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7화
‘봤지? 아니, 느꼈지?’
라온이 렌시아의 떨리는 손을 보며 라스를 불렀다·
-그래· 느꼈느니라·
라스가 푸른 눈동자를 깊게 굽혔다·
-분명 분노였느니라·
녀석은 렌시아의 영혼 속에서 분노가 타올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 그리고 울분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어·’
렌시아는 몇몇 어른을 만날 때마다 티가 나지 않도록 아주 미세하게 손을 떨었다·
아이는 본래 어른들을 무서워하는 법이라 일단 기억만 해두었는데, 조금 전 그녀는 단순한 두려움만 아니라, 분노와 울분을 드러냈었다· 확실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사라졌군·’
렌시아에게서 피어났던 분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에 지워졌다·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니라·
라스가 냉랭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땅이 분노를 집어삼켰느니라·
녀석이 바닥과 천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느꼈어·’
라온이 가늘게 입술을 씹었다·
‘이제야 확실해졌군·’
이 몬티로에는 인간의 사기와 마기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마저 집어삼키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이제 그 사람을 불러도 되겠어·’
사검마의 정보가 확실해졌으니, 이번 일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서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았다·
“제 말을 듣고 계시는 겁니까?”
펠릭스라고 불린 남자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시선을 내렸다· 그의 키가 2m가 훨씬 넘었기에 자신도 올려볼 수밖에 없었다·
“제, 제가 죄송해요!”
렌시아가 본인이 실수를 했다며 펠릭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렌시아 님은 잘못한 것 없습니다·”
펠릭스가 눈매를 찌푸린 채 렌시아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으····”
렌시아는 펠릭스의 손이 닿자마자,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너는 누구지?”
라온이 전혀 모르겠다고 말하며 펠릭스에게 턱을 까딱였다·
“저는 호창대의 장을 맡고 있는 펠릭스라고 합니다·”
펠릭스는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태도만큼은 정중했다·
“그 다섯 영웅인가 하는 사람인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영웅 같은 게 아니라, 이 도시의 수비대일 뿐입니다·”
펠릭스는 그런 칭호를 받을 자격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왜 렌시아 님을 이곳까지 데려오신 겁니까? 저 나이대에 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걸 아실 텐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냐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흐음····”
라온이 투기장에서 울려오는 사람들의 환호를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군· 사춘기 소녀한테 너무 신경을 안 썼어·”
미안하다고 말하며 렌시아에게 은화를 튕겨주었다·
“어어····”
렌시아가 눈을 끔벅이며 공중에 뜬 은화를 한 번에 받았다·
“나가 있거라·”
“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는 걱정이 되는 듯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너 대신 여기 있는 영웅님이 투기장을 소개해 주겠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펠릭스에게 금화 하나를 던져 주었다·
“···좋습니다·”
펠릭스는 본인이 한 말이 있기 때문인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건 필요 없습니다·”
그는 손으로 받은 금화를 그대로 돌려주고서 투기장의 입구로 들어갔다·
“마음대로 하셔·”
라온은 렌시아에게 교회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후 펠릭스의 뒤를 따라갔다·
‘강하지만,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아·’
펠릭스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마스터 최상급 수준의 무인· 딱 그뿐이야·’
칼롭처럼 나이에 비해 강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력이나, 기질보다 큰 키가 더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렌시아의 반응을 볼 때 저 펠릭스라는 남자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닐 테니까·
-저대로 놔둬도 되는 것이냐?
라스는 렌시아가 걱정된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여기서 집착을 해서는 안 돼· 그게 더 의심을 사게 될 거야·’
렌시아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그녀를 따라 나갔다가는 의심의 시선이 따라붙게 될 것이다· 지금은 투기장에서 노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았다·
“이곳이 투기장입니다·”
펠릭스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관객석에 서서 3층 아래에 있는 모래밭을 가리켰다· 투사들의 피 때문인지 모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돈을 거는 접수처는 저곳입니다· 아마 액수 제안은 없을 겁니다·”
펠릭스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창구를 가리키며 원하는 대로 돈을 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액수 제한이 없다고? 마음에 드는데?”
