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2화
“흐으으으음····”
크레인이 바닥의 돌을 걷어차며 앓아누운 듯한 신음을 흘렸다·
“너무 불안한데····”
그는 다섯 영웅의 동상 뒤에 숨겨둔 은빛 구슬을 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야· 넌 괜찮아?”
크레인은 동상에 등을 기대고 있는 도리안을 보며 턱을 까딱였다·
“평소랑 다르게 왜 무게를 잡고 있냐?”
그는 당황스럽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괜찮을 리가 있나····”
도리안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토할 거 같아· 먹은 음식이 아니라,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고····”
그는 손뿐만이 아니라, 팔 전체를 떨면서 코를 훌쩍였다·
“대주· 아니, 전주님은 왜 우리한테 여길 맡긴 거지?”
도리안은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며 눈을 내리감았다·
“···우리를 믿으니까· 맡겼겠지·”
크레인이 하늘을 올려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중요한 곳에 보내지 않았을 거야·”
그는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렇겠지·”
도리안도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떨림은 점차 온몸으로 번져 갔다·
“안정제를 다섯 개나 먹었는데도 부족한가 봐· 떨림이 안 멈춰····”
그가 본인의 뺨을 치고서 안정제를 하나 더 꺼내려고 할 때였다·
우우우우우·
주변에 있는 건물들의 그림자가 진해지며 등골이 오싹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왔다!”
크레인이 입술을 꾹 내리누르며 앞으로 나섰다·
“조심해····”
도리안이 크레인에게 경고를 하며 동상에서 등을 뗐다· 검병에 올린 그의 손가락이 안쓰러울 정도로 흔들렸다·
화아아아아!
두 사람이 동상의 앞에 서자, 검은 물감을 뿌린 듯 하늘과 땅 그리고 건물들이 어둑한 빛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밤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데!”
동상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트드드득!
새까만 어둠이 모든 공간을 채웠을 때 둔탁한 지팡이 소리와 함께 검은 로브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걸어왔다·
“저 노인은····”
도리안이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눈썹을 내렸다·
“몰라? 네가 지금까지 등을 기대고 있던 동상에 있는 놈이잖아·”
크레인이 뒤에 있는 동상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노인의 얼굴은 다섯 영웅의 동상 중 우측 끝에 있는 마법사와 똑같았다·
“영마술사 포레슨이라는 이름이었지·”
크레인은 노인의 이명과 이름을 말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젊은 친구들이 나를 알아봐 주니 기쁘군·”
영마술사 포레슨이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하얀 수염을 쓸어내렸다·
“동상 뒤에 있는 구슬만 넘겨준다면 너희들은 건드리지 않으마·”
그는 양보를 해주겠다고 말하며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크레인이 턱을 모로 튼 채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렇게 인자한 놈이었다면 고통 받는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겠지·”
그는 포레슨을 자극하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안타깝구나·”
포레슨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벌주는 너나 처마셔· 악당 새끼들은 왜 다 똑같은 말만 지껄이는지 모르겠다니까· 어디 악당 학교라도 다니는 거야?”
크레인은 천편일률적이라고 말하며 혀를 찼다·
“버릇이 없구나·”
포레슨은 진심으로 분노한 듯 이마의 주름 사이로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믿고 있다면 후회하게 될 게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무슨 주변!”
“다 보인다네· 자네들의 기질이 모두 비슷하든 게· 같은 가문에서 자랐다는 뜻이겠지·”
그는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네·”
크레인이 발을 구르며 이를 갈았다·
“들켰어! 싸울 준비나 해!”
그가 손짓하자, 관광객과 주민으로 위장을 하고 있던 광풍전 검사들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지그하르트였군·”
포레슨은 광풍전 검사들의 검과 제복을 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이 마스터라는 건 분명한 강점이지만, 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야·”
그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자, 대지를 물들이고 있던 어둠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구!
수십· 아니, 수백이 넘는 그림자의 마물들이 새빨간 눈동자를 번뜩이며 솟아올랐다·
‘강하군·’
크레인이 포레슨이 소환한 그림자의 마물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하나하나가 대형 몬스터 급 이상이야·’
물론 상대하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렵겠지만·
이미 공략법이 다 나온 몬스터와 달리 저 그림자 마물은 아예 정보가 없는 놈들이다· 강하고, 날렵할 게 뻔하기에 마스터라고 해도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개진! 높바람의 형태로!”
크레인의 지시에 광풍전 검사들이 다섯 영웅의 동상 앞에서 소광풍진을 세웠다·
“지키는 싸움을 하겠다는 건가?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포레슨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지팡이를 내리치자, 그가 소환한 그림자의 마물들이 동시에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쿠오오오오오!
