 아쉬울 것 같았는데….”
글렌은 카룬이 바라보던 옥좌를 쓸어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어느 쪽이든 환영할 수 있겠군.”
그는 앞으로의 일이 기대된다는 듯 은은한 웃음을 그렸다.
‘내가 그걸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다음날 정오.
라온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걸음으로 가주의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연무장에 있는 사람은 글렌, 아리스, 데니어, 발데르. 딱 네 사람이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이 글렌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인사로 힘을 빼지 말거라.”
글렌은 어서 대련 준비나 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조카! 오늘 그 거만한 인간을 처참히 발라버리라고!”
발데르는 카룬 따위는 가볍게 치워버리라며 발을 굴렀다.
“어디 흑탑주를 벤 검제의 실력을 구경해볼까?”
아리스는 팔짱을 낀 채로 길게 입맛을 다셨다.
“초월자끼리의 대련은 돈을 주고도 못 보는 일이지. 기대가 되는군.”
데니어가 뒤로 물러선 채 옅은 미소를 그렸다.
‘데니어….’
라온이 데니어를 살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정찰을 하려는 건가?’
조금 거슬리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데니어는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다.
대놓고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만, 그가 의심스러운 일을 벌인 게 없기에 지금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봐도 소용없을 정도의 무력을 보여줘야겠군.’
데니어가 보아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도록 압도적인 무력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주끼리의 대련이니, 소수의 사람만 불렀다.”
글렌은 전투에만 집중하라고 말하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글렌에게 고개를 숙일 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카룬이 들어왔다.
고오오오오!
카룬은 오늘 대련에 진심으로 임할 생각인지 서늘한 안광을 번뜩이며 대련장 위로 올라왔다. 그의 눈빛에 검날이 깃든 듯 피부가 따끔거렸다.
“준비는 되었나?”
카룬은 이미 몸을 풀고 온 듯 손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론입니다.”
라온은 바로 시작해도 된다고 말하며 제천검의 검병 위에 손을 얹었다.
“좋군.”
카룬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병을 움켜쥐었다.
고오오오오!
라온과 카룬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석상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후우우우욱!
두 검사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히고 있을 때 북망산 방향에서 거대한 매 한 마리가 떠올랐다.
매가 연무장의 상공을 지나며 작은 그림자를 만드는 순간.
스르르릉!
라온과 카룬이 동시에 검을 뽑아, 서로의 목을 향해 내질렀다.
쩌어어어어어엉!
두 자루의 검이 격돌하며 귀를 찢어버리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 너의 바닥을 보겠다.”
카룬은 기대하라는 듯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검이 라온의 목을 뚫을 것처럼 파고들었다.
“죄송하지만, 제 속은 깊습니다.”
라온이 손목을 세우자, 거세게 짓쳐 들던 카룬의 검이 천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는 제천검에 어린 불꽃만큼이나 새빨간 눈동자를 번뜩이며 입매를 비틀었다.
“제 바닥을 보고 싶다면 전주님의 목숨을 거셔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