라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익!
피에 젖은 철문이 열리고, 갑옷 같은 근육을 두른 거한과 키는 작지만, 체격이 탄탄한 젊은 남성이 투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육체와 육체를 부딪치는 싸움이었기에 두 사람 다 오러를 지운 상태였다·
“이번에는 걸 수 없겠군요·”
펠릭스는 투기장의 문이 열리면 베팅을 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구경 좀 해볼까·”
라온은 약간의 아쉬움을 드러내며 난간 아래로 상체를 기울였다·
“헌데 영웅님도 도박을 하시나? 분위기가 영 안 어울리는데?”
펠릭스에게 눈동자를 돌리며 턱을 까딱였다·
“친구가 자주 오는 곳이라,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습니다·”
펠릭스는 친구라는 말을 하면서 투기장에 있는 키가 작은 투사를 가리켰다·
“뭔지 대충 알겠군·”
지금 투기장에 있는 키가 작은 투사도 펠릭스와 칼롭처럼 몬티로를 수호하는 무인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만····”
펠릭스는 가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친구의 싸움인데 안 보는 건가?”
“결과가 정해져 있어서 볼 필요 없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투기장을 나갔다·
“싱겁군·”
라온이 펠릭스의 등을 보며 콧방귀를 뀔 때였다·
우와아아아아!
사람들의 비명과 환호를 듣고 투기장을 보자, 펠릭스의 친구라는 투사가 상대인 거한을 곤죽으로 만든 채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벌써?”
라온은 놀란 척 연기를 하면서 눈동자를 굴려서 투기장 전체를 훑어내렸다·
‘투기장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고, 돈을 잃은 사람들이 있는데····’
사기와 마기가 나오지 않는다라·
-말이 안 되는 일이니라· 본왕과 네놈이 보았듯이····
라스가 바닥을 내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 장소가 부정적인 기운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니라·
녀석은 확실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아마 거대한 제물이 소모되고 있을 것이니라·
라스는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다며 눈썹을 내렸다·
‘그렇겠지·’
“케이든?”
라온이 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우측에서 인상이 멀끔한 적발의 남자가 다가왔다· 양아치 변장을 하고 잠입한 버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
그는 펠릭스와 함께 있던 것을 보았던 듯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 별일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버렌에게 상단전을 이용한 상승의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 듣고, 암시장의 요원에게 전해줘· 이 몬티로는····]
사검마의 정보가 확실해졌기에 그에게 지금까지 알아낸 것을 모두 전해주었다·
투기장은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기에 아무리 흑탑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곳에서 초월급의 오러 메시지를 훔쳐 듣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그럼 그냥 구경 온 건가?”
버렌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겉으로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불러줘야 할 사람이 있어· 그녀는····]
라온은 지원을 요청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 * *
라온은 투기장에서 돈을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하며 마지막 싸움까지 지켜본 후 밖으로 나왔다·
“흐응·”
렌시아는 교회의 의자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전과 색이 달라진 것을 보니, 새로운 옷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뜨개질이 취미였어?”
라온이 렌시아의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오셨어요?”
렌시아가 헤헤 웃으며 뜨개질을 하고 있던 옷을 내렸다·
“방금·”
“투기장은 즐거우셨나요?”
“즐거웠지· 아주 털털 털리고 왔거든·”
라온이 돈을 다 잃었다고 말하며 빈 주머니를 꺼냈다·
“아····”
렌시아가 당황한 듯 눈을 끔벅였다·
“오늘 쓸 돈을 잃은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너 줄 돈은 남아 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며 손을 내렸다·
“그, 그게 아니라····”
렌시아는 그래서 물어본 게 아니라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근데 너 사준 사탕은 안 먹고, 왜 입이 말라 있냐?”