그림자의 마물들은 동상 바로 앞에서 튀어나와 광풍전 검사들의 목을 향해 날카롭게 갈린 이를 드러냈다·
촤아아아아악!
광풍전 검사들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검격을 내리쳤다·
그림자의 마물들은 바람의 기운이 담긴 검격을 견디지 못하고, 검은 안개가 되어 녹아내렸다·
“흥!”
포레슨이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지팡이를 까딱이자, 바람의 칼날에 베여나갔던 마물들이 되살아나 다시 새까만 아가리를 벌렸다·
“다시 죽이면 그만이야!”
크레인 역시 당황하지 않고 되살아난 그림자의 마물들을 베어버렸다·
“이건 어떨까·”
포레슨이 손끝을 세우자, 지팡이의 끝에서 응집된 검은 마기가 동상을 향해 쏘아졌다·
투우우우웅!
어둠 마법이 영웅의 동상과 은빛 구슬을 동시에 지워버리려고 할 때 검진 속에서 도리안이 튀어나왔다·
그는 검사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마기로 달려들며 검을 내리쳤다·
촤아아아아악!
도리안의 통찰력이 깃든 검격이 어둠 마법의 중심을 가르며 마기의 폭발마저 가라앉혔다·
“흐어억····”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지친 듯 손을 떨며 입에서 침을 흘렸다·
“잘했어!”
크레인은 버틴 것만으로 용하다고 말하며 도리안의 등을 쳐주었다·
“입을 털 만한 실력은 있구나· 그래도 의미는 없지만·”
포레슨이 눈매를 찌푸리며 다시 마물들을 되살려 광풍전을 압박했다·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지!”
크레인은 얼마든지 오라고 말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좋다· 너희들의 끝을 보여주마·”
포레슨의 마기가 폭발하고, 광풍전 검사들의 검격이 번뜩이며 두 세력의 소모전이 시작되었다·
* * *
“음····”
포레슨은 필사적으로 구슬을 지켜내는 광풍전 검사들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생각보다 더 시간이 걸리는군·’
10분 정도면 광풍전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 어린 놈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조하며 마물들의 돌진과 자신의 마법을 모두 막아냈다·
지닌 무력 이상으로 정신력과 체력 그리고 실전 경험이 뛰어났다·
‘구슬에 담겨 있는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건가·’
현재 저들이 지키는 아티팩트는 이 몬티로의 결계를 지워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무래도 결계가 깨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
몬티로의 결계가 깨진다면 많은 것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자신이 직접 움직여서라도 저 구슬만큼은 제거해야 했다·
터억!
포레슨이 고개를 젓고서 지팡이로 땅을 쳤다· 그의 주변을 휘감은 마기가 점점 더 짙어지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을 펼쳐냈다·
“집중해! 버티기만 해도 우리가 이겨!”
크레인은 절대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외치며 검사들을 격려했다·
“으으····”
반면 도리안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느낀 듯 손만이 아니라, 다리까지 떨었다·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겠군·’
포레슨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광풍전 검사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저놈들이 날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칠흑 결계를 펼친 상대에서 자신의 약점은 오직 한 곳뿐이다·
아니, 약점을 찌르기는커녕 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을 테니, 저 구슬을 깨는 건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다·
‘흥·’
포레슨은 볼이 빵빵한 녹색 머리카락의 검사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가장 강한 놈이 저 꼴이라니, 이미 끝난 싸움이야·’
자신의 마기를 막아내는 실력 자체는 괜찮았지만, 너무 겁을 먹어서 계속 반응이 느렸다·
저렇게 한심한 놈은 처음이었다·
스으으으으!
포레슨이 어둠을 타고 이동하여 동상으로 뒤편으로 파고들었다·
광풍전 검사들이 마물들을 베는 틈을 타 땅에 묻혀 있는 은빛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우우욱!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은빛 구슬을 부수려는 순간 푸른 빛을 띤 칼날이 자신의 육체를 파고 들어왔다·
‘날 알아차린 건 대단하지만, 그런 걸로는 베이지 않··· 커헉!’
