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9화
“내 체질을 고쳐줄 수 있다고?”
성녀 올가는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대로 말하자면 네가 네 몸을 쥐어짜서 신성력을 뽑아낸 거니까· 체질을 바꾼다기보다, 나쁜 점을 모두 고쳐준다는 게 맞겠지·”
라온이 올가의 몸 전체에 새겨진 검은 줄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더 많은 줄이 생겨난 것을 보니, 이번 전쟁에서도 무리해서 신성력을 뽑아낸 게 분명해 보였다·
“아마 그 검은 상처들도 지워질 거야·”
“그걸 네가 할 수 있다고? 어떻게?”
올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붉은 입술을 떨었다·
“내 친구가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라스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올가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마족도 저런 경우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초월에 안착한 자신의 경지와 라스의 지식과 감각이 있다면 올가의 체질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으음····”
올가가 오른손 전체를 뒤덮은 검은 줄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건 단순한 신성력의 반발이 아니라, 내 과거이자 현재야·”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팔에 새겨진 검은 줄을 쓸어내렸다·
“····”
라온은 올가가 본인의 사정을 말할 수 있도록 입을 다문 채 손을 내렸다·
“전에 말했던가? 내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신성력을 타고났다고? 어울리지도 않게 성녀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지·”
올가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새겨진 검은 줄이 이어져서 꼭 검은 장갑을 낀 것처럼 보였다·
“무한에 가까운 신성력이 있었지만, 그걸 다뤄야 하는 내 육체는 남들과 그리 다르지 않아· 물은 넘치지만, 그 물을 담아야 하는 물병을 종이로 만든 셈이지·”
올가는 재밌지 않냐며 손톱으로 검게 녹아내린 본인의 피부를 지그시 눌렀다·
“상위 신관급 신성력을 소모하게 되면 피부가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이 일어나· 아니, 실제로 몸이 녹아내리고 있지·”
그녀는 이제는 문신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검은 줄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즐거웠어· 내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건 고통 이상의 행복이었지·”
올가는 옛일을 떠올린 듯 바다가 비치는 창밖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더라· 지랄 맞게도 내 고통과 감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어·”
올가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많은 사람을 돌보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돈 많고, 권력이 있는 놈들만 상대하게 됐어·”
그녀는 자신을 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연초에 불을 붙이지 않은 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래서 성녀가 아니라, 양아치처럼 행동하며 내 멋대로 움직였지· 급하지도 않은 돈 많은 놈들을 놔두고, 뒷거리로 가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돌봤지· 손가락을 살짝 베인 귀족을 놔두고, 전쟁터로 가서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신성력을 사용했어·”
올가는 그게 훨씬 좋고 행복했다며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내 힘을 내 의지대로 사용하니, 고통스러워도 참을만하더라· 언젠가부터 나한테 쓰레기 성녀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오히려 난 마음에 들었어· 물론 우리 왕국에서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한 이명이지만·”
그녀는 재밌었다는 듯 손을 가늘게 흔들었다·
“그래서 괜찮아· 이 흉터들은 내 영광의 상처고, 신성력을 조절하면 나름 길게 살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올가는 치료 같은 건 받지 않아도 된다며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잖아·”
라온이 올가의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음? 뭐가 아니라는 거····”
“둘 다·”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네 수명은 많이 남지 않았어·”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가의 문신을 가리켰다·
“네 신성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사용하는 것만으로 몸이 녹아내리는 힘이 계속 쌓이는데, 육체가 버티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어느 순간 붕괴할 수밖에 없어·”
올가는 스스로의 입으로 누구보다도 많은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그녀의 육체는 평범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만이 아니라, 뼈와 근육도 녹아내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치고 싶어도 못 고쳐· 몇 달 누워있지도 못하고 죽게 될 거다·”
“음····”
올가는 본인도 알고 있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다 너 그 상처들도 신경 쓰고 있잖아·”
라온이 옅게 웃으며 올가의 피부 전체를 덮을 듯한 검은 줄을 가리켰다·
“무, 무슨 헛소리야! 전혀 신경 안 써!”
