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8화
“음?”
라온은 다음 층에 올라가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인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건 바다 향이 피어나는 거대한 해안 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 몰려 있었고, 도시 자체에도 시원한 활력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도시의 시간이 멈춘 듯 사람들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고, 모래사장으로 밀어닥치는 파도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하늘의 구름조차 흐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술수를··· 어?’
라온이 도시를 걸어가다가 눈을 부릅떴다·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이상할 정도로 눈에 익은 건물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몬티로잖아!’
처음부터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감각이 맞았다·
눈앞에 있는 도시는 자신이 거의 2달 동안 살았던 몬티로였다·
“모, 몬티로?”
“지랄! 왜 몬티로가 여기에 있어!”
“아····”
버렌과 마르타, 루난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몬티로의 광경에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몬티로가 맞아· 내가 저 숙소에서 살았으니까·”
트레빈이 우측에 있는 여관을 가리키며 헛바람을 흘렸다·
“실제 몬티로는 아니겠지만, 몬티로의 겉을 그대로 베껴 온 건 맞는 것 같아요·”
지도로 몬티로를 보았던 제이나는 실제와 똑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시간이 멈춰있는 거지····”
마크 괴튼이 빈 의자에 올라가 있는 갈매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간 선이 달라진 듯 그의 손가락은 갈매기를 만지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했다·
“짜증나게! 왜 자꾸 지저분한 수수께끼가 나오는 건데!”
마르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대놓고 시간을 끌겠다는 뜻이지·”
버렌이 답답한 듯 입술을 씹었다·
“대, 대체 무슨 마법을 준비하는 걸까요?”
도리안이 위를 올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몬티로 내부로 들어갔다·
멈춰있는 도시를 걸으며 주변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분수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잠깐·”
분수대로 걸어가는 검사들을 멈춰 세우고서 우측에 있는 아이스크림 매장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뭐라도 찾았어?”
버렌과 마르타가 어서 말을 해달라는 듯 바로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서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 안에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본 사람이야·”
“봤다고?”
“그래· 그것도 오늘·”
렌시아를 돌보며 주변을 계속 살피고 있었기에 알 수 있다·
저 남자는 <어둠을 깨우는 등불> 작전이 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아이스크림을 사던 사람이었다·
“그럼 혹시····”
라온이 아이스크림 매장을 벗어나 분수대로 달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렌시아가 분수대 앞에서 홀로 굳어 있었다·
“렌시아····”
렌시아가 고통을 참는 듯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작전을 실행한 후의 시간대인 것 같았다·
“분수대 옆에 있는 저 가족도 아까 본 사람들이야!”
마르타도 오늘 본 사람들이 저쪽에 있다며 턱을 떨었다·
“내가 구한 꼬마····”
루난은 분수대에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를 보호했다며 고개를 꾸벅였다·
“아무래도····”
라온이 멈춰버린 하늘을 바라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어둠을 깨우는 등불> 작전을 실행한 후 마인들이 습격을 해오기 바로 직전의 상황인 것 같아·”
지금 이 멈춰버린 세계는 결계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한 마인들이 오망성의 아티팩트를 심어둔 곳으로 움직이던 시기인 것 같았다·
다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였지만, 자신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라온이 탁해진 숨을 내뱉으며 땅을 박찼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좌측 상단으로 이동하여 도리안과 크레인이 지켰던 다섯 영웅의 동상 앞으로 향했다·
도리안과 크레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동상 아래에 있는 아티팩트와 이쪽으로 다가오는 영마술사 포레슨의 기척은 느낄 수 있었다·
스으으으윽!
라온이 제천검으로 포레슨의 목을 베었지만, 놈은 죽지 않았다·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검이 놈을 통과할 뿐이었다·
-물리적으로 네놈을 막기가 힘드니,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려는 것 같구나·
라스는 시간이 많이 끌릴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수도 있어·’
라온이 입맛을 다시고서 반대편인 우측 상단으로 이동했다·
‘모렐 카잔은 있군·’
도리안, 크레인과 달리 카룬과 함께 떠난 모렐 카잔과 그의 수하들은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면 답이 나왔네·’
라온은 고요한 눈동자로 멈춰있는 모렐 카잔을 바라보았다·
-답이 나왔다고? 수수께끼를 벌써 푼 것이냐?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분수대 앞으로 돌아갔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으십니까?”