“동생들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동생들과 함께 먹으려고 아끼고 있다며 옅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동생들 주고 싶다고, 음식을 포장했었지·’
렌시아는 해산물 레스토랑에 갔을 때도 동생들을 먹이고 싶다며 음식을 포장해서 나갔었다·
지금 뜨고 있는 옷도 동생 것인 걸 보면 가족을 굉장히 아끼는 것 같았다·
“흠····”
라온이 렌시아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한데 너희 집이나 가볼까?”
“예···?”
렌시아가 아예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희 집이요?”
“그래· 그렇게 아끼는 동생들을 좀 보고 싶은데?”
“갑자기 저희 집은 왜····”
“돈을 잃어서 인생이 조금 허무해졌거든·”
자극이 너무 심해서 조금 가라앉히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어어····”
렌시아는 고민이 되는 듯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아니, 저녁 시간이니까 애들 먹일 건 사서 가야지· 동생이 몇 명이야?”
라온이 속으로 작은 탄성을 흘리며 상의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네 명이에요·”
렌시아가 손가락 네 개를 들어 올렸다·
“네 명? 생각보다 많네?”
“아, 친동생이 아니거든요·”
렌시아는 친동생보다도 더 다정해 보이는 어조를 흘리며 옅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한 것 같았다·
* * *
몬티로 서쪽 외곽에 있는 판자촌·
“여기에요·”
렌시아는 낡았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듯한 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나!”
“언니!”
다섯에서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네 명이 동시에 렌시아에게 달려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이들은 렌시아의 뒤에 있는 라온을 보고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어어····”
“아····”
아이들은 누나와 함께 들어온 것을 보았음에도 라온을 필요 이상으로 겁내며 입술을 떨었다·
“나쁜 사람 아니야·”
렌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모시고 있는 손님이야· 좋은 분이셔·”
그동안 꼬박꼬박 팁을 챙겨주고, 동생들 것까지 밥과 간식을 사준 보람이 있는지 그녀는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어제는 과자를 포장해 주셨고, 오늘도 너희 먹을 저녁도 사주셨어·”
렌시아는 진한 미소를 그리며 한쪽 모서리 박살 난 테이블 위에 지금 사 온 해산물 요리를 내려놓았다·
“와! 새우랑 바닷가재!”
“회도 있어!”
“맛있겠다····”
바닷가에 사는 아이들답게 새우와 바닷가재만이 아니라, 회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만 아이들은 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비려서 먹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어제 과자도 이 아저씨가 준 거야?”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큰 눈을 끔벅이며 렌시아의 바지를 잡았다·
“맞아·”
렌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쯥니다·”
아이는 이빨이 빠졌는지 다 새는 발음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다른 세 아이도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맛있게 먹어라·”
라온은 손을 휘휘 저으며 아이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흐음····’
의자에 걸터앉은 채 한눈에 보이는 집안을 살폈다·
‘낡았지만, 깨끗하네·’
렌시아가 관리를 잘했는지 집이 낡았음에도 내부는 깔끔했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부모 없이 렌시아 홀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도 특이한 점은 느껴지지 않고··· 어?’
가장 어린아이의 상의가 얼마 전까지 렌시아가 뜨고 있던 옷과 똑같았다· 정말 동생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대견한 녀석이로구나·
라스도 그걸 알아차린 듯 동생들의 음식을 챙겨주는 렌시아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네·’
라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을 챙기기도 힘든 나이인데·’
렌시아의 나이는 열다섯 살에 불과하지만, 가이드 일을 하면서 집안 관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뜨개질로 옷까지 만들고 있었다·
광풍대 검사 몇몇보다 더 어른 같았다·
“아저씨는 안 먹어?”
제일 어린 꼬맹이가 같이 먹자며 손을 까딱였다·
“아저씨는 배불러·”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돈을 더럽게 먹었거든·”
“돈도 먹을 수 있어?”