올가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너 여자들을 치료할 때 항상 피부에 상처가 없어야 한다고 하잖아· 이틀 전 렌시아를 치료할 때도 상처를 지워야 한다고 다시 데리고 갔고·”
그녀는 여자의 피부에는 상처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든 흉터를 지워주려고 했다·
그건 올가가 스스로 가지지 못한 고운 피부를 다른 이들에게서 성취하고자 하는 욕심이자, 배려였다·
본인의 피부가 검게 녹아내렸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아픔을 겪게 할 수 있을 텐데, 신성력을 퍼부어서 치료해주는 것을 보면 생각 이상으로 선한 녀석이었다·
“아, 아니라고! 이 멍청이! 바보· 띨구야!”
올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띨구?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라온이 당황한 올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너는 지그하르트로 따라와· 어떻게 해서든 고쳐줄 테니까·”
“하지만····”
올가가 바로 답을 하지 않고, 입술을 깊게 씹었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어· 나를 고치려면 너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거라고····”
올가는 본인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먼저 자신을 생각해주었다· 스스로 성녀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성녀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뭐, 조금 지치기는 하겠지만, 크게 희생할 건 없어· 말했듯이 길잡이가 있으니까·”
지그하르트에는 넝마의 성자 페드릭이 있고, 라스가 길을 알고 있으니, 별문제 없이 올가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꽤 지치기는 하겠지만·
“으윽····”
올가는 이제 할 말이 없는 듯 입술만 달싹였다·
“네가 그렇게 바라는 백옥 피부로····”
“안 바란다고!”
그녀는 아니라고 외치고 병실을 나가버렸다· 속내를 들켜서 많이 창피한 것 같았다·
“남아 있어라· 슈페르로 가지 말고·”
자신의 마지막 말을 들은 후에야 걸음 소리가 난 것을 보니, 올가는 슈페르로 가지 않고 함께 지그하르트로 가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 모양이로군·
‘이번에 큰 도움을 받기도 했고, 저런 녀석은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어서·’
성녀 올가는 앞으로의 전쟁에 있어서 초월자 이상으로 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 장점을 떠나서 사람 대 사람으로 살리고 싶었다·
후우우우욱!
라온이 올가가 살짝 열고 떠난 병실의 문을 보며 웃고 있을 때 허공에서 분홍빛 기류가 음습한 자태로 떨어져 내렸다·
[라스····]
러스트의 농염한 목소리가 귓가를 싸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네가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인간계에 들어온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다른 여자와 너무 가까이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본인과 한 약속이 있지 않냐며 분홍빛 기류 속에서 섬찟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끼아아아아악!
라스는 러스트의 눈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침상 아래로 숨었다·
-저 스토커 어쩔 거야! 벌써 미쳐 있잖느냐!
녀석은 러스트의 <색욕>이 과하게 피어나고 있다며 턱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니라·”
라온은 흥분한 듯한 러스트의 눈을 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본왕이 저 아이를 생각하는 것과 너를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니라·”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다르다? 다르다····]
러스트는 다르다는 말을 되새기며 멍한 눈빛을 띄웠다·
[그렇지· 나는 다르지·]
그녀는 다르다는 말에 만족한 듯 자신의 귓가에 들뜬 숨을 뿌린 후 다시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
라스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대체 다르다는 말이 뭐길래 저 스토커가 만족한 것이냐?
녀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들은 그대로인데?’
-근데 왜 저 스토커가 저런 반응을 하냐고!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듣는 경우가 많거든· 러스트는 다르다는 말을 본인의 원하는 대로 받아들인 거야·’
그래서 만족하고 물러났을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자, 잠깐!
라스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다가 비명을 질렀다·
-그럼 그거 나중에 본왕이 다 감당해야 하는 거잖느냐!
‘···그렇지?’
-그렇지는 지랄! 진짜 미친놈이냐고!
녀석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느니라! 본왕이 어쩌다가 이런 또라이를 만나서!
라스는 만족한 듯 살랑이는 러스트의 기류를 보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오는 법이야·’
-네놈이 못 참게 하잖느냐!
라스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때 병실 밖에서 다급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쿠우웅!
올가가 말을 해주었는지 버렌과 마르타, 루난 그리고 광풍전의 검사들이 동시에 문을 열었다·
다만 먼저 병실에 들어온 건 그들이 아니었다·
“라온·”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글렌이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침상 앞에 섰다·
“괜찮으냐?”