버렌이 앞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 말했던 대로····”
라온이 굳어 있는 분수대의 물에 손을 뻗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곳은 우리가 <어둠을 깨우는 등불>을 발동시키고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야· 마인들이 아티팩트를 부수려고 움직이던 순간이지·”
“아, 그러면····”
제이나가 이제 알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요· 그 상황을 똑같이 만들면 됩니다·”
라온이 루난과 마르타를 분수대 앞으로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본래 있던 장소로 가줘·”
작전을 실행할 때 있던 방향으로 가달라고 말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모렐 카잔 님이 없잖아·”
트레빈이 모렐은 어떻게 하냐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이미 이곳에 있어· 우리만 자리를 잡으면 돼·”
모렐 카잔이 이곳에 있는 것을 확인했기에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이었다· 광풍전 검사들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 세계도 움직일 것이다·
“전력으로 달려가·”
라온은 최대한 빨리 움직이라고 외치며 광풍전 검사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저, 저희는 어떻게····”
제이나와 마법사들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당시에 본부에 계셨으니, 이곳에서 대기해주세요·”
라온은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말해준 후 렌시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지지지직!
몇 분이 지나자 허공에 검은 균열이 그어지더니, 멈춰 있던 세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광풍전 검사들이 모두 자리를 잡아서 이 층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 같았다·
-정말 그게 정답이었군·
라스가 놀랍다는 듯 손뼉을 쳤다·
“됐어····”
루난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하여튼 우리 전주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간다니까!”
마르타가 잘 했다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정말이니라· 다른 건 몰라도 잔대가리 하나는 차원 제일이야·
라스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안 끝났어·”
라온이 주변을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아직 이 층의 층주를 죽이지는 못했다· 놈을 죽여야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 있지?’
층주를 찾기 위해서 기감을 펼치려고 할 때 갑자기 분수대 아래에서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출구가 솟아올랐다·
“출구?”
“층주를 안 잡아도 되는 건가?”
루난과 마르타가 신기하다며 다가오려고 하는데, 두 사람은 분수대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시간이 멈췄을 때처럼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았다·
“뭐지?”
라온이 루난과 마르타에게 손을 뻗었지만, 두 사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반면 옆에 있는 제이나는 아무런 간섭 없이 만질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라온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을 때 밑에서 죽었던 칼롭과 펠릭스가 튀어나와서 루난과 마르타에게 돌진해왔다·
“죽은 놈들이 왜 나와!”
“똑같아····”
마르타와 루난은 칼롭과 펠릭스의 공격을 막으며 눈매를 찌푸렸다· 밑에서 싸울 때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만이 아니니라·
라스가 우측과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곳에 간 놈들도 같은 놈에게 습격 받고 있느니라·
녀석은 작전을 수행할 때와 똑같이 마인들이 공격을 해오고 있다며 턱을 내렸다·
‘층주를 찾아야 하는데····’
라온이 기감을 펼쳐보았지만, 층주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가!”
층주를 찾기 위해서 기감을 더 넓게 뻗어내고 있을 때 루난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는 우리가·”
그녀는 이곳을 맡기고 먼저 올라가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 오늘 처음으로 말 잘했다!”
마르타가 펠릭스의 창을 밀어내며 씩 웃었다·
“기다릴 시간 없잖아! 먼저 가! 여기에 숨어 있는 두더지는 우리가 목을 뽑아낼 테니까!”
그녀도 루난처럼 다음 층으로 올라가라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
외부에서 싸울 때와 달리 지금 이곳은 흑탑의 내부다·
이곳의 층주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주님 가십시오!”
“이런 때를 위해서 그 지랄맞은 수련을 시키신 거잖습니까!”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광풍전 검사들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본인들을 믿으라고 말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쿠와아아아아아!
다른 이들도 같은 마음인지 아티팩트가 있는 방향에서 장대한 검기들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알겠다· 그럼····”
라온은 신뢰가 어린 눈동자로 광풍전 검사들을 바라보았다·
“늦지 않게 따라오도록·”
어떻게 해서든 쫓아오라는 말을 남긴 후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저, 정말 가는 거예요?”
제이나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기가 강화된 상층의 층주라면 저들 모두를 죽일 수도 있을 거라구요!”
