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7화
라온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를 돌려서 사검마를 처치한 보상을 확인했다·
[위대한 업적을 이뤄내셨습니다·]
[하나의 시대를 저물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0포인트 상승합니다·]
[특성 <요기 적응>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사기 저항력>의 등급이 2단계 상승합니다·]
[특성 <아스카라의 투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 50포인트에, 세 가지 특성의 등급 상승· 그중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던 <사기 저항력>은 한 번에 등급이 2단계나 올라갔다·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사검마와 또 싸우게 된다면 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보아라! 본왕이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는 놈을 잡아놓고 보상이 과하지 않느냐!
라스는 사검마의 수준에 비해서 보상이 너무 많다며 이를 갈았다·
‘너한테나 약한 거지· 이 세계에서는 손가락에 꼽히는··· 건 힘든가?’
생각을 해보니, 오황오마의 수장만 해도 열한 명이기에 사검마가 손가락에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신주오령에서도 지금의 사검마보다 약한 자는 없고, 은거를 택한 검황이나, 전왕 그리고 전대 성검련주도 있기에 발가락까지 다 합쳐야 간신히 사검마를 끼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그래도 대륙 전체에서 20위 안에 드는 놈이잖아· 이 정도면 인정할 만하지·’
-20위? 누가 강자를 20위까지 세느냐! 끽해야 10명이지!
라스는 10명은 인정해도 그 이상은 안 된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너한테는 버러지고 약자겠지만, 나한테는 아니라니까· 너 처음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한 거 기억 안 나?’
라온은 네가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냐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 그건····
라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끄으윽! 제기랄!
녀석은 현재 자신의 무력으로 사검마를 꺾은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돌아가면· 아니! 가는 길에도 본왕이 먹고 싶은 요리들을 모조리 바치거라!
라스는 인정할 테니, 복귀할 때도 원하는 음식을 가져오라며 호통을 쳤다·
‘그 정도야·”
라온이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릇이 큰 본왕이 아니라, 다른 마왕이었다면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아닐걸·’
그리드를 제외한 다른 마왕을 구워삶는 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 어깨를 으쓱일 때였다·
우우우우웅!
진혼검이 강한 진동을 일으키며 자신에게 순도 높은 마나를 전해주기 시작했다·
[진혼검이 정화한 사기를 바칩니다·]
[모든 능력치가 25포인트 상승합니다·]
[새로운 특성 <사기 탐지>가 생성됩니다·]
사검마의 사기와 자신의 육체에 남아 있던 사기를 모두 흡수한 진혼검이 자신에게 정화된 기운을 전해주고 있었다·
-끄어어억····
라스는 이것까지는 감지하지 못한 듯 푸른 눈동자를 바들바들 떨었다·
‘25포인트? 많이도 먹었네·’
진혼검은 흡수한 기운의 반은 본인이 가지고, 나머지 반을 자신에게 전해준다·
반만으로도 능력치가 25포인트나 상승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많은 사기를 흡수한 것 같았다·
‘그런데 사기 탐지는 뭐지?’
새롭게 얻은 특성 <사기 탐지>의 능력을 확인했다·
<사기 탐지>
감각이나, 기감으로도 찾아낼 수 없는 은밀한 사기를 탐지할 수 있다·
‘괜찮은데?’
사검마는 몬티로에서 흑탑의 통로를 찾아낸 게 본인의 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특성이 있다면 자신 역시 흑탑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놈처럼 쉽게는 할 수 없겠지만·’
특성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그 능력이 강해진다· 이제 막 생긴 <사기 탐지>로 사검마처럼 수색을 진행하는 건 무리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끄아아악!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본왕이 인정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게 튀어나오다니! 이제는 정말 못 참겠느니라! 당장 튀어나오거라! 오늘 본왕이 죽든 네놈이 죽든 결판을 내자!