그는 지금도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깊게 내리고 있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럽기는 하지만, 다른 곳은 멀쩡합니다·”
라온은 글렌이 걱정하지 않도록 좋아졌다고 말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음, 다행이군·”
글렌은 자신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슬쩍 눈동자를 내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
라온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글렌을 보며 턱을 살짝 틀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안아주는 모습을 보여줄 때와는 너무 달라져서 또 당황스러웠다·
“커험! 무사하면 됐다· 그럼 이야기 나누거라·”
글렌은 자신의 상태만 확인하러 온 듯 어색하게 몸을 돌려서 병실을 나섰다·
“어? 가주님? 벌써 나오신 겁니까?”
문밖에서 대기하던 로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빨리 나와서 놀란 것 같았다·
“이, 일어난 것을 보았으니, 됐다·”
글렌은 살짝 목소리를 떨면서 로엔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부끄러우신 것 같네·”
마르타가 글렌이 나간 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갑자기 포옹하신 게 부끄러웠던지 우리 얼굴도 잘 못 보시더라고····”
버렌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난 좋았는데?”
루난은 진짜 할아버지랑 만난 것 같아서 좋았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랬군····”
라온은 글렌이 서 있던 바닥을 보며 옅게 웃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이틀 전의 글렌은 너무 감정이 격해졌던 모양이다·
“밖은 어때?”
“정리가 거의 끝났어·”
마르타가 턱을 까딱였다·
“검은 심장이 박혀 있는 사람이 우리 생각보다 많더라고, 다행히 슈페르 신관들이 제거 작업을 도와주어서 전부 지웠지·”
그녀는 흑탑을 무너뜨린 것만이 아니라, 몬티로의 주민들도 구원해주었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행이네·”
슈페르의 신관과 성직자들은 흑탑과의 전투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복구 단계에서도 큰 도움이 되어 주는 것 같았다· 부르기를 잘했고, 와주어서 고마웠다·
“흑탑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듣고, 봉사를 나와준 사람들도 많아· 우리 쪽 중립 세력만이 아니라, 길을 못 잡던 사람들도 많이 와주었어·”
버렌은 휴양지 시절보다 더 많은 활기가 돌고 있다며 밖을 가리켰다·
“이곳이 다시 휴양지로 돌아가도 더 잘 될 것 같아· 무너진 흑탑을 구경할 수 있으니까·”
그는 몬티로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씩 웃었다·
“아···!”
루난이 말할 게 떠올랐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요즘 모든 음식을 다 먹어 치우는 꼬마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녀는 모든 식당의 식재료가 사라진다며 고개를 꾸벅였다·
“아, 맞아· 대륙 전역에서 지원이 오지 않았다면 다들 굶었을걸? 작은 아이가 하루종일 밥과 디저트를 먹어 치운다고 하던데·”
버렌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허흑····”
라온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망할 식충이로구나!
‘글러트니로군····’
자신이 기다려 달라고 했기에 글러트니는 이곳에서 모든 음식을 먹어치우며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빨리 일어나서 녀석을 만나서 돈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마왕들은 하나같이 특이하다니까·’
허공에 있는 러스트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쉴 때 다시 병실의 문이 열리고, 전신을 붕대로 감싼 체임버와 렌시아가 들어왔다·
“라온 님!”
렌시아는 자신을 보자마자 달려와 품에 안겼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쓰러졌다고 들어서 걱정을 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난 지쳐서 기절한 거야· 머리가 살짝 아픈 것뿐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라온이 가늘게 떠는 렌시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머리가 아픈 게 제일 위험한 거야· 나도 그래서 이렇게 요양 중이잖냐·”
체임버가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
“체임버 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겠냐? 죽을 지경이다·”
그녀는 지금도 머리가 깨질 것 같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네가 아니었으면 죽을 지경이 아니라, 정말 죽었겠지· 고맙다·”
체임버는 정말 잘 싸워주었다며 작은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아닙니다· 마지막에 체임버 님이 나서주지 않았으면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거예요·”
진심이다· 자신과 흑탑주 사이에는 아득한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체임버가 죽음을 각오하고 결전기를 사용해주지 않았다면 죽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겸손하시군·”
체임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이명을 받은 사람 같지 않게·”
“그런 이명이라니?”
라온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끔벅였다·
“너한테 새로운 이명이 붙었거든·”
체임버가 입고 물고 있던 사탕을 빼서 검처럼 자신을 겨누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대륙 절대자에 가까운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