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2화
라온은 일단 보상 메시지를 지운 후 뒤를 돌아보았다·
버렌, 마르타, 루난 그리고 셰릴이 여러 의문을 품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볼 만하지·’
아스카라와 대화를 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마왕이나 마계라는 단어가 꾸준히 나왔으니, 저렇게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할 것이냐?
라스는 본인이 더 긴장한 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어떻게 하긴· 말하는 수밖에 없지·’
글렌과 렉타르는 이미 라스가 자신의 친구고, 마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그 두 사람만큼 신뢰할 수 있기에 말하는 게 옳은 일인 것 같았다·
-저, 정말이냐?
‘봐·’
라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버렌과 마르타, 루난의 눈을 보며 옅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줄 눈빛이잖아·’
광풍대의 세 조장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눈동자를 돌리지 않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 기절한 상태지만, 도리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쌍검을 내리는 셰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많은 것을 들은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당황하고 있었지만, 나서지 않고 있었다·
먼저 자신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의미다· 셰릴 역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그럼····
라스가 루난과 마르타를 보며 손을 파르르 떨었다·
-드디어 본왕이 아이스크림 소녀와 소고기 소녀를 만날 수 있는 건가?
녀석은 기분이 좋아진 듯 허공에서 방방 뛰었다· 시스템에게 쌍욕을 퍼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화가 풀리다니, 참으로 한결같은 마왕이었다·
“라온····”
셰릴이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어? 왜 이상한 말투를 사용했고, 왜 그 마족이 너를 마왕이라고 부른 거지?”
그녀는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신뢰를 담은 채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런 건방진!
라스가 셰릴을 향해 통통한 주먹을 날렸다·
-본왕의 말투가 이상하다니! 다들 멋있다고만 하는데!
녀석은 당장 사과하라며 셰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나도 들었어·”
버렌이 화상을 입은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군주라고도 하고, 마왕이라고도 했지·”
그는 무슨 뜻인지 설명을 해달라는 듯 고요한 시선을 보냈다·
“재촉하지 마· 기다리면 말해줄 테니까·”
누구보다 먼저 나설 것 같았던 마르타는 오히려 침착하게 감정을 내리눌렀다·
“응· 분명히·”
루난도 마르타처럼 기다리기로 정한 듯 평소처럼 눈을 끔벅였다·
“역시·”
라온이 셰릴과 세 조장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역시?”
마르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 사실····”
라온이 사정을 말하려고 하는데, 천장에서 무너지고, 돌과 흙더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다른 사람을 깨워서 이곳부터 벗어나죠·”
지금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강렬했던 아스카라의 투기 때문에 이 지하만이 아니라, 땅굴 전체가 무너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과 셰릴이 있다고 해도 지하에 갇히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기에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 그게 먼저겠어·”
셰릴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보르고스와 드워프 장인들을 깨웠다·
“야! 도리안! 일어나!”
마르타도 기절한 채 침을 흘리는 도리안을 걷어찼다·
“헙!”
도리안이 감전된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분명 이상한 괴물이 튀어나왔는데····”
그는 꿈이냐고 중얼거리며 멍하니 눈을 떴다·
“됐고! 빨리 사람들이나 업어!”
버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도리안의 이마를 치며 스스로 걷기 힘든 장인들을 가리켰다·
“예? 갑자기 무슨·”
“천장····”
루난이 손가락을 들어서 천장을 가리켰다· 그녀가 임시로 만들어놓은 서리의 기둥이 갈라지며 돌과 흙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허억!”
도리안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부상이 심한 드워프 셋을 한꺼번에 업었다·
“보르고스 님은 제 등에 업히시죠·”
라온이 보르고스를 업고, 위로 올라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잊고 있던 내상의 통증이 급격히 강해졌다·
단전과 그 주변의 마나 회로가 찢어진 상태였기에 누구를 업기는커녕 제 발로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으, 은인! 내 발로 걸을 테니, 내려주시오·”
보르고스는 제 발로 걷겠다며 허공에서 다리를 버둥거렸다·
“괘, 괜찮습니다·”
라온이 억지로 걸으려고 할 때 앞에 서 있던 셰릴이 다가왔다·
“내가 업을 테니, 넌 따라만 와·”
셰릴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 듯 두 사람이나 등에 짊어진 상태임에도 보르고스를 팔로 안아 들었다·
작은 체구였지만, 등에 드워프 둘을 업고, 팔로 보르고스를 안아 든 모습은 꼭 거인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너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텐데·”
셰릴은 뒤에서 따라만 오라고 말하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예·”
라온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선두에 서서 나아가는 셰릴의 뒤에 붙었다·
“그 괴물은 대주님이 잡으신 거죠?”