녀석은 시스템과 생사결을 치르려는 듯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음····’
라온이 어깨를 떨면서 옆으로 물러섰다· 라스가 저 상태가 되면 한동안 말이 안 통하기에 그냥 놔두는 게 나았다·
“라온·”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제천검과 진혼검을 정비할 때 트레빈이 옆으로 다가왔다·
“축하한다· 네가 시대를 바꾸었구나·”
트레빈은 축하한다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시대를 바꿨다는 말은 너무 거창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 맞아·”
버렌이 트레빈의 뒤에 선 채로 고개를 저었다·
“오황오마와 신주오령은 깨지지 않는 벽이었어· 네가 처음으로 그 벽에 흠집을 낸 거라고·”
그는 인정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그하르트에 들어가기 전에도 오황오마와 신주오령의 이름은 알고 있었어· 아, 당시에는 신주오령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지만, 개개인의 이름은 알았지·”
마르타가 픽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갓난아이부터 곧 죽을 노인네까지 모두가 아는 이름을 네가 지워버린 거라고· 그 정도면 시대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녀는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위업이라며 무겁게 발을 굴렀다·
“응· 존잘이야·”
루난은 상황과 상관없이 존잘이라고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에에에에이! 대주님! 겸손 좀 그만 떠세요! 본인도 심장이 두근두근하시면서!”
크레인은 다 보인다고 말하며 낄낄 웃었다·
“아니라고·”
라온이 크레인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커헉····”
크레인은 라온의 손아귀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맞을 줄 알았다·”
도리안은 맞아도 싸다고 중얼거리며 쯧쯧 혀를 찼다·
다만 보급관답게 바로 약과 얼음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지금의 사검마는 다른 신주오령보다 약해·”
라온이 트레빈과 광풍대를 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기신이 무너진 상태니까·”
상승의 영역에 닿는 무인들에게는 정기신의 균형이 중요하다·
육체만 강해도, 정신만 강해도, 오러만 많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셋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만이 지닌 무력을 빈틈없이 발휘할 수 있다·
사검마는 신주오령의 격을 뛰어넘는 거대한 사기를 얻었지만, 정신이 무너져서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놈에게 이전보다 약해졌다고 했던 말은 도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역시 라온 지그하르트인가·”
트레빈은 너다운 대답이라고 말하며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네게 할 말이 있다·”
“말씀하세요·”
“광풍대가 전으로 승급한다면 나와 철전대가 그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
그가 검을 뽑아서 거꾸로 세웠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가 너희를 도와준다는 의미로 중무전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늘 일로 생각이 바뀌었어·”
트레빈이 거꾸로 세운 검을 가슴 앞에 세우며 열기가 돋아난 눈빛을 드러냈다·
“지금은 내 의지로 너와 광풍대를 받쳐주고 싶다·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기회를 다오·”
그는 받아들여 달라고 말하며 지그하르트의 검례를 취했다·
“저희도 광풍대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트레빈의 뒤에 서 있던 철전대도 그와 같은 의지를 드러내며 검례를 보여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라온이 트레빈과 철전대 검사들을 보며 눈매를 살짝 좁혔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입니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라스가 말했듯이 자신은 아직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 트레빈과 철전대가 진심을 보여주니, 자신도 진심으로 저들에 충고를 해주고 싶었다·
“가족은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법이지· 네가 무엇이 부족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마·”
트레빈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옅게 웃었다·
“저렇게 말하는데 받아주지?”
“그래· 예전부터 우리와 결이 맞는 무력대는 철전대뿐이었잖아·”
“응· 다 좋아····”
마르타와 버렌, 루난도 조장으로서 철전대의 전입을 받아들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구하러 온 거기도 하니까·”
라온은 철전대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리고 우리를 구해준 것도 고맙고· 이게 내가 네게 하는 마지막 반말이겠어·”
트레빈은 가문으로 돌아가면 이제 존댓말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만날 때는 전처럼 대하셔도 됩니다·”
라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위치가 있으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높여야 하겠지만, 그 외에는 말을 놓아도 상관없었다·
“기분이 좋네· 함께 고통받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서·”
버렌이 웃고 있는 트레빈과 철전대를 보며 히죽였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해·”
마르타는 같이 죽어보자며 손을 휘저었다·
“응· 이제 탈퇴는 없어····”
루난 역시 냉랭한 눈빛으로 턱을 까딱였다·
“크흐흐흐흐·”
“이히히히히····”
“몇이나 살아남을까?”