“나중에 크면 알게 될 거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자, 정말 먹지 않았음에도 배가 불렀다·
“뭐, 잘살고 있네· 속도 편해졌으니, 이제 갈란다·”
라온은 기분이 좀 나아졌다고 말하고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 모셔다 드릴게요!”
렌시아는 꼬맹이들에게 회를 먹여주고서 자신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됐어· 이제는 길도 다 아니까·”
애들이나 챙겨주라고 말하고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가, 감사합니다!”
렌시아는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라·”
렌시아에게 손을 흔들고서 등을 돌렸다·
‘저곳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데····’
라온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어둑한 골목을 떠났다·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찾아내야겠군·’
* * *
쯧·
라온은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다·
‘결국 무엇 하나 찾은 게 없네·’
몬티로가 흑탑의 본거지나, 공장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수색을 강화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누구 하나 이곳의 비밀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전히 마기와 사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흑탑의 마인들 역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색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신들 역시 의심을 받을 수 있기에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후우·”
라온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렁이· 지렁이야····”
청순한 여성 관광객으로 변장한 루난이 해변을 기어가는 지렁이를 따라가며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아, 더럽게! 그런 것 좀 잡지 마!”
성숙한 여성의 이미지를 두른 마르타가 루난의 등짝을 후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로 몬티로에 들어왔는데, 이전보다 더 친해진 것 같았다·
“물건은 다 샀어?”
라온이 옆에 앉아 있는 도리안에게 턱 짓을 하며 물었다·
“옙! 상회주님이 시간을 주신 덕분에 전부 다 구했습니다·”
도리안은 팔 건 팔고, 살 것도 샀다며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할 일 다 했습니다·”
크레인은 본인이 해야 할 일도 마쳤다며 앞으로 손을 모았다·
“어····”
렌시아는 자신들이 떠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제 가시는 건가요?”
“상인이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라온은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하며 가늘게 웃었다·
“아아····”
그동안 정이 들었기 때문인지 렌시아의 눈동자에 가느다란 떨림이 일었다·
“다만 그 전에····”
렌시아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바닷가에 퍼져 있는 물의 기운을 끌고 와서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는 기막을 만들었다·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뭐든 대답해 드릴게요!”
렌시아는 마지막이라 생각한 듯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전에 몬티로는 행복만 가득한 곳이라고 했잖아·”
“···그랬죠?”
그녀는 예상외의 말에 눈을 끔벅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인간이나, 어떤 장소도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어· 그건 꿈일 뿐이야· 혹은 악몽이거나·”
“음····”
렌시아는 말없이 살짝 눈꺼풀을 떨었다·
“내가 눈치가 좀 빠르거든·”
-엥···?
의문을 표하는 라스를 밀어내고 말을 이어갔다·
“너 이곳의 어른들· 특히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손을 떨던데····”
라온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렌시아를 바라보았다·
“아····”
렌시아는 아예 모르고 있었던 듯 본인의 손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어른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는 거냐?”
“아, 아니에요!”
그녀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걸 거예요· 정말····”
렌시아가 입을 다물면 방법이 없기에 정을 이끌 수 있는 쪽으로 움직이기로 정하고 과거의 일을 꺼냈다·
“지금은 한량처럼 살고 있지만, 나도 어린 시절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어· 매일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꽤 고생했지·”
라온이 전생과 현생의 과거를 떠올리며 입술을 씹었다·
“그래서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네가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걸·”
“····”
렌시아는 뜨개질을 하고 있던 바늘을 꼭 쥔 채 어깨를 떨었다·
“만약 이곳에서 무서운 일을 겪고 있다면 지금 말해· 말했듯이 내가 돈이 좀 많아서 너와 네 동생 정도는 책임질 수 있다·”
일단 렌시아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간다면 답을 찾을 수도 있고, 혹여나 나가지 않더라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기에 지금의 신분을 걸고 도박을 걸었다·
“케이든 님····”
렌시아가 멍해진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마른 입술을 천천히 뗐다·
“아니에요! 저와 제 동생들은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어른들도 여러 가지로 많이 도와주시구요!”