도리안은 차원을 뚫고 나왔던 아스카라를 떠올린 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역시 우리 대주님! 믿고 있었습니다!”
“못 잡았어· 기절해놓고 믿고 있기는 무슨·”
라온이 도리안을 돌아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기, 기절했어도 마음속에서는 대주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도리안은 진심이라며 고개를 홱 저었다·
“됐으니까, 부상자나 잘 챙겨·”
“넵!”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사람들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음····”
라온이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옮기다가 눈썹을 살짝 내렸다·
흥분 상태가 가라앉으면 통증이 심해지고 움직이기 힘들어야 하는데, 신기하게도 고통이 줄어들고 몸이 편해지고 있었다·
‘뭐지?’
아무리 자신이 초월자고, 여러 특성이 있다고 해도 단전 자체의 충격을 빠르게 회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좋은 일이지만, 너무 이상하여 오히려 좋지 않은 일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망할 놈의 투기 때문이니라·
라스가 자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투기?’
-네놈이 지랄 맞은 연기를 해서 얻은 투기 말이니라!
녀석이 길게 혀를 찼다·
-발록은 전투의 마족답게 언제, 어디서라도 싸울 수 있는 적응력을 가지고 있으니라· 네놈이 얻은 건 발록의 왕이 지니고 있던 투기이니, 그 정도 부상쯤은 우습지·
라스는 개똥 같은 힘을 얻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군·’
천천히 몸 안쪽의 기운을 살펴보니, 간장에 들어선 발록의 투기가 저절로 움직이며 찢어진 단전과 마나 회로의 상처를 메워주고 있었다·
-치료와는 조금 다르지만,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니라·
‘그런 것 같네·’
-끄윽! 이런 것도 모르는 놈한테 저런 힘을 주다니!
라스는 아까워 죽겠다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그래서 얻었을지도·’
라온이 싱긋 웃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어? 괜찮으신 거예요?”
도리안이 너무 빨리 걷지 말라며 걱정하는 말을 꺼냈다·
“버틸 만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셰릴의 바로 뒤로 따라붙었다· 자신이 빠르게 움직이자, 지하 공간이 무너지기 전에 회색 망치 길드의 거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도 무너지는군· 나가야겠어·”
셰릴은 잿더미가 된 공방 위로 바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 갈 거면 빨리 가죠! 깔리겠어요!”
도리안도 겁이 난다는 듯 턱을 덜덜 떨었다·
“기다려!”
마르타가 도리안의 목덜미를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예? 하지만 위험····”
“마지막 인사는 기다려 줘야지·”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서 뒤편을 가리켰다·
“····”
보르고스와 장인들은 불에 타버린 동료들과 공방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동료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를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치이이이잉!
루난은 보르고스와 장인들이 동료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냉기의 막을 쳐서 모두를 보호해주었다·
“하아····”
그녀도 무리했는지 입에서 피를 흘렸지만, 절대 냉기를 꺼뜨리지 않았다·
“가자····”
보르고스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검게 타버린 망치를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들은 말없이 그를 따라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로 향했다·
“고맙소·”
보르고스는 천장과 땅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는 셰릴과 루난에게 허리를 굽혔다·
“저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셰릴은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응····”
루난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담담하게 눈을 끔벅였다·
“인사는 나가서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제 정말 위험해요·”
버렌이 루난의 냉기를 밀고 내려오는 바위와 흙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알겠소·”
보르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장인들과 함께 지상으로 나갔다·
“우리도 가자·”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버렌과 마르타, 루난, 도리안에게 손짓했다·
“그래····”
“하아, 사람을 구했는데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네·”
“명복을····”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은 이들을 위로한 후 위로 올라갔다·
“····”
라온 마지막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후우우우욱!
무너지는 지하 마을 안쪽에서 아주 흐릿한 음의 기운이 떠올라 자신에게 다가왔다·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 기운은 자신으 손을 피해 진혼검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뭐지?’