도리안과 다른 광풍대 검사들도 앞으로의 일이 기대된다는 듯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쟤, 쟤들 왜 저러는 거야?”
트레빈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환영 인사니까· 흐흐·”
마크 괴튼조차 음습한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촌장님·”
라온이 다른 이들을 뒤로하고, 보드리 마을의 촌장에게 다가갔다·
“아마 이 지역은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을 겁니다·”
사검마의 기운 때문에 망가진 초원과 강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죠····”
촌장은 잘 알고 있다는 듯 입술을 깊게 씹었다·
“그러니 지그하르트로 들어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 지그하르트요? 하지만 저희는 돈이 없습니다· 있던 가축들도 대부분 죽어버렸고, 식량도 잃어서····”
그는 몬스터와 사기 때문에 가축과 식량을 지키지 못했다며 시선을 떨궜다·
“최근 지그하르트의 영역이 꽤 넓어졌습니다·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목초지도 있으니, 그쪽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세금은 한동안 유예기간을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 정말이십니까? 대체 왜····”
촌장은 너무 좋은 조건에 오히려 불안함을 느낀 듯 말을 더듬었다·
“세력의 힘은 결국 사람의 힘이니까요·”
라온은 촌장과 그의 뒤에 있는 보드리 마을 사람들을 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없는 단체는 말라죽을 뿐이야·’
저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것도 아니고, 세상의 억압과 전쟁의 불꽃을 피해서 이곳에 머물렀을 뿐이다·
지그하르트가 무력으로 저들을 보호해 주면 저들 역시 본인들의 장점을 살려서 지그하르트에 도움을 줄 것이다·
오마와의 전쟁이 계속 이어질 것이기에 꾸준히 사람을 늘려서 지그하르트의 힘을 키우는 게 옳은 일이었다·
“모, 목숨을 구해주신 것으로 모자라서, 살길까지 마련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촌장이 지팡이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진심으로 감격한 듯 흐느끼며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은인····”
다른 마을 사람들 역시 촌장처럼 고맙다고 외치며 허리를 굽혔다·
“우리 어디 갈 때마다 은인이 되는 것 같다?”
“그러네· 바로 전에는 드워프들의 은인이 됐으니까·”
크레인과 도리안은 임무에 보람을 느끼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심장이 잘근잘근해····”
루난 역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게 기쁘다는 듯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네·”
“챙길 사람이 많으니,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겠지·”
버렌과 마르타가 광풍대 검사들에게 돌아가 복귀 준비를 지시했다·
‘음·’
라온은 복귀를 준비하는 검사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얻은 게 많네·’
사검마를 베었고, 그에 따른 여러 보상을 얻었으며, 흑탑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실마리까지 잡았다·
다른 때 이상으로 큰 수확이었다·
‘할아버지도 좋아하시겠지·’
글렌이 어떤 반응을 해줄지 생각하며 고개를 돌릴 때였다·
-끄아아아악! 나오라고!
라스가 그때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서리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라온의 눈빛이 손에 박힌 서리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싸우고 있었어?’
* * *
라온은 광풍대와 철전대 그리고 보드리 마을 사람들을 모두 챙기며 지그하르트로 복귀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차원문을 이용할 때 상당한 비용이 들었지만, 드래곤 레어 털은 덕분에 자신의 재산에는 티끌만 한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너는 어째 복귀할 때마다 사람을 늘려서 오는 거냐?”
외총관 일리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제일 많은 것 같군·”
“새로 지그하르트에 받아들일 사람들입니다·”
라온은 보드리 마을 사람들을 지그하르트로 받아들일 생각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유목민들이라····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일리운은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지그하르트의 정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네게 반말을 할 일이 없겠구나· 전주가 된다면 나보다도 급이 높아지는 거니까·”
“지금처럼 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사실 대주가 되었을 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가 다시 말을 놓으셨으니까요·”
“그, 그랬나? 그럼 뭐 하던 대로 할까?”
