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7화
‘진짜 마족이라····’
라온이 기괴한 분위기의 마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느껴지는 게 다르네·’
눈앞의 마족처럼 특이한 외형을 지닌 마인은 많지만, 저 정도로 강한 마기를 지닌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급 마기야·’
마족이 감추고 있는 기운을 드러내면 이전에 만났던 창염마군 오르고스보다도 강할 것 같았다·
-다만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느니라·
라스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애매한 부분?’
-저놈은 분명한 고위 마족이지만, 신기하게도 마계의 냄새가 그리 강하지 않느니라·
녀석은 저 마족이 인간처럼 이 땅에서 태어난 것 같다며 눈매를 좁혔다·
“내가 처리할까?”
마르타가 검을 말아쥔 채 자신의 옆에 섰다·
“아니· 물러나 있어·”
라온이 마르타를 뒤로 물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놈은 위험해·”
지금 저 마족이 지닌 마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놈이 숨기고 있는 마기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아무리 적게 보아도 창염마군 오르고스 급· 이곳에서 저 마족을 이길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인간·”
마족은 광풍전의 검사들과, 발카르의 마법사들을 쭉 둘러본 후 다시 라온을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이냐·”
그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굽혔다·
“무슨 의미지?”
라온이 마족에게 한발 다가가며 턱을 내렸다·
“네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리 멀지 않다· 꼭····”
마족은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 검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시간을 끌려는 거라면 사양이다·”
라온이 제천검을 세워서 마족의 목을 겨누었다·
“이쪽은 시간이 없어· 비켜줘야겠다·”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강한 상대와 싸우게 되었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적이 누구든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
마족이 고민을 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탄 것처럼 새까만 팔을 내렸다·
“본래라면 나는 이곳에서 죽어야 하지만, 조금 지켜보고 싶군·”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검은 날개를 펼쳤다·
파아아아앙!
마족은 거대한 날개 속에 본인의 몸을 말아 넣은 채 검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버렌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라온한테 쫄았나?
마르타가 라온의 위아래를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바보···?”
루난도 이상하다며 눈을 끔벅였다·
“화장실이 급했을지도요· 저도 가끔 저래서····”
도리안이 뭔가 공감된다는 듯 두 손을 비볐다·
‘라스·’
라온이 마족이 사라진 허공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방금 저 마족이 널 본 건가?’
-다른 마왕 놈들도 모르는 걸 저딴 놈이 어떻게 알겠느냐· 이곳의 마기에 공명하는 본왕의 기운을 느꼈겠지·
라스는 눈치 하나는 빠른 마족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네 기운을 느꼈다면 굽혀야 하는 거 아니야?’
-싸움에 미친 발록과 달리 마족이라는 놈들은 인간처럼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지니고 있느니라· 본왕을 보고도 굽히지 않고 덤비거나,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것도 흔하지·
녀석은 마족 역시 인간처럼 여러 종류가 있다며 손을 저었다·
-방금 그놈도 도망친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느니라·
라스는 방심하지 말라며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쿠구구구구구!
마족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놈이 서 있던 바닥에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솟아올랐다·
“올라가자·”
라온이 새롭게 솟아오른 문으로 걸어가며 마기가 어린 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이 앞의 길이 호랑이의 아가리 안이라고 해도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 * *
카룬은 눈앞에 서 있는 금발의 여성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천사라니····’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문처럼 눈앞에 선 금발 여성의 등에는 하얀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가 돋아나 있었고, 머리 위에는 금빛의 관까지 쓰고 있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천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군·’
천사는 다른 마인들과 달리 성스러운 기운을 두른 채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따스해서 전장이 아니라, 성당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천사도 좋은 놈들은 아니지만·’
데루스 로베르트가 대천사를 소환한 이상 마족만이 아니라, 천사들도 적과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흑탑 안에 있는 천사를 믿을 수는 없었다·
“힘든 싸움을 치르고 오셨군요·”
천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곳에서는 편히 쉬셔도 됩니다· 누구도 당신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이곳에서 함께 있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누구냐·”
모렐 카잔이 앞으로 나오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제 이름은 페리도트· 여러분을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운명?”