분명 좋지 않은 부정적인 기운이건만, 자신에게 해가 될 거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진혼검 속에 깃든 원혼과 같은 느낌이었다·
‘스승님이 진혼검에 들어간 이후로 이상한 일이 생기네·’
라온이 짧은 숨을 내쉬고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나가자마자, 셰릴의 기운이 사라지며 회색 망치 길드가 세운 지하 마을 전체가 무너지고, 산 자체가 깎이며 거대한 바위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슬아슬했네요·”
도리안은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바위들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으음····”
보르고스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땅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장인들 역시 감정이 격해진 듯 참고 있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하아아····”
보르고스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피에 물든 듯한 땅을 움켜쥐었다·
그는 한참 동안 감정을 정리한 후 천천히 일어나 라온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소?”
보르고스는 알게 된 것을 말해달라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발록의 왕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들을 부른 자가 흑탑의 마인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렇구려· 결국 또 우리를 구해주었어····”
보르고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회색 망치의 보르고스가 은인을 뵙소·”
“은인을 뵙습니다!”
장인들 역시 보르고스와 함께 허리를 굽혔다·
“이러지 마세요·”
라온이 상처가 더 벌어진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구해주고, 복수까지 해주었는데, 이런 인사도 못하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소!”
보르고스는 인사를 받아달라고 말하며 땅에 머리까지 박았다·
“받아줘·”
셰릴이 옆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잡아주었다·
“이 정도 인사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으니까·”
그녀는 인사를 받지 않는 게 더 실례라며 턱을 주억였다· 언젠가 리메르가 해주었던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일 테니, 일어나세요·”
라온이 보르고스의 인사를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소·”
보르고스는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며 가슴을 쳤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니·”
그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기다릴 필요 없소· 은인이 요청했던 일을 바로 시작할 테니까·”
보르고스는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예?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라온이 헛바람을 흘리며 손을 떨었다·
“오히려 지금 같은 때에는 일하는 게 낫소·”
보르고스는 지금의 감정을 통해 오히려 더 좋은 무기와 갑옷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다른 장인과 드워프들도 달아오른 눈동자로 일을 시켜달라고 외쳤다·
“부탁드리겠소·”
보르고스는 본인들에게 드래곤의 뼈로 무구를 만드는 작업을 맡겨달라고 말하며 다시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그 일을 맡길 사람은 장인님뿐이었습니다·”
라온이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작업은 어디에서 하실 겁니까?”
이 주변은 흑탑 때문에 위험할 것 같아서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지그하르트로 가야겠지·”
보르고스가 자신을 빤히 보여 입맛을 다셨다·
“헌데 혹시 난민도 받아주는 거요?”
* * *
드워프와 장인들의 화상이 심하기에 일단 빠르게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세피아 가문으로 돌아왔다·
노련한 상인인 아디스가 미리 치료사와 신관들을 대기시켜놓은 덕분에 보르고스를 포함한 모두가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한숨 놨네·”
버렌이 치료실의 문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히 후유증이 남을 상처는 없겠어·”
마르타가 피 묻은 붕대를 돌돌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이다· 이번에는·”
그녀는 멍하니 선 루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루난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땀을 질질 흘려가면서도 계속 냉기의 막을 유지했잖아· 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살을 도려내거나 팔과 다리를 잘라내야 했을 수도 있었어·”
마르타는 잘 했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찰녀가 칭찬을···?”
루난은 정말로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굴 악마라고 생각하냐? 나도 할 때는 해!”
마르타가 루난을 향해 이를 갈았다·
“나찰녀가 칭찬을···?”
루난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헉 소리를 흘렸다·
“으휴! 칭찬을 해줘도 의미가 없다니까!”
마르타가 다시는 칭찬 안 한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싸우지 마시고, 일단 쉬시죠! 제가 손님 방으로 안내해드릴게요!”
도리안이 마르타와 루난의 사이로 끼어들어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전에·”
라온이 세 조장과 셰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자·”
“예? 아, 넵!”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모두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상회의 자금력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듯 화려한 방이었다· 방음이 잘 되어서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헌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요?”
도리안이 조급한 듯 다리를 달달 떨었다·
“급한 일 있어?”