그녀는 흩어져 있는 게 불안하다는 듯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적이 원하는 게 그겁니다· 제가 남아서 시간을 소모하는 것·”
초월자인 자신까지 묶어두려면 너무도 많은 마기가 소모되기에 이곳의 층주는 선택지를 주어서 자신은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게 분명했다·
“그건 저도 알지만, 남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놈도 모를 겁니다· 제가 키운 검사들의 신념과 의지를·”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가는 웃음을 흘렸다·
“저들은 절대 제 믿음을 배신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 역시·”
라온은 자신을 믿어주는 수하들의 위해서 거침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 * *
체임버는 검게 번들거리는 흑탑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잘하고 있겠지?’
라온과 카룬은 둘 다 초월의 초입을 벗어났다· 마기가 지독한 탑 내부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최상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흑탑은 무력의 강함 이상으로 추한 술수를 많이 부리는 놈들이다· 초월자라고 해도 많은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카룬은 그렇다 치고, 라온이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이야·’
라온을 처음 본 건 육황 회의다· 처음에는 얼굴만 잘난 꼬마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초월에 올라서 흑탑 섬멸 작전의 선봉에 서다니, 솔직히 지금도 믿기지가 않았다·
‘더 대단한 건····’
지금이 아니라, 미래지만·
라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초월자의 상위에 올라 있는 자신도 라온이 어디까지 강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정말 희극제나 마창회주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체임버는 전쟁 이후의 라온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헌데 살아남는다라····’
미래를 생각하다 보니, 흑탑주가 떠올라서 갑자기 속이 거북해졌다·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자신이 억제를 하고 있음에도 이 차원의 마기는 뚝이 부서진 강물처럼 흑탑의 최상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기가 응집될수록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후우····”
체임버가 대량의 마기를 다른 차원으로 잘라버리며 입술을 씹었다·
“부탁한다· 최대한 빨리 놈에게 닿아줘·”
* * *
라온은 광풍전 검사들과 떨어진 후 다섯 개의 층을 더 돌파했다·
밟을 게 없는 하늘 위에서 날개가 달려 있는 상위 층주와 싸우기도 했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암살자와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아무리 자신이 초월자라고 해도 적의 안방에서 싸우기에 어려운 승부를 냈어야 했지만, 강화된 기운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상위 층주들을 베고 빠르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초월자가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압도적일 줄은····”
제이나는 상위 층주를 연달아 베어버린 자신의 무력에 경악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힘만은 아닙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손을 내렸다· 층을 올라갈수록 자신의 기운 역시 증폭되고 있었다· 마인들 이상으로 강해졌기에 시간 소모 없이 마인들을 베고 올라갈 수 있었다·
‘사실 마인들을 벤 것보다는 지금까지 알아낸 게 더 중요하지·’
다음 층으로 올라가려면 그 층의 층주를 죽이거나, 층주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층이어도 어딘가에는 층주가 숨어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기에 놈을 찾아내야 했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마기 덕분에 증폭된 힘과 조금씩 쌓인 정보를 이용하여 지금까지는 큰 문제 없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제 곧 끝일 텐데····’
자신의 계산으로 이제 최상층까지 몇 층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어서 끝에 닿기를 바라며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련장처럼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뭐지 여긴?’
자신이 올라온 입구 좌측에 다른 입구가 하나 있었고, 반대편 벽에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출구가 보였다· 다만 열 수 없도록 아주 꽉 닫혀 있었다·
‘층주는····’
역시 느껴지지 않는군·
이 층의 층주도 흑탑의 특성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듯 어디에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이곳의 층주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순간에 나타날 것 같았다·
“흠·”
라온이 눈매를 찌푸리며 출구를 향해 제천검을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엉!
마기로 증폭된 힘을 전력으로 끌어냈지만, 문에는 작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벽을 쳐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로와 달리 응축된 마기로 만들어서 부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라온이 팔짱을 낀 채로 눈매를 찌푸리고 있을 때 자신이 올라온 입구 옆에서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익숙한 걸음 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왼쪽 입구에서 카룬이 걸어 나왔다· 그는 초월자답게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전주?”
카룬도 자신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에 놀란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누가 마인 아니랄까 봐····”
라온이 꽉 닫혀 있는 출구와 대련장 같은 공간을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성격 한번 더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