포레슨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채 검은 피를 토했다· 그는 본인의 좌측 무릎 위를 뚫고 들어온 검을 보며 탁한 신음을 토했다·
“이게 뭐····”
이 상태에서 자신의 유일한 약점은 왼쪽 무릎 위의 허벅지다·
드래곤의 역린처럼· 작디작은 부위를 대체 어떻게 알고 찔렀는지 모르겠다·
“기,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광풍전 검사 중 가장 강하지만, 가장 겁을 많이 냈던 녹색 머리의 검사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네, 네놈 처음부터 연기를····”
포레슨은 도리안의 연기에 당했다고 생각한 듯 경악 어린 시선을 드러낸 채 쓰러졌다· 그의 육체가 새까만 마기 속으로 가라앉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후우우우욱!
포레슨이 죽자 그림자의 마물들도 힘을 잃고 검은 안개가 되어 녹아내렸다·
“허어억····”
도리안이 길게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야! 너 뭘 한 거야!”
크레인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리안에게 다가갔다·
“도리안!”
“정말 네가 그 영감을 죽인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다른 광풍전 검사들도 놀랍다고 외치며 도리안의 앞으로 달려갔다·
“이, 읽었어····”
도리안이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처럼 저놈도 초조해하더라고·”
라온의 지옥 훈련을 버틴 효과가 있는 듯 포레슨은 자신들이 지치지 않는 것에 당황하여 본인이 직접 움직일 생각을 했다·
그걸 파악하자마자, 심안을 최대치로 운용하며 놈의 심리를 읽었다·
사라진 포레슨이 나타날 위치는 당연히 구슬 앞이었고,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인간의 약점인 목과 머리, 심장이 아니라, 어떻게든 보호하려던 왼쪽 무릎 한 뼘 위의 허벅지를 찔러서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럼 정말 연기를 한 거야?”
“연기는 개뿔····”
도리안이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짜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봐! 지금도 떨리잖아!”
그는 아직도 흔들리는 손과 다리를 가리켰다·
“그런데 어떻게?”
“렌시아를 봤으니까·”
도리안이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아이를 보고도 움직이지 못한다며 검을 들 자격도 없어·”
그는 그게 자신을 움직이게 한 전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도리안 폼 좀 나는데?”
크레인이 씩 웃으며 도리안의 어깨를 꽉 잡았다·
“지금 보니 너 상인보다 검사가 어울릴지도?”
“난 처음부터 검사였어·”
“어? 보급관 아니었어?”
“기분이 좋은데, 나쁘다····”
* * *
치이이이익!
루난과 마르타가 바닥을 구르며 뒤로 밀려났다·
“뭐야! 저놈들 더 강해진 거야?”
마르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를 갈았다·
“응····”
루난이 검끝에서 타오르는 마기를 보며 고개를 꾸벅였다·
“확실히 강해졌어····”
작은 깨달음을 얻고, 벽을 부수려고 할 때 칼롭과 펠릭스는 한층 더 강해진 마기를 일으켜서 자신들을 힘으로 짓눌러버렸다·
아무래도 지금 보여주는 무력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이번에는 꽤 위험했군·”
칼롭은 루난에게 당한 가슴의 상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심을 하지 않았는데도 당할 뻔했습니다·”
펠릭스가 창대에 새겨진 검흔을 살피며 눈매를 찌푸렸다·
“저희의 예상보다 강하지만, 진정으로 주의해야 할 건 실전 경험입니다· 언제 더 성장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입니다·”
그가 눈빛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어·”
“네· 그럼 저도 그렇게 가겠습니다·”
펠릭스는 손아귀에 쥔 창으로 렌시아를 겨누며 자세를 낮췄다·
“그렇게라····”
칼롭은 펠릭스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 사려라·”
마르타가 혀를 차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부터가 진짜인 것 같으니까·”
“알아····”
루난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분수 주변으로 서리의 꽃을 피워냈다·
“지금부터는 너희가 원하는 대로 악당이 되어주지·”
칼롭이 마기를 전신에 두른 채 서리를 뚫고 우측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렌시아의 머리를 향해 대검을 내리쳤다·
치이이이잉!
펠릭스 역시 좌측으로 보법을 밟고 들어와서 마기가 일렁거리는 창대를 휘돌렸다·
그의 창날이 노리는 상대 역시 렌시아였다·
쩌저저저정!
마르타와 루난은 다급하게 보법을 밟고 나아가 칼롭의 검과 펠릭스의 창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듯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펠릭스와 칼롭은 렌시아를 노리는 검과 창을 돌릴 생각이 없는 듯 점점 더 짙은 마기를 뿜어내며 압박을 강화했다·
“누가 마인들 아니랄까 봐 추잡하게 나오네! 애를 노리고 싶냐!”