라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도리안을 보며 턱을 틀었다·
“네·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다른 물건들을 털어야 해서····”
도리안은 못다 한 보급을 마쳐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보아도 이놈도 정상은 아니니라·
라스는 다른 쪽이지만, 자신 수준으로 미쳤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거면 가만히 앉아 있어·”
라온이 도리안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후 가장 앞쪽의 자리에 앉았다·
“천검대주님· 아니, 셰릴 님도 앉으세요·”
“그래·”
셰릴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린 듯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후····”
라온이 버렌, 마르타, 루난, 도리안 그리고 셰릴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그래· 이들이라면 믿을 수 있지·’
버렌, 마르타, 루난, 도리안은 설명할 필요도 없고, 셰릴도 자신과 광풍대를 구하기 위해서 리메르와 함께 목숨을 걸었었다·
이들을 믿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자신이 믿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마족과 대화를 할 때 마계, 마족, 마왕이라는 말이 나왔지·”
라온이 앞으로 손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불타는 괴물이 너한테 마왕이라고 했었어·”
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라, 라온이 스스로 마왕이라고 먼저 말하지 않았나?”
마르타는 그게 먼저라며 고개를 저었다·
“····”
루난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저 믿겠다는 눈빛으로 보였다·
“음····”
셰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예? 그게 무슨····”
도리안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마왕이나 마족이 아니야· 순수한 인간이지· 다만····”
라온이 어깨 위로 올라가 있는 라스를 흘낏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나와 함께 있는 녀석이 마계의 군주야·”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라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으음····
라스는 본인에 대한 설명을 한 것에 긴장한 듯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정을 준 이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모르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 마왕이····”
“옆에 있다고?”
“····”
버렌과 마르타는 본인들의 귀가 잘못되기라도 한 듯 눈을 부릅떴고, 루난은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그랬군요· 그럼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일이 다 설명이 돼요····”
도리안은 이제야 지금까지 있었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해가 간다며 입술을 떨었다·
“그 마왕이 위험하지는 않은 건가?”
셰릴은 다른 것보다 자신을 먼저 걱정해주며 고개를 내렸다·
“오히려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제 친구입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짧게 숨을 들이켠 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 씩 말해주었다·
“그, 그걸 전부?”
“아····”
“그럼 제가 살아남은 것도 그 마왕님 덕분이잖아요!”
마르타와 루난, 도리안이 라스의 도움을 받은 것에 놀란 듯 턱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가 창염마군에게 전멸당할 때 나온 것도····”
“그래· 이 녀석이야·”
라온이 버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 그러면!”
버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어깨 위에 있는 게 바다의 정령이 아니라, 마왕이었어?”
그는 라스가 만들어준 눈으로 라스를 보며 헉 소리를 토했다·
“그래· 이 녀석이 네 눈을 만들어주었기에 너 혼자 형체를 볼 수 있는 거야·”
라온이 라스를 툭 찌르며 옅게 웃었다·
-이제야 알려지는군· 눈깔아! 네놈의 새로운 눈깔을 만들어준 게 바로 본왕이니라!
라스는 경배하라며 턱을 치켜들었다·
“···으·”
버렌이 라스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마왕은 그저 무찔러야 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그는 본인을 바라보는 라스와 눈을 마주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저를· 그리고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버렌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누, 눈깔이가 인사를?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 녀석은 마족 자체를 혐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놀랍다는 듯 턱을 떨었다·
‘이제는 아집만 강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버렌은 더 이상 질투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꼬마가 아니었다·
마족이라는 부정적인 존재보다도 스스로가 받은 도움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제게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버렌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다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이냐?
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말해도 되는 것이냐?
‘내가 전해줄게·’
라온이 입꼬리를 떠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당연히 요리지! 본왕이 먹어보지 못한 요리들을 모두 가지고 오라고 말하거라!
라스는 버렌은 부자니까 맛좋은 음식을 잘 알 거라며 헤헤 웃었다·
“내 친구가 말하네·”
라온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롭고 난해한 검술들을 원한다고 해· 귀중한 검술일수록 좋다고도 하고·”
-어···?
라스가 멍하니 눈을 끔벅이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보, 본왕이 언제! 음식이라고! 검술이 아니라!
녀석은 뭐 하는 거냐며 방방 뛰었다·
‘아, 미안· 다시 말할게·’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술을 뗐다·
“검술만이 아니라, 보법이나 체술도 좋다는데? 이 녀석 인간의 무학에 관심이 많더라고·”
“그, 그래? 알겠어· 내가 가져올 수 있는 것을 모두 챙길게·”
버렌은 기다리라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놈이 진짜 사람 새끼냐!
라스가 라온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망할 천족이나, 신들도 너 정도는 아니라고!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온 거야!