렌시아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얼굴로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그 펠릭스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무서워했잖아· 뒤에서는 뻔히 보였다니까?”
펠릭스의 이름을 꺼내며 시선을 내렸다·
“지금이 아니면 도와주기 힘들어· 나도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없으니까·”
단순히 흑탑을 찾기 위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일을 하면서도 동생들을 소중하게 돌보는 렌시아에게 어떤 방식으로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제가 어릴 때 버릇이 없어서 혼이 많이 났거든요· 그래서 어른들이 조금 무서운 것이에요·”
렌시아는 그게 다라고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아무 일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구요· 다른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천천히 속에 있는 말을 끌어냈다·
“떠나실 거면 빨리 이곳을 나가세요· 최대한 빨리·”
렌시아는 이 이상 본인에게 관여하지 말라는 듯 눈매를 굳힌 채로 몸을 일으켰다·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낸 후 그녀는 다시 처음처럼 인형 같은 웃음을 그렸다· 그 모습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렌시아····”
“오늘은 먼저 돌아가 볼게요!”
렌시아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서 해변을 떠났다·
“····”
라온이 렌시아의 작은 등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망했군·’
정이 고픈 아이라고 생각해서 그 부분을 자극했는데,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았다·
“자,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크레인이 걱정된다는 듯 손을 떨었다·
“아니·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았어· 그냥 부자의 일탈이라고 생각하게 두는 게 나아·”
지그하르트와 흑탑의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고, 아동학대 쪽으로 말문을 텄기에 지금의 신분은 사라져도 계획 자체를 들킬 일은 없었다·
“바로 나가면 더 의심을 살 수 있으니, 3일 뒤에 이곳을 떠나자·”
라온이 긴 한숨을 내쉬고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번 일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네····’
* * *
이틀 후·
라온은 떠날 채비를 갖춘 후 숙소에서 어둑해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신분은 뭘 해야 하지?’
상회주 케이든 이상으로 이곳을 자유롭게 돌아볼 신분을 만들기 힘들 것 같아서 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그게 답답함의 전부가 아니지 않나?
라스가 다 안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그래· 그 아이가 걱정돼·’
렌시아는 이틀 동안 숙소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들의 말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도 걱정되었고, 그 아이 자체도 신경이 쓰였다·
“준비 다 끝났습니다·”
크레인은 중요한 흔적을 모두 지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완료했습니다·”
도리안 역시 마지막까지 보급품을 다 정리했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떠나기로 하지· 처음에 가져온 마차에 짐을 싣고····”
라온이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바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언제나처럼 파란 배낭을 메고 있는 렌시아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이제 안 오는 줄 알았는데?”
라온이 렌시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은 이상 저 아이를 위해서라도 정을 떼놓는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왜 안 가셨어요?”
렌시아는 왜 바로 이곳을 떠나지 않았냐며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기회인가?’
왠지 그녀가 중요한 말을 할 것 같아서 주변의 마나를 이용하여 기막을 쳤다·
“내가 왜 도망치듯 떠나야 하는데?”
라온은 이곳의 주민들이 무섭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네 생각보다 난 돈이 많아· 무서운 게 없다고·”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손가락에 들고 있던 금화를 튕겼다·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어요· 빨리 떠나시는 게 케이든 님에게도 좋을 거라구요·”
렌시아는 해변에서 보여주었던 그 그린 듯한 표정을 깨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더 가고 싶지 않네· 누가 널 괴롭히고, 날 건드릴 수 있는 찾아보고 싶어·”
라온이 거만한 눈빛으로 턱을 저을 때 렌시아가 파란색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갑자기 상의를 들어 올렸다·
“자, 잠깐! 너 뭘 하는··· 아!”
렌시아를 말리기 위해서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오른쪽 허리에 검은 심장 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투웅!
검은 심장의 박동을 보는 순간 라온의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