카룬이 페리도트를 보며 눈썹을 내렸다·
“예· 이 위로 올라가시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죽게 될 겁니다·”
페리도트는 모두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왔다며 손을 내렸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났다·
“으음····”
모렐 카잔은 페리도트의 미소에 정신을 차리기 힘든 듯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을 떨었다·
“페리도트 님····”
“저분이 저렇게 말씀하신다면 멈추는 게 맞겠지·”
“전주님· 여기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맞아요· 광풍전주에게 맡기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죠?”
정신력이 뛰어난 중무전의 검사들마저도 페리도트의 미소에 홀린 듯 그만 싸우자며 검을 내렸다·
“내가 죽는다고 했나?”
카룬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무시한 채 페리도트의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만이 아닙니다· 카룬 님·”
페리도트가 두 손을 모은 채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이곳에 계신 모두가 이 탑의 최상층에서 죽게 될 겁니다·”
그녀는 그런 지옥은 보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난 죽는 게 두렵다· 언제나 전장이 무서웠지·”
카룬이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죽어서 지그하르트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이깟 목숨은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다·”
그는 어금니를 깊게 씹으며 페리도트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퍼어어어어억!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리며 페리도트의 머리가 떨어지고, 비단처럼 고운 목에서 금빛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천사가 길을 막으면 천사를 죽이고, 신이 길을 막으면 신을 베어서라도 올라가겠다·”
카룬이 뺨에 묻은 천사의 피를 훔치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아····”
“저, 전주님!”
“지금 우리가 뭘····”
페리도트의 죽음에 중무전 검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떴다·
“됐으니, 다시 올라가····”
카룬이 중무전 검사들에게 손짓할 때였다·
후우우욱·
죽은 페리도트의 몸에서 새하얀 기류가 올라오더니,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그녀의 몸이 죽기 전으로 회복되었다·
“듣던 것보다 거침이 없으시군요·”
페리도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하얀빛이 되어 사라졌다·
쿠구구구구!
천사가 완전히 사라지자, 땅에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후회라····”
카룬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후회는 남기지 않는다·”
그는 페리도트의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 * *
라온은 다음 층에 닿으며 주먹을 쥐었다·
‘또 강해졌어·’
상층의 마기와 마주치자, 자신의 기운 역시 중층에 있을 때보다 한층 더 강해졌다· 아무래도 자신은 흑탑의 마인들보다 더 이곳의 마기를 더 잘 이용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젠장!
라스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된 놈이 가는 곳마다 보상을 얻는 건데!
녀석은 왜 이렇게 운이 좋냐며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근데····’
라온이 난동을 부리는 라스의 팔을 치며 뒤편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렇다 치고, 광풍전은 왜 멀쩡하지?’
상층의 마기는 중층보다 배 이상 지독하다· 공기보다 마기가 더 짙게 느껴질 정도인데, 광풍전의 검사들은 밑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잖아·’
반면 광풍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철전대와 발카르의 마법사들은 마기를 이겨내느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본왕과 함께 있었으니 당연하지·
라스가 뭘 묻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본왕과 네놈이 함께한 시간만큼은 아니지만, 저 아이들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분노에 노출되어 있었느니라· 영향이 크지는 않아도 조금씩은 분노에 물들었을 테니, 이 정도 마기는 버티는 게 맞느니라·
녀석은 본인이 노출한 분노가 저들을 지켜주고 있다며 턱을 치켜들었다·
-거기다 본왕이 목숨을 살려준 녀석들은 이 마기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야·
‘그렇네·’
라스의 말을 들으니, 광풍전 검사들이 마기에서 잘 버티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자신처럼 분노에 노출되었기에 마기를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광풍전 검사들이 나름 활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가벼워진 발걸음만큼 빠르게 계단을 밟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천장에 닿아 있는 거대한 석벽이 보였다·
‘넓어·’
중층과 달리 굉장히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두터운 벽으로 막혀 있었다· 상층의 첫 번째 공간은 미로인 것 같았다·
“하! 이런 게 가능해?”
마르타는 밑층과는 아예 공간감이 달라진 미로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흑탑의 상층은 아예 다른 세계라고 들었어· 미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버렌은 흑탑의 상층은 이해와 논리를 벗어난 공간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단해····”
루난은 미로의 벽을 매만지며 짧게 혀를 찼다·
“내가 해보지·”
트레빈이 앞으로 나서며 미로의 벽을 향해 전력의 강환을 내리쳤다·
쿠와아아아아앙!
강렬한 충격이 터졌지만, 미로의 벽에는 금 하나 그어지지 않았다· 흑탑의 외벽 정도는 아니지만, 굉장히 단단한 것 같았다·
“대놓고 시간을 끌겠다?”