일리운은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바닥을 보며 눈썹을 내렸다·
지진이 일어난 듯 땅에 강한 울림이 일어나고 있었다·
“크흠, 내가 시간을 너무 끌었나· 어서 들어가 보거라·”
일리운은 땅에서 진동이 돋아나자마자,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네· 그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정문을 넘어서 본관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본관으로 다가갈수록 대지를 울리는 진동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꼭 자신을 반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알현실에는 촌장님만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보드리 마을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 없기에 긴장감에 얼굴이 검게 죽어가는 촌장만 데리고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주님은 대륙에 퍼진 소문과 달리 친절하신 분이니까요·”
라온은 글렌에게 겁먹을 필요 없다는 말을 해주고서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알현실의 중앙에 서서 복귀 인사를 올리자, 광풍대와 철전대가 그 뒤에 서서 무릎을 꿇었다·
이미 하나의 세력이 된 것처럼 검사들의 자세가 모두 일치되어 있었다·
“일어나거라·”
글렌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음성을 흘리며 턱을 주억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허리를 한 번 더 굽히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곧 복귀하겠다는 것 외에는 내용이 없던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글렌은 평소와는 보고서에 궁금증이 돋은 듯 한쪽 눈썹을 내렸다·
“서면으로는 말씀드리기 힘든 것들이 있었습니다·”
라온은 개인적으로 판단을 내려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상관없다· 지금 들으면 되니까·”
글렌은 무슨 말이든 들어주겠다는 듯 옥좌에 묻고 있던 등을 떼고 상체를 단상 아래로 굽혔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광풍대가 보드리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보라색 사기로 초원과 마을이 모조리 뒤덮인 상태였습니다· 저희는 일단 철전대를 구하고····”
라온은 단상을 올려보며 철전대를 구해주었던 일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글렌은 기대감이 한껏 차오른 듯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음····”
보드리 마을의 촌장 채프란이 라온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단상 위· 황금빛 옥좌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인다·
연배는 비슷하지만, 미천한 위치인 자신과 달리 세상의 정점에 선 거인, 글렌 지그하르트· 라온은 친절하다고 했지만, 글렌에 대해 들은 소문은 냉혈한 같은 것들뿐이라, 심장이 바스러질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친절하다고는 하셨지만, 눈빛이 너무 무서운··· 음?’
마른침을 삼키며 글렌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떨리는 입술과 눈동자가 낯이 익었다·
‘저건 꼭····’
내가 우리 손주를 볼 때의 표정인데?
라온이 본인과 광풍대의 활약을 말할 때마다 글렌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귓불이 붉어졌다·
저 모습은 손자가 농업과 사육에 재능을 보일 때 자신의 표정과 똑 닮아 있었다·
‘그렇군·’
사람은 다 똑같은 건가·
채프란이 옅은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니 토할 것 같았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사기를 뚫고, 바위를 베었을 때 나타난 건 사흑련의 수장 사검마 드렉이었습니다·”
라온이 사검마와 마주쳤다는 말을 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사검마라고?”
글렌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옥좌의 황금빛 팔걸이가 종잇장처럼 구겼다·
“예· 흑탑의 주술로 신주오령의 격을 넘어선 사기의 괴물이 되어서 저희를 습격해 왔습니다·”
“사기를 강화한 사검마라니····”
“그,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된 건데!”
평소에 듣기만 하던 공검대주 세레나와 전검대주 라테인이 거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어서 그 이후를 말해달라는 듯 뜨거운 시선을 보내왔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겠지· 아무리 조카가 초월에 올랐다고 해도 사검마를 꺾는 건 무리니까·”
발데르는 누구의 도움이 있었는지가 궁금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사검마는····”
라온이 고요해진 알현실을 훑어내린 후 정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가 베었습니다·”
쿠우우우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상 위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시선을 들어 올리니, 경악 어린 웃음을 그린 글렌의 뒤편으로 다리가 뽑힌 황금빛 옥좌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