마르타가 펠릭스의 창대를 밀어내며 이를 갈았다·
“더러운 냄새가 나····”
루난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칼롭의 마기를 차단하기 위한 서리의 벽을 세웠다·
“나름 마기를 막아내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해도 모든 것을 지킬 수는 없을 겁니다·”
펠릭스는 검은 마기가 타오르는 창날로 마르타의 어깨를 짓누르며 턱을 치켜들었다·
“당신들은 견딜 수 있다고 해도 그 뒤에 있는 이들은 아닐 테니까·”
그는 마르타가 아니라, 이 공간 전체를 집어 삼키려는 듯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냈다·
“그렇지· 렌시아와 라온 지그하르트만 죽이면 다 끝나는 일이야·”
칼롭 역시 펠릭스와 같은 생각인 듯 사정없이 검격을 쏟아부었다·
쿠구구구구구!
마르타와 루난이 다 지우지 못한 마기가 분수대 주변으로 흩날리며 대지에 검은 불길을 일으켰다·
“크윽····”
“꺼지질 않아!”
“빌어먹을!”
광풍전 검사들이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지만, 무력의 차이가 너무도 크기에 접근하는 것도 어려웠다·
“으으으····”
렌시아는 주변에 퍼진 마기 때문에 고통이 심해진 듯 쓰러질 것처럼 전신을 떨었다· 일반적인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지 그녀의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흘러내렸다·
“렌시아!”
마르타가 렌시아의 입술을 물들이는 검은 피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다만 그녀는 렌시아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펠릭스의 창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다·
“으윽····”
루난 역시 어떻게든 마기를 지우려고 했지만, 칼롭의 방해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혹시나 했지만, 이제 정말 확실해졌군요·”
펠릭스가 고요히 눈을 뜨고 있는 라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당신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 이딴 버러지들에게 목숨을 맡기다니·”
칼롭은 초월자의 목이 참으로 가볍다며 비웃음을 흘렸다·
“머리가 나쁜지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군·”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믿을만하니까 믿는 거다·”
“너와 렌시아가 죽는 순간에도 그 믿음이 이루어질까?”
칼롭은 라온이 죽어가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보고 싶다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나는 나밖에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라온이 마르타와 루난의 등을 보며 은은한 웃음을 그렸다·
“저 둘을 지켜봐 온 나를 믿는다·”
절대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말하며 떨고 있는 렌시아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아주었다·
“저도····”
렌시아가 힘겹게 눈을 떴다·
“언니들을 믿어요·”
그녀는 지독한 고통 때문에 피부 위로 힘줄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환히 웃었다·
분명 슬픈 상황이지만, 너무도 선한 미소였기에 마기에 물든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뚜욱!
렌시아의 웃음을 본 마르타와 루난의 눈동자 위로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시체가 가득한 마을 속에서 엄마를 부르짖던 소녀 그리고 오빠의 손아귀에 잡혀서 세상을 바라볼 수도 없었던 소녀·
각자의 아픔을 간직한 마르타와 루난의 앞으로 파란 배낭을 멘 렌시아가 섰다· 아이는 환한 웃음과 함께 두 사람에게 손을 뻗어주었다·
마르타와 루난은 선명하게 빛나는 렌시아의 손을 향해 불에 탄 그리고 피에 젖은 손을 뻗었다·
세 아이의 손이 하나로 이어지며 불타는 마을이 사라지고, 피로 이루어진 새장의 문이 열렸다·
쩌어어어어엉!
마르타의 손끝을 타고 올라간 타이탄의 강기가 사선으로 회전하며 대기 중에 퍼져 있는 마기를 짓눌렀다·
후우우우우욱!
루난의 애검 설화 위에서 피어난 서리의 조각들이 샹들리에와 같은 형상을 그리며 거칠게 들어오는 마기를 모조리 얼려버렸다·
“설마 저거····”
“이 무슨!”
칼롭과 펠릭스는 마르타와 루난의 동시 각성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지금 끝내라! 놈들의 강환이 완성되기 전에 마기를 모조리 쏟아부어!”
펠릭스는 어찌나 다급한지 처음으로 반말을 내뱉으며 지닌 마기를 모조리 폭발시켰다·
“알아!”
칼롭도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마기의 불꽃으로 강환을 일으켜 루난을 향해 쏘아냈다·
“루난·”
“응·”
마르타와 루난은 칼롭과 펠릭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라온과 렌시아의 앞에 선 채로 서로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쩌어어어어엉!
서리와 대지의 기운이 피어나는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며 청아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우욱!
천지를 뒤덮던 검은 마기는 혹한의 땅을 담아낸 듯한 자연의 기운 앞에 발악 한 번 하지 못하고 봄눈처럼 흐릿하게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