라온이 미로의 벽을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다·
“이러면 좀 열받는데?”
마족이 시간을 끌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인지 바로 미로를 열어서 시간을 끌려는 것 같았다· 자신들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저희가 나설 때네요·”
제이나가 미로의 입구에 서서 지팡이를 뻗었다·
“마법 중에는 미로에서 길을 찾는 마법도 있어요· 배우기만 하고 잊었는데, 드디어 쓸 일이 생겼네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미로에서 길을 찾는 마법을 영창했다·
우우우우웅!
제이나의 지팡이의 끝에서 피어나는 붉은 빛이 미로 전체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그 빛은 미로의 중간을 뚫어내지도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무슨 일이야?”
마르타가 눈매를 찌푸린 채 제이나에게 다가갔다·
“마, 마기 때문에 마나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아요·”
제이나는 상층에 존재하는 마기가 마법의 운용을 방해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네·”
마르타가 제이나를 굽어보며 혀를 찼다·
“이익!”
제이나가 분한 듯 어깨를 세웠지만, 할 말이 없는 듯 입술만 깨물었다·
“그렇게 말할 게 아니야· 실제로 마기가 짙은 건 사실이니까·”
버렌이 미로 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얼음을 보내도 많은 시간이 걸릴 거야· 너무 넓어····”
루난은 바닥을 얼려서 길을 찾는 방법도 힘들 것 같다며 손을 내렸다·
“마법을 사용하든, 오러를 사용하든 결국 들어가서 직접 풀어야 한다는 건가·”
마크 괴튼이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빨리라도 들어가는 게 좋겠군요·”
“아뇨·”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늦어요·”
체임버가 막고 있다고 해도 이 미로에서 길을 찾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이 미로를 최대한 빨리 통과해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트레빈이 방법이 있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있습니다· 아주 무식한 방법이·”
라온이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제천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쿠와아아아아아앙!
검극에서 피어나는 묵직한 검격이 눈앞의 벽만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미로의 벽들마저 깨부숴버렸다·
“이, 이걸 부순다고?”
트레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강환에도 금조차 안 갔는데?”
그는 무너진 벽을 살피며 턱을 떨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출구의 위치는 보이니까· 이대로 가지·”
라온이 부서진 벽을 넘어서 다시 검을 내리긋자, 두터운 미로의 벽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버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야! 너 위에서 싸워야 하는데 힘을 너무 썼잖아!”
마르타도 이후의 싸움을 위해서 힘을 아끼라며 길을 막아섰다·
“응· 아껴····”
루난 역시 물러서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걱정 안 해도 돼· 힘은 별로 소모하지 않았으니까·”
라온이 제천검에 어린 옅은 오러를 가리키며 웃었다·
“마기를 조금 이용한 거야·”
흑탑의 외벽처럼 수십 년 동안 마기가 응축된 게 아니었기에 미로의 벽 정도는 어렵지 않게 베어낼 수 있었다·
쿠와아아아앙!
라온은 결국 미로의 벽을 모조리 부수고 다음 층에 오를 수 있는 출구에 닿았다·
-미로를 힘으로 부수는 놈은 또 처음이네·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놈이었다면 힘이 다 빠졌을 텐데, 하필 마기라니·
녀석은 이 미로의 주인은 운도 없다며 혀를 찼다·
“이 정도로 부쉈으면 이제 힘이 좀 빠졌겠군·”
라온이 다음 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출구의 뒤편에서 회색 갑주를 두른 마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밑에서 만난 마족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본 마인 중 가장 강한 기파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상층의 층주 카부르····”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는 마인의 콧대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아니, 콧대만이 아니다· 그의 몸 전체가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어? 어어억!”
마인이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를 부여잡았지만, 전신이 갈라진 상처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붉은 핏물이 뿜어지며 그의 몸이 반으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마인은 결국 본인의 이름을 다 말하지도 못한 채 본인의 미로 속에 가라앉았다·
“미안하지만, 잡졸과 놀아줄 시간은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너희 탑주뿐이다·”
라온은 피가 묻은 검을 털어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
광풍전의 검사들과 발카르의 마법사들은 라온의 무력에 경악한 듯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스으으으·
모두가 떠난 미로 속에 남은 건 주인의 핏물이 흘러내는 섬뜩한 물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